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 신화의 그림자 속에서 나의 얕은 문장을 벼리다
반지의 제왕...
내게 숫자는 이미 그 힘을 잃었다. '백 번'이라는 횟수는 그저 측정 가능한 최소한의 물리적 단위일 뿐, 내가 그 세계에 발을 들인 실제 횟수는 기억의 저편으로 풍화되어 가루가 된 지 오래다.
방 안의 모든 불을 끄고,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도록 암막 커튼을 친다. 완벽한 어둠이 내려앉으면, 나는 경건한 중독자처럼 제단 앞에 앉아 재생 버튼을 누른다. 칠흑 같은 화면 위로 갈라드리엘의 고어(古語)가 주술처럼, 혹은 저주처럼 흐른다.
"세상은 변했다(I amar prestar aen)…" 그 순간, 나는 21세기의 비좁고 초라한 방구석에서 증발한다. 아득한 신화의 시공간, '가운데땅(Middle-earth)'의 먼지 섞인 바람 속으로 내동댕이쳐진다.
나에게 이 영상은 킬링타임용 오락 따위가 아니다. 그것은 내 메마른 영감의 우물에 강제로 수액을 주입하는 거대한 링거이자, 나태해진 정신을 몽둥이로 후려치는 가장 폭력적인 각성제다. 왜 하필 이 긴 이야기인가. 대사를 통째로 외우고, 장면 단위를 프레임별로 해체해 기억하는 이 12시간의 대장정을, 나는 왜 기어이 또 반복하는가.
이것은 단순한 선과 악의 영웅담이 아니다. '이야기라는 괴물'이 어떻게 탄생하고, 어떻게 인간을 집어삼키며, 마침내 어떻게 불멸이 되는가를 보여주는 가장 완벽하고도 끔찍한 해부도(解剖圖)이기 때문이다.
나는 화면 속에서 화려한 CG나 웅장한 전투를 보지 않는다. 그 이면에 도사린, 톨킨이라는 한 인간이 언어의 뼈와 살을 깎아 축조해 낸 저 압도적인 세계관의 중력(重力)을 본다. 엘프어의 문법 하나, 호빗 마을의 족보 하나에 스며든 그 편집증적인 창조의 집념.
신(神)의 영역을 넘본 한 작가의 오만하고도 위대한 노역 앞에서, 나는 언제나 기분 좋게, 그리고 처참하게 압사당한다. 그 철저한 패배감. 내 문장이 얼마나 가볍고 얄팍한지 확인하는 그 자해적인 과정이야말로, 나를 다시 책상 앞으로 질질 끌고 가는 가장 강력한 동력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절대반지',
그 작고 황홀한 금속 조각.
소설을 쓰는 나에게 그 반지는 단순한 마법 아이템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창작자가 평생을 짊어지고 가야 할 '치명적인 영감의 은유'다. 작가는 누구나 자신만의 반지를 발견한다. 그것은 너무나 매혹적이어서, 한번 손에 쥐면 결코 놓고 싶지 않다.
"나의 보물(My precious)"이라고 속삭이며 축축한 동굴 속에서 홀로 그 아이디어를 어루만진다. 하지만 그 반지는 주인의 정신을 갉아먹고, 육체를 말려 죽이며, 영혼을 피폐하게 만든다.
화면 속에서 반지의 무게에 짓눌려 신음하는 프로도를 본다. 그의 목에 걸린 쇠사슬이 실은 내 목을 조여오고 있음을 느낀다.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이 지난한 소설이, 마감이라는 운명의 산(Mount Doom)까지 기어이 끌고 가서 던져버려야 할, 그러나 던져버리기엔 너무나 사랑스러운 나의 짐처럼 느껴진다.
동시에 나는 골룸을 본다. 영감에 집착하여 비틀리고 추악해진, 그러나 그 누구보다 순수하게 이야기를 갈망하는 나의 어두운 자화상을 본다. 나는 프로도보다 골룸에게 더 깊은 동질감을 느낀다. 반지를 파괴해야 하는 자가 아니라, 반지를 소유하고 싶어 안달 난 자. 그게 바로 글쟁이의 본질이니까.
로한의 기마대가 펠렌노르 평원을 향해 돌격하며 "죽음(Death)!"을 외치는 순간, 내 심장은 어김없이 찢어질 듯 뛴다. 그것은 승리를 위한 함성이 아니다. 절망적인 현실 앞에서 결코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향해 펜촉을 겨누고 달려 나가는, 모든 글쟁이들의 비장한 유언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죽을 것을 알면서도 돌격해야 하는 순간이, 우리에게는 매일 밤 찾아오니까.
12시간의 순례가 끝났다. 하워드 쇼어의 장엄한 음악이 잦아들고, 엔딩 크레딧이 오른다. 이내 화면이 꺼진다. 완벽한 정적. 그리고 검은 모니터 화면 위에 내 얼굴이 비친다.
충혈된 눈, 퀭한 볼, 헝클어진 머리칼. 거기엔 반지를 잃어버릴까 전전긍긍하는 골룸 한 마리가 웅크리고 있다. 영화 속 프로도는 반지를 파괴하고 구원받았지만, 현실의 나는 아니다. 내 손가락에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반지가 끼워져 있다. 그 반지는 뜨겁게 달아올라 내 살점을 태우고, 내 뇌를 태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빛이 드는 밖으로 나가지도 않는다. 그저 검은 화면 속에 비친 나와 눈을 맞춘다. 이것은 치유가 아니다. 더 깊은 중독으로의 침잠이다.
나는 다시 리모컨을 집어 든다. 끝을 보았으니, 다시 시작해야 한다. 이 지독한 굴레를 벗어나는 방법은, 그 굴레를 더 강하게 조이는 것뿐이므로.
"나의 보물..."
나는 다시, 그 끔찍하고도 아름다운 지옥의 1분을 재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