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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혜경 Jan 07. 2024

길 위의 삶

<삼포 가는 길>과 <최고의 사파리> 


‘집’이란 말, 언제 어디서 들어도 아늑해지는 말이다.

 따뜻한 불빛, 그 아래 둘러앉은 식구들. 두런두런 나누는 이야기, 간간이 피어나는 웃음... 

 비바람이 몰아치거나 영하의 추위로 꽁꽁 얼어붙은 날, 우리를 안온하게 지켜주는 울타리.    그래서 집은 ‘밖’에서 힘겨운 시간을 보냈어도 포근하게 품어주는 ‘안’의 공간이다.  

 

 속내를 들여다보면 가족 간의 갈등과 대립이 엉켜 있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집’이란 단어가 불러일으키는 느낌은 안락함과 향수이다. 

 

그런데 이러한 집이 허락되지 않는 삶이 있다. 하루아침에 집이 없어져 황량한 폐허에 놓인 사람들, 집에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현실에서 닿을 수 없는 곳이 되었으므로, 이들에게 집은 가슴속에서 ‘유토피아’로 자리 잡는다,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은 1970년대 부초처럼 떠도는 이들을 그린 소설이다. 이 시기는 잘살아 보자고 근대화정책에 박차를 가하던 1960년대로부터 10년이 지난 시점이다. 1962년부터 시작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목표치를 웃도는 경제성장률을 이뤘고 1인당 GNP는 83달러에서 123달러로 높아졌다. 고도성장의 초석이 다져진 시기였으나, 경제개발의 수혜에서 소외된 이들이 늘어나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농촌의 많은 젊은이들이 돈을 벌기 위해 도시로 향했지만, 현실은 기대와 달랐다. 공장에서 ‘수출의 역군’으로, 가정집에서 ‘식모’로 장시간 노동한 대가는 크지 않았다. 금의환향을 꿈으로만 간직한 채 춥고 낯선 타향을 떠도는 이들이 생겨난 까닭이다. 


 <삼포 가는 길>의 첫 문장 “영달은 어디로 갈 것인가 궁리해 보면서 잠깐 서 있었다.”는 이러한 삶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갈 곳이 없어 막막한 영달이 서 있는 곳은 새벽의 겨울바람이 매섭게 불어오는 들판이다. 겨울 새벽이라는 시간과 매서운 바람이 부는 들판이라는 공간은 안락한 집이 허용되지 않은 이의 고달픈 현실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장치이다.      




 이어서 등장하는 정 씨는 영달과 같은 공사판에서 일했던 인물인데, 고향에 가는 중이라고 말한다. “길 위에 서 있”는 영달과 달리 “집으로 가는 중”이었던 것. 


 떠나온 지 10년이 넘었다는 정 씨의 고향은 남쪽 끝에 있는 ‘삼포’이다. “한 열 집 살까? 정말 아름다운 섬이오. 비옥한 땅은 남아돌아가구, 고기도 얼마든지 잡을 수 있구 말이지.” 정 씨가 회상하는 삼포는 현실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낙원의 이미지이다. 작가는 소설 끝에 가서 삼포가 육지로 변해 공사판이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면서 풍요롭고도 아름다운 낙원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확인시킨다. 


그리고 백화가 있다. 열여덟에 가출해 술집으로 팔린 이후, 쓰린 일들을 겪어 스물두 살임에도 조로해 있다. 고향집이 그리워 근처까지 가본 적도 있지만 차마 들어갈 용기가 없다. 본명인 ‘이점례’의 시간에서 너무 멀리 온 것이다. 


온몸이 어는 추위와 허기 속에서 눈 덮인 길을 가야 하는 세 인물의 여정을 통해 작가는 따뜻하고 정이 오가는 고향에서의 삶, ‘의리’와 ‘순정’을 지키며 사는 삶이 허용되지 않는 산업화 시대의 현실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또 한편으로, 전쟁으로 이제껏 누려온 삶이 무자비하게 파괴된 사람도 있다. 최근에도 우크라이나와 가자지구에서, 무차별적 공격으로 삶의 기반이 송두리째 흔들린 사람들을 보고 있다.    


 나딘 고디머의 짧지만 울림이 큰 이야기 <최고의 사파리>는 내전으로 고향을 떠나야 하는 모잠비크사람들을 그린 소설이다.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는 어린 소녀의 시점으로 그리고 있어, 참상이 더 아프게 다가온다. 


 정부가 노상강도라고 부르는 적군이 마구 사람을 죽이고 집들을 불 지르고 모든 것을 약탈해 간다. 전쟁터에 나간 아버지는 소식 끊긴 지 오래고 가게에 간다며 나간 어머니도 돌아오지 않아 오빠와 남동생과 소녀만 남는다. 


 할머니가 아이들을 데리고 가 돌보다가 결국 집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위험을 무릅쓰고 ‘그곳’으로 표현되는 곳까지 가는 여정을 시작한다. 그들이 지나가야 하는 곳은 크루거 공원이다. 크루거 공원은 ‘동물들만 사는 거대한 왕국’으로 관광객에게 ‘최고의 사파리’로 알려진 곳이다. 


 “아프리카 모험은 계속된다... 당신도 할 수 있다! 최고의 사파리, 아니면 탐험 여행을 떠나자.” 소설이 시작되기 앞서 인용되어 있는 문구로, <옵서버>라는 영국 잡지의 아프리카 관광 선전에서 따온 것이다. 


작가는 이 광고문에서 소설 제목을 가져오면서 관광객에게 ‘최고의 사파리’인 공간이 누군가에겐 굶주림으로 허덕이고 동물의 위협에 무방비상태로 내던져진 잔인한 공간임을 선명하게 대비시키고 있다. 

게다가 존재조차 숨겨야 한다. 이들이 공원에 있다는 사실이 탄로 나면 돌려보내기 때문이다. 이 공원에서 일하는 사람 중 같은 나라 사람이 있지만, 이들을 도우면 일자리를 잃을 수 있으므로 이들을 봐도 못 본 척할 수밖에 없다.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숨죽이고 지나가는 이들은 유령과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수많은 위험과 굶주림 속에 이어진 여행이 드디어 끝나고, 살아남은 이들은 ‘그곳’에 도착한다. 

'그곳'에는 학교나 교회보다 더 큰 천막이 있었는데, 200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그 안에서 생활한다. 큰 자루나 종이 판자로 사방을 막아 각자의 집으로 삼는다. 


배급차가 와서 곡물가루를 배급하고 헌 옷더미에서 옷가지를 골라 입고, 아이들은 학교에도 간다. 천막 주변에 있는 땅에 콩과 곡물과 양배추를 심어 키우고 마을에 가서 일자리를 구한 사람도 있다. 천막 안 공간이 비좁아 서로 가깝게 누워 있어야 할 만큼의 자리밖에 없지만 할머니는 소녀와 오빠에게 학교 갈 때 신을 신발을 사주고 숙제 검사를 하며 뒷바라지를 한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영화를 만든다는 백인들이 찾아와 할머니에게 질문하는 장면이다. 


“언제부터 이렇게 살고 있나요?” 

“이 천막에서 이년하고 한 달 살았어요.” 

“앞으로 바라는 것 있어요?” 

“아무것도요. 여기에 있잖아요.” 

“고국으로, 모잠비크로 돌아가고 싶나요?” 

“난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집도 없어요.” 


하지만 할머니의 말을 들으며 소녀는 생각한다. 


“난 돌아갈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노상강도가 없어지면, 어머니가 기다릴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가 할아버지를 두고 왔을 때, 할아버지는 뒤쳐진 것뿐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집에서 기다릴 것이다. 난 그들을 기억할 것이다.”라고.


현실을 알고 있는 할머니와 대비되는 소녀의 소망이 천진하여 더욱 눈물겹게 다가오는 결말이다.   



* 격월간 [그린에세이] 2024. 1,2월호 <한혜경 언어의 산책>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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