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명지 수필가의 나를 사로잡은 문장>
"숨은 꽃"에 대한 글을 소개합니다.
<이명지 수필가의 나를 사로잡은 문장>에 수록되었습니다.
“이게 웬일인가. 지난주 죽었다고 생각했던 나무에 진분홍빛 꽃들이 피어나 있지 않은가. 죽은 게 아니었어!!! 저절로 탄성이 나왔다.
그땐 꽃이 피기 전이었던 거야!”
ㅡ 한혜경 에세이 ‘숨은 꽃’ 중에서/<시간의 걸음> 수록/글터 刊
나는 기다리는 걸, 기다려주는 걸 잘하지 못한다.
지레짐작하고 단정 짓고 돌아서기 일쑤다. 발걸음도 빨라 누구와 나란히 걷는 것도 잘하지 못한다.
같이 걸었는가 싶은데 내 생각에 빠져 걷다 보면 어느새 저만치 떨어져 걷고 있는 동행들을 보며 미안한 마음이 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사람의 감정에도 속도가 있다.
어떤 사람은 즉각 나타나고 어떤 이는 아주 천천히 드러난다. 천천히 피는 꽃도 있고, 반짝 피었다 금세 시드는 꽃도 있다.
기다릴 줄 아는 것도 인품이 아닐까 싶다. 끝내 안 피는 꽃은 없다. 그건 꽃이 아니라 잎일 뿐.
“계절에 맞춰, 피어날 시간에 맞춰 필 뿐인데, 잘 모르는 인간이 미리 와서는 죽었네, 꽃이 안 피네, 지레짐작하는 일들은 얼마나 많을까.”
한혜경의 글을 읽으며 또 한 사람의 글이 생각났다.
“여섯 살이 되어서야 말을 시작한 아이는 모든 것이 다 느렸다. 걸음마도 18개월에 겨우 시작했고, 또래들은 온갖 말을 재잘거릴 때도 입술을 꼭 다문 아이가 애간장을 녹였다.”
두 돌이 지나도 말을 하지 못하고 힘들면 울기만 하는 아이를 달랠 방도는 그저 가만히 끌어안고 젖을 물리는 방법밖에 없었다는 어미의 심정이 어땠을까.
수필가 김영옥의 글에 나오는 대목이다.
그녀는 내 여고 동창이다. 우리는 여고 시절 문예반에서 함께 활동하며 교내 백일장에서 장원과 차상을 번갈아 가며 하던 문학소녀였었다.
졸업 후 각자의 삶에 열중하느라 30여 년이나 만나지 못하다가 어느 날 다른 친구의 아들 결혼식장에서 우연히 다시 만났다.
나는 당연히 그녀도 문인이 되어있을 줄 알았다.
뜻밖에 그녀는 모든 꿈을 접고 '좋은 엄마'가 되는 길을 선택했노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그때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한 아이를 꽃피우기 위해 그녀가 했을 그 처절하고 지난한 어미의 역할을….
나는 친구의 재능이 너무 안타까워 적극 문학의 길로 이끌었다. 극구 사양하는 친구를 삼고초려의 마음으로 수년간 설득해 드디어 지난봄 등단했고, 그 작품이 '철들기'이다.
“늦게 자란 이 꽃은 열심히 피어 이제 제 맡은 분야를 톡톡히 해내는 사회의 일원이 되었다./제때 피지 못해 저희들은 또 얼마나 힘든 시간을 견뎠으리./장미가 아니어도, 무궁화가 아니어도 늦게라도 열심히 제 몫을 다하는 저 꽃들이 내게는 무한히 소중하고 자랑스럽다.”
그녀는 문인으로는 늦게 피었지만, 엄마로서는 활짝 핀 꽃이었다. 자신의 꿈을 접고 ‘좋은 엄마’의 꿈을 유감없이 이룬 친구를 나는 존경한다. 이제 그녀가 글 밭에서도 유감없이 꽃을 피우리라는 것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래서 지켜보며 설레고 있다.
“짐작일 뿐인데 사실이라고 우기는 것들은 또 얼마나 많을지….”
한혜경의 글은 나를 돌아보게 한다. 먼저 걸었다고 겅중거린 것은 없는지, 웃자라 교만한 마음은 없는지…. ‘시간의 걸음’을 멈추고, 함께 걷는 친구들을 기다려야겠다.
어딘가에서 풀꽃 향기가 솔솔 바람에 실려 온다.
https://daily.hankooki.com/news/articleView.html?idxno=1095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