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학군의 유령

5화 : 엘리트 속 불량품

by 현영강

대구 수성구.


사람들은 그곳을 '지방의 대치동'이라 불렀다.
그 한복판에 있는 경동초, 경신중, 경신고. 남들은 명문이라 부르는 그 루트가 나에게는 거대한 수용소였다.


나는 그 화려한 엘리트 공장의 명백한 '불량품'이었다. 친구들이 '수학의 정석'을 풀며 의대를 꿈꿀 때, 나는 부서진 가정의 파편을 밟지 않으려 까치발을 들어야 했다.


부모님의 별거.


냉기만 흐르는 집구석이 싫어 학교에 갔지만, 학교라고 다를 건 없었다. 교실 안의 열기는 뜨거웠으나 나는 늘 추웠다. 나는 철저한 외톨이였다. 성적표는 바닥을 기었고, 선생들의 시선은 나를 투명 인간 취급했다.

쉬는 시간이면 엎드려 자는 척을 했다.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귀를 찔렀지만, 나는 그 소음에 섞이지 못한 채 섬처럼 떠다녔다. 가난과 불화는 나를 조숙하게 만들었고, 조숙함은 나를 고립시켰다.


그리고, 고등학교 3학년.


다들 입시라는 결승선을 향해 마지막 스퍼트를 올리던 그해. 나는 뜬금없이 펜을 잡았다. 대학을 가겠다는 야망이 아니었다. 이대로 아무것도 아닌 채로 끝나는 게, 내 인생이 너무 하찮게 느껴져서 낸 오기였다. 하지만 영어 단어는 외계어 같았고, 수학 공식은 암호 같았다. 기초가 없으니 모래성을 쌓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유일하게 나를 거부하지 않는 과목이 있었다.


국어.


특히 문학 지문들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시인들의 탄식, 소설 속 인물들의 비명. 윤동주의 부끄러움이 내 부끄러움과 같았고, 이상의 난해한 독백이 나의 불안과 닮아 있었다. 남들은 밑줄을 긋고 '주제'와 '소재'를 분석할 때, 나는 그냥 그 문장들을 삼켰다. 그건 공부가 아니었다. 외로운 놈이 더 외로운 놈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종의 '위로'였다. 모의고사 성적표가 나오던 날. 수학 3등급, 영어 4등급. 빨간 비가 내리는 성적표에 기이한 숫자가 찍혀 있었다.


1등급.


친구들은 의아해했다. 하지만 나는 알았다. 이건 내가 똑똑해서가 아니라는 것을. 그저 내가 '아픈 놈'이라서, 글 속에 숨겨진 '아픔'을 본능적으로 찾아냈을 뿐이라는 것을. 교감신경이 고장 난 내 몸은, 타인의 감각을 읽어내는 데에는 기형적으로 예민했던 것이다.


그 1등급이 대학 간판을 바꿔 주진 못했다. 하지만 나에게 아주 위험한 확신을 심어주었다.


"아, 나는 평생 읽고 쓰는 형벌을 받을 팔자구나."


경신고등학교 교정의 붉은 벽돌. 그 사이에서 유령처럼 떠돌던 나는, 결국 국어라는 밧줄 하나를 잡고 여기까지 왔다. 그때 교과서 귀퉁이에 끄적였던 낙서들이, 지금 내가 쓰는 소설의 첫 문장이었음을. 그 시절의 나는 알지 못했다. 나는 여전히 수학 계산에는 서툴다. 내 인생의 손익분기점도 아직 맞추지 못했다.


하지만 문장 속 행간을 읽어내는 일만큼은 자신 있다. 그건 내가 8학군의 화려한 조명 뒤편, 가장 어두운 그림자 속에 웅크려 있어 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슬픈 초능력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