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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혜경 Feb 23. 2024

사실과 사실 사이

최시한 <허생전을 배우는 시간> 공지영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처음엔 “엉엉 울면서 읽었다”에 눈길이 갔다.


 공지영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 대한 글이었는데, 글쓴이가 우리 사회의 왜곡된 현상을 똑 부러지게 짚어내는 여성학자였으므로, “눈물을 흘렸다” 정도가 아니라 “엉엉” 울었다고 하니 슬며시 웃음이 나왔던 것이다. 나도 소설 속 사형수의 삶이 안타까워 눈물을 흘리긴 했지만 “엉엉”까지는 아니었기 때문에 글쓴이가 갑자기 어린애 같기도 하고 허물없는 친구 같기도 했다. 


그러다 이어지는 문장에서 오래전 장면 하나가 떠올랐다. 

여자 주인공보다 “강간 살인 용의자 윤수와 동일시하며 읽었다”라고 쓴 대목에서였다. 

조금이라도 자신의 상황과 비슷한 여자주인공이 아니라 전혀 다른 시간을 살아온 윤수와 동일시했다는 것에서 25년 전 어느 날이 생각난 것이다. 


가까운 선후배 5명이 스터디를 하던 때. 

[허생전을 배우는 시간]이란 소설([모두 아름다운 아이들}에 수록)에 대해 토의하는 날이었는데, 작품 분석과는 별개로 모두 한 인물에 마음이 가있는 걸 발견하고 웃었던 기억이다. 

그 인물 이름도 윤수이다. 



이 소설은 제목 그대로 고등학생이 [허생전]을 배우는 국어수업을 중심으로 써 내려간 일기형식의 작품이다. 하지만 지식인이란 어떤 사람을 의미하는가? 글 읽기와 글쓰기, 삶의 문제 등 여러 가지 생각거리를 던지고 있어, 우리는 진지하게 의견을 나눴다. 


소설은 국어시간에 [허생전]을 서로 다르게 읽어내는 것처럼, 전교조활동으로 쫓겨나는 국어교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상이한 반응들을 네 명의 학생들을 통해 그려낸다.

 

똑똑하지만 자기 의견이 아니라 남의 말을 제 말처럼 내뱉는 학생, 

“우리 아버지가 그러는데” 하며 아버지 권위를 빌어오는 학생, 

작품 이해도 깊고 자기 생각을 조리 있게 발표해서 국어교사의 칭찬을 받는, “글도 잘 쓰고 말도 술술 하는 애”인 주인공, 

그리고 말을 더듬고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표현하는 능력이 부족한 윤수가 그들이다. 


현실에서라면 발표 잘하고 똑똑한 학생, 약자를 돕고 생각이 깊은 주인공 같은 학생을 선호하겠지만, 심정적으로는 모두 심약한 윤수와 동일시하고 있었다.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더듬거려서 반 아이들에게 놀림당하던, 그래서 허생에 대해서도 “아무도 자기를 알아주지 않아서”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버렸다”라고 해석한 윤수가 이해되고 가슴이 아팠던 것이다. 

우리 모두 윤수 편이라는 사실에 재미있어하면서, 소설이란 약자나 문제적 인물을 조명하는 이야기라는 점을 다시 한번 확인하며 토의를 마무리했다.


그때의 선후배들이 다시 모여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이번에도 윤수의 불행에 공감하리라. 




우연히도 이름이 같지만 이 작품의 윤수는 [허생전을 배우는 시간]의 윤수와는 비교할 수 없이 가혹한 시간을 보낸 자이다. 


가난한 데다 폭력을 일삼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견디다 못해 집 나간 어머니, 어린 나이에 동생까지 보호해야 하는 소년이었다. 

엄마가 잠시 이들을 데려가지만 다시 버림받고, 고아원이든 소년원이든 가는 곳마다 폭력에 내몰리는 삶. 

연약한 데다 눈이 먼 동생은 굶주림과 폭력을 견디지 못하고 길거리에서 죽고, 이후 윤수는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교도소를 들락거리게 되고 결국 강간 살인 용의자가 되기에 이른다. 


만약, “사실”을 보도한다는 뉴스에서 그의 기사를 마주했다면 어떠했을까?


아마도 언론은 육하원칙에 의거해 언제 어느 장소에서 윤수가 공범과 함께 한 소녀를 강간 살해하고 두 여자를 죽였다고 보도했을 것이다. 그러면 십중팔구 극악무도한 놈이라고 몸서리치거나 이런 놈은 중형에 처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겠지. 


작품 속 여자 주인공의 말처럼 기사에는 “사실은 있는데 사실을 만들어낸 사실은 없”으므로 그렇게 되기까지 내몰린 정황을 모르니까. 그리고 알려고도 하지 않을 테니까. 공범이 거짓 진술을 했으리라는 의혹 같은 건 들어설 여지가 없으니까. 

전과 5 범이니 당연히 살인자겠지 확신하고 바로 잊을 것이다. 

이런 걸 일일이 담아두기에 우리 생활은 너무 바쁘므로 간단히 소비하고 넘어갈 뿐이다. 


하지만 소설은 그 이면을 파헤쳐 보여주므로 악독해 보이는 인물의 사연에 귀를 기울이게 한다. 

그러다 보면 단 한 번도 따뜻한 손길을 받아본 적 없이 냉대와 모멸 속에서 파멸의 구렁텅이로 내다 꽂혔던 사연을 알게 되고, 이런 처지라면 이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었겠구나 하는 생각도 고개를 드는 것이다. 


거기에다가 윤수의 변화를 통해 세상을 향해 반항과 분노, 증오만 내뿜던 인간도 “길고 끈질긴 노력”으로 아주 느리지만 조금씩 마음을 열 수 있다는 가능성을, 궁극적으로 인간은 선하다는 사실을 조심스럽게 믿게 해 준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나와 달라서 받아들일 수 없다고 단정 짓기 전에 그런 모습이 만들어지기까지 어떤 일들이 있었나 들어주려고 한다면, 더디더라도 세상이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너무 순진한 생각이라고 비웃는 이도 있겠으나, 그럼에도 “연민은 이해 없이 존재하지 않고 이해는 관심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작품 속 말에 힘을 얻어 다른 삶에 대한 이해 폭을 넓혀가 보자고 다짐해 본다. 

사실과 사실 사이의 거리에 더 관심을 가지면서. 




작품 속 약자에 연민을 느끼는 이라면 현실에서도 공감능력이 크리라는 생각에 오래전 외로운 인물의 슬픔을 같이 아파했던 선후배들이 보고 싶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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