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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혜경 Jun 18. 2024

"숨은 꽃" <시간의 걸음>  

- <이명지 수필가의 나를 사로잡은 문장> 

"숨은 꽃"에 대한 글을 소개합니다. 

<이명지 수필가의 나를 사로잡은 문장>에 수록되었습니다.    


 


 


이게 웬일인가지난주 죽었다고 생각했던 나무에 진분홍빛 꽃들이 피어나 있지 않은가죽은 게 아니었어!!!  저절로 탄성이 나왔다.

그땐 꽃이 피기 전이었던 거야!”     


 ㅡ 한혜경 에세이 숨은 꽃’ 중에서/<시간의 걸음수록/글터      


 나는 기다리는 걸, 기다려주는 걸 잘하지 못한다. 

지레짐작하고 단정 짓고 돌아서기 일쑤다. 발걸음도 빨라 누구와 나란히 걷는 것도 잘하지 못한다. 

같이 걸었는가 싶은데 내 생각에 빠져 걷다 보면 어느새 저만치 떨어져 걷고 있는 동행들을 보며 미안한 마음이 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사람의 감정에도 속도가 있다. 

어떤 사람은 즉각 나타나고 어떤 이는 아주 천천히 드러난다. 천천히 피는 꽃도 있고, 반짝 피었다 금세 시드는 꽃도 있다. 

기다릴 줄 아는 것도 인품이 아닐까 싶다. 끝내 안 피는 꽃은 없다. 그건 꽃이 아니라 잎일 뿐.     



계절에 맞춰피어날 시간에 맞춰 필 뿐인데잘 모르는 인간이 미리 와서는 죽었네꽃이 안 피네지레짐작하는 일들은 얼마나 많을까.”     


 한혜경의 글을 읽으며 또 한 사람의 글이 생각났다.      




여섯 살이 되어서야 말을 시작한 아이는 모든 것이 다 느렸다걸음마도 18개월에 겨우 시작했고또래들은 온갖 말을 재잘거릴 때도 입술을 꼭 다문 아이가 애간장을 녹였다.”     


 두 돌이 지나도 말을 하지 못하고 힘들면 울기만 하는 아이를 달랠 방도는 그저 가만히 끌어안고 젖을 물리는 방법밖에 없었다는 어미의 심정이 어땠을까. 

수필가 김영옥의 글에 나오는 대목이다. 


그녀는 내 여고 동창이다. 우리는 여고 시절 문예반에서 함께 활동하며 교내 백일장에서 장원과 차상을 번갈아 가며 하던 문학소녀였었다. 

졸업 후 각자의 삶에 열중하느라 30여 년이나 만나지 못하다가 어느 날 다른 친구의 아들 결혼식장에서 우연히 다시 만났다. 


나는 당연히 그녀도 문인이 되어있을 줄 알았다. 

뜻밖에 그녀는 모든 꿈을 접고 '좋은 엄마'가 되는 길을 선택했노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그때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한 아이를 꽃피우기 위해 그녀가 했을 그 처절하고 지난한 어미의 역할을….


나는 친구의 재능이 너무 안타까워 적극 문학의 길로 이끌었다. 극구 사양하는 친구를 삼고초려의 마음으로 수년간 설득해 드디어 지난봄 등단했고, 그 작품이 '철들기'이다.     


 늦게 자란 이 꽃은 열심히 피어 이제 제 맡은 분야를 톡톡히 해내는 사회의 일원이 되었다./제때 피지 못해 저희들은 또 얼마나 힘든 시간을 견뎠으리./장미가 아니어도무궁화가 아니어도 늦게라도 열심히 제 몫을 다하는 저 꽃들이 내게는 무한히 소중하고 자랑스럽다.”     


그녀는 문인으로는 늦게 피었지만, 엄마로서는 활짝 핀 꽃이었다. 자신의 꿈을 접고 ‘좋은 엄마’의 꿈을 유감없이 이룬 친구를 나는 존경한다. 이제 그녀가 글 밭에서도 유감없이 꽃을 피우리라는 것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래서 지켜보며 설레고 있다.     


짐작일 뿐인데 사실이라고 우기는 것들은 또 얼마나 많을지.”     


한혜경의 글은 나를 돌아보게 한다. 먼저 걸었다고 겅중거린 것은 없는지, 웃자라 교만한 마음은 없는지…. ‘시간의 걸음’을 멈추고, 함께 걷는 친구들을 기다려야겠다. 

어딘가에서 풀꽃 향기가 솔솔 바람에 실려 온다.



*** 데일리한국 <이명지 수필가의 나를 사로잡은 문장> 2024. 6. 15 게재 

https://daily.hankooki.com/news/articleView.html?idxno=1095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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