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삶을 위한 소설적 탐색 : <꿈> (1)
1988년 <동트는 새벽>으로 등단한 공지영은 창작집으로 <<인간에 대한 예의>>, 장편으로 <<더 이상 아름다운 방황은 없다>>, <<그리고 그들의 아름다운 시작>>,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고등어>>, <<봉순이 언니>>등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그녀의 이름은 80년대를 회고하는 이른바 '후일담소설'을 다룰 때나 여성의 삶을 논할 때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이름이 되었고 특히 장편들은 대부분 베스트셀러가 됨으로써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리하여 '공지영'이란 이름은 1990년대 한국 소설 문단에서 '작은 정부'로 일컬어질 정도로 상당히 큰 울림을 갖는다고 하겠다.
그녀가 자신의 글쓰기에 대해 밝힌 글을 참고하면, 문학이란 '하찮고 우스운 것’이란 생각이 지배적이던 1980년대에 글을 쓰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글을 발표하면 투사들에게 비웃음의 표적이 되곤 하던 당시, 그녀가 자신에게 반복해 던진 질문은 "젊은 날의 김지하같이 혹은 전태일같이 살지도 못하면서 쓰는 네 글이 도, 대, 체, 누구에게 도움이 될 것인가"였다고 한다. 곧 그녀의 글쓰기의 기저는 역사 사회적 맥락에서 부끄럽지 않은 삶에의 지향이 놓여있다고 할 수 있다.
김지하나 전태일 같지 않은 삶이 부끄러워서 한때 글쓰기를 포기하기도 했던 그녀는 어느 날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었으며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 깨닫고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투사들의 '아름다운' 삶에 감동하면서 그렇지 못한 자신을 질책하던 작가는 시대가 바뀌면서 그들의 변화를 목격하게 된다.
1980년대에 이념적으로 탄탄하고 원칙적인 입장을 견지하던 자들이 시대가 바뀌었다고 해서 흔들리고 방황하는 속에서 그녀는 ‘이념은 수정되거나 혹은 사라지지만 보다 나은 인간들의 삶을 향한 인간들의 순수한 열정’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하면서 작가란 바로 이를 짊어지는 것이라고 언명한다. 이에서 시대 변화와 상관없이 '그럴듯한 작품보다는 진실을 찾는 쪽'에 여전히 무게중심을 두고 있는 공지영의 창작태도를 읽을 수 있다.
이러한 입장에서 출발하는 공지영의 글쓰기는 선배들의 '실패와 좌절을 배우기 위해「교활하게」 노력’하고 ‘이 땅의 아픔들에「순결하게」 귀 기울일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 '현실을 탐구'할 것을 지향한다. 동시에 '아름다움'에 천착함으로써 '탐미주의자가 될 생각'임을 밝히고 있는데 여기서 공지영이 말하는 아름다움은, 하나밖에 없는 제 생명이 아득한 우주 속으로 사라져 갈 것을 알면서 도청에 뛰어들었던 시민군의 아름다움, 고문을 받으면서 동료의 이름을 불지 않는 아름다움으로 자기희생적이며 개인의 삶보다 대의를 존중하는 성향을 뜻한다.
그런데 이 아름다움이란 주관적이면서 가변적인 것이고 또 아름다움을 그리는 것으로 소설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므로 문제가 된다. 곧 소설에서는 인물들 사이의 관계가 드러나되, 그 관계가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그 결과는 어떠한가 하는 사건의 원인과 결과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전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지영의 소설에서 이 아름다움은 현상적으로만 묘사됨으로써 “이상과 현실 혹은 이론과 실천의 관계 속에서 혹은 나름대로 역사의 법칙성을 찾아낸 자리에서 읽히지 않았다”는 비판이 제기될 수 있는 것이다.
1980년대 세대의 이념적 현실을 계속 다루고 있지만 기실 작품의 내용은 남녀 등장인물의 사랑과 배반, 만남과 헤어짐에 주력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것은 사회 역사적 맥락보다는 현상적인 아름다움의 묘사에 그쳤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는 소설을 통속적이거나 감상적으로 끌고 가는 요인이 되고 있으므로 그녀의 소설은 이에서 벗어나 "한 개인의 내면에 숨어있는, 필연적으로 숨어있을 수밖에 없는 모순과 착종, 그리고 그것의 역사성을 드러내"는 쪽으로(채호석) 나아갈 것이 요청된다.
역사 사회적 의미를 추구하면서 ‘아름다운' 삶을 지향하는 공지영의 소설이 변화된 1990년대 현실을 어떻게 드러내고 있을까.
1993년 가을에 발표된 <꿈>(<<인간에 대한 예의>>에 수록)과 1995년 겨울의 <모스끄바에는 아무도 없다>는 1980년대를 회고하면서 90년대에 살고 있는 소설가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변화된 외적 현실은 작품 속에서 어떻게 묘사되고 있는가, 1980년대에 치열하게 살아 ‘등 푸른 고등어’였던 인물들이 1990년대에 와서 '자반고등어'가 되어있는 상황이 이 두 작품에서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가, 그것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어떠한가, 그리고 다시 시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전망이 있는가를 읽어본다.
「꿈」은 1981년에 대학에 입학한, 이른바 '광주세대'인 작가 ‘나’를 주인공으로 하여 그녀가 겪는 일들을 6개의 장면으로 펼쳐서 보여준다. 현재 '나'가 만나는 사람들과 '나'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통해서 자본이 중요한 가치가 된 현실 속에서 고뇌하는 예술가들을 드러내고 있다.
대학에 입학했을 때 광주는 끝나 있었지만 한 번도 ‘광주를 끝낼 수는 없었던’ 세대에 속하는 화자는 그 시절을 잊은 듯한 1993년의 상황 속에서 휘청거리며 서 있다. 민주화를 향한 정치적 구호로 가득했던 1980년대와 달리 덜 정치적이 된 현실 앞에서 광주세대들은 구심점을 잃고 방황하고 있는 것이다.
'아주 적은 일들이 일어났을 뿐'이라고 애써 강조하는 것은 그 변화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심리 탓이다. 80년대에 중요했던 이념은 이제 욕망과 자본에 헤게모니를 빼앗겼으며, 지난 시절 가치를 두었던 것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은 할 말을 못 한 채 견디고 있다.
자본 위주의 사회에 걸맞게 삶의 방식을 바꾼 자들은 과거가 어떠했는가 따위는 쉽게 잊고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며 안정된 삶을 누리고 있다. 1980년대에 "뛰쳐나"오지 않고 학교에 남아서 교수가 된 평론가, 예술성보다는 잘 팔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영화사 사장, 노동운동가였다가 큰 회사에 취직한 후 "올여름엔 동남아로 한번 떠나보는 게 어떨까"라고 말하는 한 독자의 남편 등이 이에 속하는 인물들이다.
이와 반대로 물질보다 가치를 중시하는 인물들은 돈에 무관심하며 자신보다는 남을 위한 삶에 무게중심을 두며 살아간다. 꽤 급진적인 문학 단체에 몸담았다가 징역을 살고 나온 일이 있는 화자의 선배 시인은 "남을 위한 일에, 특히 그것이 궂은 일일 때에 빠지지" 않는다.
이외에 노동현장에서 수배를 받으면서 쓰기 시작했는데 고치다 보니 역사소설이 되어버린 노동소설을 오 년째 고치고 있는 소설가, 제작자는 '벗기는 영화’나 섹스코미디를 원하는데 "돈도 안 되는" 시나리오를 계속 고치고 있는 영화감독, '쉽지만 통속적이지 않은 음악'을 작곡했으므로 음반을 못 내고 있는 작곡가 등이 등장하여 모두 자본 위주의 체제로 변한 현실에서 주변인으로 존재하는 예술가들의 어려움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경제적으로 무능하기 때문에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아내가 버는 '생활비만 축내는' 존재들로 살아간다.
이들의 말하기와 행위형태는 겉으로 드러내는 것을 억제하고 안으로 감추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결정적인 사항들'을 피하고 '빙빙 돌려’ 말함으로써 상처를 감추려고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생계는 어떻게 해? 라거나, 아직도 진행되는 그 재판 끝났어? 라거나, 형이 그 운동단체에 기금을 내기 위해 저당 잡혔던 집문서는 찾았어 라거나" 하는 말들을 내뱉지 않고 '서로서로 모른 척하기, 그래서 술자리에서는 재미있는 말만 하기'가 그들 사이에서의 묵계가 되어 있는 것이다.
외부를 향한 대응태도 역시 속생각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작품의 첫 삽화에서 제시되는 택시 안 장면은 현실에 대한 이들의 대응 양상을 잘 보여준다. 택시기사가 틀어놓은 노래 테이프에서 귀에 거슬리는 노래가 끝없이 이어지고 가늘고 가파른 골목길을 곡예하는 것처럼 운전하는 속에서도 화자와 작곡가 박은 "입술을 꼭 앙다문 채 눈을 감고" 참는다. 이 상황은 이들의 의사와 전혀 상관없이 폭력적으로 다가온 것인데 이에 대해 이들은 참고 견딜 뿐이다.
택시에서 내린 뒤 토할 정도로 참기 어려웠음에도 왜 멈추라는 말을 하지 못했을까가 여기서 화자가 제기하고 있는 의문이다.
맘에 안 드는 현실 앞에서 왜 저항하지 못하는가, 왜 모욕적인 처사에 항의하지 못하는가, 80년대에 활발히 움직였던 이들이 90년대에 와서 무언, 부동의 자세를 보이는 것은 어떤 이유인가,
그러나 이 작품에서 이에 대한 답은 제시되지 않는다. 왜에 대한 천착은 나타나지 않고 그들의 아픔만 동정적으로 그리고 있을 뿐이다.
한편, 예술가들의 무력하고 왜소한 모습은 소쩍새의 이미지로 제시된다.
'저주받은 부엉이'처럼 보이는 소쩍새의 눈빛에서 화자는 '영원한 갇힘, 풀어내지 못하고 쌓여만 가는 슬픔, 원망까지도 뚫고 나올 듯 아직도 치밀어 오르는 어떤 꿈' 같은 것들을 느끼는데 이 이미지는 자신의 생각이나 상처를 밖으로 풀어내지 못하는 예술가들을 상징한다.
그런데 이 갇힘과 쌓임 속에서 '아직도 치밀어 오르는’ 꿈이 있다는 것에서, 아직 이들이 꿈을 간직하고 있으며 지금은 억압되어 있지만 언젠가는 치밀어 오를 수 있는 가능성을 감지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들이 아직 포기하지 않는 꿈은 무엇인가?
이 꿈은 변화된 삶의 방식을 좇지 않고 기존의 가치관을 지니고자 버티게 하는 ‘무엇'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것은 밤 세시에 화자를 깨워서는 '길을 찾아봐'라고 말한다.
그녀가 반복해서 꾸는 악몽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꿈이라는 사실과 관련지어 볼 때, '길을 찾아보라는 것은 '진짜 길’을 찾으라는 의미일 것이다.
자본 위주의 시각으로 본다면 '저주받은 것처럼' 보이고 시궁창에 빠져 있는 듯이 보이지만 시궁창에 빠졌을 때 더는 더러워질 수 없는 느낌으로 평화를 얻듯이 밑바닥에 닿아야 새로 시작할 수 있고 그렇게 찾는 길이 '진짜 길'이라는 생각에 이들은 매달려 있다.
아직 포기할 수 없는 어떤 꿈, 힘들지만 추구해야 하고 지켜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을 믿는 마음이 이들의 의식 밑바닥에 놓여 있다. 이 때문에 그들은 버티면서 살아가는 것이고 꿈을 버리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화자도 다시 시작해 보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변화된 가치를 무조건 좇지 않고 자신의 가치관을 지니고 버티겠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작품 제목인 '꿈'은 작중인물들이 꾸는 악몽이면서 다시 시작해 보려는 소망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꿈의 구체적 내용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볼 때 미흡함이 남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광주나 80년대 이념운동과 연관이 있는데 여기서 광주나 이념운동은 80년대의 구체적 상황이라기보다 인간답게 살기 위한 것이라거나 '가야만 하는 길'을 좇는 삶, 또는 자신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태도를 뜻하는 추상적 기호이다.
곧 작가가 언명한 바 있는 '아름다운 삶'인 것이며 동시에 이들이 놓지 못하고 있는 꿈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에서 나타나는 바, 이념 위주의 시대에서 자본 위주의 시대로 바뀌었다는 현실인식은 사회역사적 맥락에 의거한 것이기보다 아름다운 삶의 가치를 더 이상 인정하지 않고 돈만을 중시하는 사회로 변화되었다는 사고의 표출이다.
변화된 현실 속에서 예술의 상품화를 인정하지 않고 ‘진짜 길’을 가고자 하는 이들의 고투를 아름답게 보는 작가의 시선에 공감하면서도, 그 시선의 낭만적 성향에 아쉬움을 느끼게 된다. 소외된 자들끼리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아직 덜 외롭다는 설정이 감상적이기도 하다.
힘들 때 위로해 주며 함께 술을 마시고 낚시터에도 가는 등의 유대가 가능하고 작가의 생각에 공감하는 독자들이 곁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위안이 되기도 하지만 현실의 문제점이나 위기감을 명확히 파악하는데 도움을 주지 못한다. 독자들이 그녀의 작품을 읽고 '사랑이라든가, 행복이라든가, 그도 아니면 희망 같은… 이제는 제게서 너무나 멀어져 버린 그런 단어들'을 잊고 살아간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고 편지함으로써 작가 자신도 잊은 지 오래인 말들을 일깨운다고 하는 작중 삽화는, 작가 자신과 나아가 독자들로 하여금 감상에 젖게 하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감상적 사고나 추상성이 극복되지 않는 한, '왜'라는 역사 사회적 맥락의 해답은 찾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꿈」에서 작중인물들이 자본위주로 바뀐 현실 속에서 예술의 순수성이나 옳은 삶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않고 길을 찾고자 하는 것은 아름답지만 한편으로는 공허해 보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