공지영의 소설(2)

진정한 삶을 위한 소설적 탐색 : <꿈> (2)

by 한혜경



진정한 삶을 위한 글쓰기


앞에서 변화된 현실 속에서 변하지 않는 자들의 삶을 살폈는데, 그렇다면 변한 현실 속에서 글쓰기는 어떤 양상을 보이고 있는가?


<꿈>에서는 예술이 자본에 예속되는 체제 하에서 이에 굴복하지 않으려 하는 예술가들의 어려움들이 드러나 있다.


작가 외에도 작곡가, 영화감독 등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현재 모두 작품을 발표하지 못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창작한 작품이 있는데도 제작자를 만나지 못해 발표하지 못하는 감독이나 인기가수들 때문에 순서가 뒤로 밀리는 작곡가와는 달리 작가인 화자는 발표지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몇 달 동안 한 줄의 글도 완성하지 못하고 있다.


돈이 안 되는 작품은 불필요하다는 생각이 지배적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글쓰기는 자본가에게 의존할 가능성이 적고 '가장 원가가 싸게 먹히는 예술'이며 '자본가들을 향해 마음 놓고 비판을 해댈 수도 있는', 상대적으로 쉬워 보이는 장르이다.


그러나 자본가의 압력과 무관한 영역인데 쓰지 못하고 있으므로 글쓰기의 경우가 더 고통스러울 수 있으며, 다른 예술에 비해 작가 개인의 문제가 더 많이 작용한다고 할 수 있다. 왜 못쓰는가는 작가의 문제이며 그것을 해결하는 것도 작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즉 다른 예술가들의 고뇌는 자본주의 체제와 관계있지만 화자가 안고 있는 글쓰기의 문제는 개인적인 차원의 것이다.


컴퓨터 위에서 자판을 두들기면서 쓰고 지우고를 반복하고 있는 화자의 현재 심경은 '무작정 화가 나’ 있는 상태이다. '왜 당신 글에는 전망이 없느냐고 무심히 묻는' 독자들이나 자신의 글을 '빨리빨리 읽어치우는' 평론가들에게도 화가 나 있고 완성되지도 못한 글들이 컴퓨터에 잔뜩 들어있는 것, 그 글들이 순간에 지워질 수 있다는 것, 또 그 글들을 지워놓고도 전혀 후회가 되지 않는 것 등등에 화가 나 있다.


이러한 심리의 기저에는 '간단한 세월'이 아니었던 십 년이 다른 자들에게 '짧고 간결하'게 받아들여지는 현실에 대한 서운함과 그 십 년을 함께 보냈던 ‘우리’의 현재 삶이 힘든 것에 대한 연민이 깔려 있다.


바뀐 현실에 맞춰 살지 못하고 '저주받은 것처럼' 살아가고 있는 자신들의 모습이 안타까운 것이다. 외면적으로 웃고 있지만 내면에 상처를 지닌 채, 다른 자들은 가볍게 지나가는 길을 '낑낑거리며’ ‘뒤로 밀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 같은 그들에 대해 어떤 자리매김을 해야 할지, 또는 어느 길로 가야 옳을지, 곧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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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자가 소설을 쓰게 된 근원은 어릴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린 시절 동네를 찾아왔던 비행기 모양의 놀이기구를 멀미 때문에 타지 못하고 구경하고 있던 장면이 회상되는데, '금밖에 서서', 친구들이 탄 비행기를 바라보던 모습에서 자신의 소설 쓰는 태도를 끌어내고 있다.

만일 내가 멀미를 하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그 안에 들어가서 모형비행기가 오르내릴 때의 짜릿한 재미만 기억해 냈을 것이었다. 그러나 내 기억 속에는 그런 것 대신, 나를 빼놓고 모형비행기를 타던 친구들의 얼굴이 남아있는 것이다. 그 풍경과 그들의 표정, 지켜보고 있던 내 모습까지 말이다. ……(중략)… 영원히 술래가 된 것처럼 금 밖을 서성이면서 그들이 그것을 타는 모습을 지켜보기… 그리고 그들처럼 해보는 것을 상상하기... 그래서 밖에 서 있는 자의 쓸쓸함과 안에 있는 자들의 복닥거림을 엮어내 보기... 그런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바로 소설 쓰기가 아니었을까?



'금밖에 있기'는 소설을 쓰는 태도의 근간을 이루면서 화자의 현재 삶을 규정짓는 것이기도 하다.

그녀는 이혼녀로서 친구들이 남편이나 시댁, 아이 이야기를 할 때 금밖에 있는 사람이다. 동료들과 함께 간 낚시터에서도 낚시에 참여하기보다 한편에 앉아서 낚시하는 이들을 바라보는 것을 즐긴다. 이처럼 무리 밖에 서 있음은 쓸쓸함은 있지만 소외감을 느끼는 정도는 아니고 그 안에 있는 자들을 관망하기 좋은 위치에 있다고 하겠다.

금 밖에서 관찰하는 태도는 그 안의 상황에 대해 관여하는 것은 아니므로, 80년대나 현재, 그리고 다른 삶에 대해 바라보기만 하는 글쓰기를 낳는다. 금 밖에서 금 안의 사람들이 복닥거리는 것을 엮어 글로 완성할 때 작가는 단순한 관찰자일 뿐이다.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바라보고 있는 한, 안의 삶들을 체험하지 못한 겉도는 글들이 될 가능성이 있다. 이 점은 그녀의 글에서 고통스러운 삶이 아름다운 것으로 자주 그려지고 있는 현상과도 관계가 있다.


이러한 화자의 글쓰기는 선배 시인의 글쓰기와 비교된다.

시인의 글쓰기에서는 시보다 삶이 우선이다. 급진적인 문학단체에 몸담았다가 징역을 살았고 자신의 삶은 돌보지 않고 남을 위해 궂은일하고, 화내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는 그는 성인 같은 이미지로 제시되지만 정작 자신 가족의 생계는 책임지지 못하는 무능한 가장이기도 하다. 겉으로 표출되진 않지만 이러한 삶에 따르는 괴로움들이 그로 하여금 이박삼일 동안이나 술을 마시게 하고 성 프란체스코의 기도를 외우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시인의 삶은 상업성 위주로 치닫는 현실에서 당연히 뒤처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은 상태이고 진리대로 살고자 한다. 현재의 삶이 시궁창에 빠진 것 같더라도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님을 역설한다. 곧 시궁창에 빠졌을 때 '더는 더러워질 수 없는 느낌, 더는 모욕당할 수 없는 평화’를 느끼게 되며 여기서부터 시작하는 거라고 말함으로써 결국 화자로 하여금 이 생각에 동조하게 만든다.


화자에게 잊혀가는 지난 시간을 상기시키고 꿈을 잃지 않도록 하며, 또 그녀의 글쓰기가 한갓 돈을 위한 글쓰기로 전락하지 않도록 하는 데 독자들도 한몫을 한다. 시위주동을 해서 제적당한 선배를 옥바라지하다 결혼했다는 한 여성 독자는 변한 남편의 모습에 배반감을 느끼고 허망해하던 중 화자의 소설을 읽고 '사랑이라든가, 행복이라든가, 그도 아니면 희망 같은' 것들을 잊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고 편지한다.


화자의 글을 읽고 나서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 오래 생각했다는 한 여대생은 1980년대는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도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어내던’ 시절이었지만 지금은 '별이 우리에게 아무것도 말하지 않아 혼돈의 때'라고 쓴다.


상업적 이윤이 우선되며 지난 시절을 '이제는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 상황에 절망하고 무엇을 써야 하는지 방향을 잃고 글을 쓰지 못했던 화자는 결국 문제는 자신의 삶이 엉망진창이었다는 데 있음을 발견한다.

쓰고 싶은 것들은 많지만 그것을 꿰어나갈 삶을 찾지 못했던 것이다. 이는 글과 삶이 일치되어야 한다는 생각의 표출로서, 아름다운 삶이면서 아름다운 글을 지향하고자 하는 그녀의 결론을 읽을 수 있다.






그동안 변화된 현실 앞에서 지향점을 잃고 방황했던 그녀는 앞으로 갈길이 '울퉁불퉁하고 가파르고 힘겹다' 해도 '진짜 길'을 걸어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시인의 삶을 보면서 정녕 시궁창에서 시작해야 하는가 하는 회의를 품었었으나 시궁창에 닿아야 시작할 수 있음을 깨닫는 변모를 보여준다. 그리하여 1990년대라는 금밖에 서서 지난 시간과 그때의 사람들에 대해 들여다보는 것이 자신의 글쓰기의 소임임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글쓰기의 본질이 삶의 문제에 있음을 깨달았다는 것과 90년대 금밖에 서서 지난 시간을 돌아보기가 어떤 관련이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해 의구심이 남는다.


가야 할 길이 이미 '살육과 절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해도,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길이라면’ ‘타박타박이라도 걸어서 넘어가야 하는' 것이라고 다짐하는 모습은 감동스럽기는 하지만 다소 막연하다.

이 길이 구체적으로 어떤 길인지 나타나 있지 않으며 따라서 90년대에 서서 그 시절을 들여다보겠다는 마지막 언급도 강한 울림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마지막 문장이 의문형으로 끝나는 것은("정녕 그것은 그저 꿈을 꾸던 사람들에 대한 꿈일 뿐일까.")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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