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스방 Jun 09. 2024

직장 울타리 밖 유쾌한 삶의 전환

편치 않은 마음의 아내와 유럽여행을 떠나기 전에 여행 정보를 얻기 위해 인터넷에 들어가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50+인생학교’ 입학생 모집공고를 보았다. 

‘인생학교’라는 직설적인 표현에 호기심에 입학지원서를 쓰고 여행을 떠났다. 

유럽을 여행하는 동안 아내는 여행의 즐거움보다 앞으로의 삶에 대한 걱정이 마음속 깊이 웅크리고 있는 듯해 보였다. 


아내의 불안한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억울하고 처절한 퇴직의 아픔에서 벗어나 세상을 향해 용기 있게 걸어가는 나의 모습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행을 다녀오자마자 ‘50+인생학교’ 입학식에 참석했다.     

입학식 오리엔테이션에는 나와 비슷한 또래이거나 좀 더 많거나 적은듯한 중년의 남녀 오십여 명이 조금은 어색한 모습으로 모여 있었다.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서 사회자가 말을 꺼냈다.


“자리에서 일어나 눈을 감고 동쪽이 어디인지 가리켜 보세요”

그러자 모두 자기가 생각하는 방향으로 손가락을 가리켰다. 

그러고는 자신이 가리키는 손가락의 방향과 다른 사람들이 서로 다름을 확인하고는 모두가 한바탕 웃어댔다.

가리키는 손가락의 방향이 서로 달랐듯이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지금까지 서로 다른 인생을 살아왔음을 인정하고 새로운 인생 항로를 만들어 가자는 메시지를 던져주었다.    


‘50+인생학교’는 서울에 사는 50세 이상 60대 후반까지의 중년층을 대상으로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50 플러스재단의 대표적인 커리큘럼이다. 

입학식 오리엔테이션에 함께한 선배들의 경험담을 들으니 ‘50+인생학교’를 통해 인생의 후반에서 자신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도전을 위한 용기와 때로는 삶의 방향을 전환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고 했다.     

‘인생학교’라는 낯선 모임에서 처음 만남의 어색함을 기대감으로 불어넣으려는지 마음 열기와 마음먹기 워크숍이 진행되었다. 


대여섯 명씩 팀을 나누어 서로를 소개하면서 그동안 살아왔던 서로의 경험을 나누고 서로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보니 긴장도 풀리고 마치 오랫동안 서로를 알아 왔던 사이처럼 친숙함이 느껴졌다. 

이렇게 넉 달 동안 다양한 분야에서 일해왔던 사람들과 섞여서 생각을 나누었다.

그동안 넘을 수 없는 울타리로만 여겼던 지난 30여 년의 직장 생활에서 느끼지 못했던 넓은 세상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의 일상은 마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것처럼 희망과 용기를 벗 삼아 차근차근 내일을 설계해 나갔다.  ‘인생학교’를 수료하고도 동기생들과 커뮤니티를 만들어서 꾸준히 활동하면서 엇비슷한 삶의 여정을 함께 만들어갔다.

또한 나와 같은 또래의 아내와 50 플러스 캠퍼스에서 운영하는 생활 문화 강좌를 함께 수강하면서 새삼스럽게 대학시절 캠퍼스 커플의 낭만을 느끼며 삶에 신선함을 더해갔다.      


어느 날 인가는 아내와 함께 강의를 듣고 대학 캠퍼스 커플을 흉내 내듯이 팔짱을 끼고 길을 걷다가 영화관 앞에 멈춰서 영화 ‘인턴’을 홍보하는 포스터를 보게 되었다. 

중년을 넘어선 나이가 지긋한 정장의 노신사와 젊은 여성이 함께 포스터 밖으로 씩씩하게 걸어 나오는 듯한 모습으로 ‘경험 많은 70세 인턴’과 ‘열정 많은 30세 CEO’라는 타이틀을 앞세우고 있었다. 

아내와 나는 인턴과 CEO 타이틀이 거꾸로 되었나 하는 궁금증에 휩싸여 영화관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흥미롭게도 영화는 아내와 나의 호기심을 단번에 깨고 영화이기에 가능한 이야기로 전개되었다. 

인생 경험이 많은 노신사가 인턴이고 젊은 여성은 경험은 적지만 열정이 넘치는 벤처기업의 CEO였다. 

영화는 세대 간의 갈등을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이어지더니 마침내 인턴인 노신사의 경험과 젊은 여성 CEO의 열정이 합쳐져 성공적인 기업으로 성장하는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50 플러스 캠퍼스에서 스쳤던 중년들의 모습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러다가 얼마 전에 캠퍼스에 공지된 서울시 50 플러스 보람 일자리 학습지원단 모더레이터 모집공고가 떠올랐다. 보람 일자리 사업이라 급여라기보다는 활동비로 50만 원 정도 받을 수 있었는데 보수보다는 일자리를 얻는다는 것과 다양한 경험을 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이 컸다.      

지원자격을 확인하고 고민할 것 없이 지원서류를 접수하고 경쟁률을 보았다. 

나 같은 생각으로 지원한 사람들이 꽤 많았던지 1차 서류심사 2차 면접 심사에서 최종합격을 통보받기 전까지 긴장해야 했다. 


학습지원단 모더레이터는 50 플러스 캠퍼스의 교육 프로그램 운영을 돕기 위해 강사와 교육생 그리고 캠퍼스 관계자들 간에 소통과 협력을 도모하고 교육과정을 평가하는 모니터링을 통해 교육과정을 개선하는 일이 주된 업무였다.   

일주일간의 모더레이터 입문교육을 받고 강좌별로 업무가 시작되었다. 

비록 임시 일자리이지만 마치 직장에 취업이나 한 듯 하루를 규칙적으로 살아갈 핑곗거리를 가지게 되었다.

모더레이터 활동을 하면서 우리 사회 곳곳에서 다양한 능력으로 자기 분야에서 승승장구했던 삶들을 만났다. 


그들 중에는 한 길로만 걸어가다가 직장에서 50세 초중반에 내쳐져서 남은 생애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캠퍼스를 찾은 사람들도 꽤 있었다. 

나와 비슷한 또래의 조기 퇴직자들의 애환을 듣고는 동병상련의 마음을 나누기에 충분했다.    

베이비부머로 일컬었던 우리 세대는 전쟁의 상흔을 딛고 경제성장의 틈바구니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면서 가난을 이겨내고 산업화의 역군으로 청장년 시대를 보냈다. 


어쩌면 요즈음 젊은 세대가 겪고 있는 취업난과 경제적인 어려움과는 달리 그 시절에는 나라의 경제성장이 가속화되면서 주어진 기회로 노력한 만큼의 대가를 받았다. 

그러나 90년대 후반에 들어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경제성장이 정체되고 기업들이 구조조정으로 몸집을 줄여나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는 직장에서 정년을 채우지 못하고 조기 퇴직을 해야만 했다. 


그 시절을 살아왔던 베이비 부머들이 새로운 활로를 찾아 서울시 50 플러스 캠퍼스를 통해서 새로운 인생의 이모작을 만들어 가고 있었고 나 또한 그 대열에 함께 서서 하루하루를 새롭게 만들어 가고 있었다. 

50 플러스 캠퍼스에 2학기가 되면서 학습지원단 나는 모더레이터 대표를 맡게 되었다. 

대표라고 특별한 혜택은 없었지만 짊어진 책임과 봉사활동만큼 더 많은 경험을 할 수 있었다.      


50 플러스 캠퍼스에서는 영화 ‘인턴’처럼 젊은 세대와 중장년 세대 간에 협력으로 기업을 성장시키고자 하는 노력도 시도되었다. 

세대 간에 서로의 협력이 잘 되어서 기업 성장의 돌파구를 찾는 경우도 있었지만 세대 간에 공감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중장년 세대는 경험을 바탕으로 지혜를 갖고 열정에 찬 젊은 세대와 소통을 하다가도 중장년 세대의 경험이 젊은 세대의 아이디어를 가로막는 경우도 있었다.      


소위 ‘꼰대 와 철부지’라고 서로 부르며 대립하기도 했다. 

꼰대들은 지나온 삶의 경험을 바탕으로 젊은이들의 생각을 느긋하게 기다려주는 마음의 여유가 필요했다.

또한 젊은이들은 중장년 세대의 경험에서 온 지혜를 존중하는 열린 마음이 필요했다. 

이와 같은 생각으로 꼰대들과 젊은이들이 함께 서로의 마음이 잘 어우러지면 세대공감의 성공적인 사례들이 많이 나올 것 같았다.   


이렇게 내가 사는 동네에 마을계획단 활동으로 지역사회를 자세히 알아가고 50 플러스 캠퍼스 모더레이터 활동을 통해서 사회 각 분야에서 활약했던 다양한 사람을 만나다 보니 일상에서의 기쁨을 새록새록 느낄 수 있었다. 

그러던 중에 캠퍼스 게시판에서 구청에서 주민들을 위한 마을축제를 준비하면서 마을공동체 문화에 관심 있는 주민을 대상으로 축제 준비추진위원을 모집하는 공고를 보게 되었다.   


해마다 축제를 건성건성 둘러보면서 축제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수고가 많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마침 시간적인 여유가 생겼으니 지역축제를 몸소 체험하고 싶었다. 

지원서를 내고 추진위원으로 선정되어 축제 추진위원 회의에 참석했다.

주민으로 구성된 추진위원회는 축제의 추진 방향을 설정하고 축제를 주관하면서 결과 평가에 이르기까지 전반적인 일을 진행했다.      


추진위원회 워크숍을 통해 '자연을 품고, 사람을 품고, 꿈을 품고'라는 축제 슬로건을 정하고 분야별로 일을 나누었다. 

사흘에 걸친 축제는 개막제를 시작으로 광장축제와 생활문화예술 동아리 공연과 폐막제로 구성되었는데 나는 폐막식에 주민 100여 명이 참여하는 대합창 프로그램을 맡게 되었다. 

참여와 화합의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청소년에서 중장년에 이르는 100여 명의 합창단원을 모집해서 연습하고 폐막식 때 무대에 올리기까지 합창단의 뒤치다꺼리를 담당해야 했다.     


그동안은 남의 일로만 여기 던 마을축제였었다. 

준비위원회 활동으로 다양한 사람들과 만남을 통해 그 누군가의 희생과 봉사로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다는 소중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이런 경험을 통해 한동안 직장에서 쫓겨 나와서 상심하며 잠 못 이루던 때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기쁜 감정을 갖게 해 주었다. 

어쩌면 지치면 한 박자 쉬고 힘들면 두 박자 쉬고 가라는 노랫말처럼 틀에 박힌 직장 생활의 굴레에서 벗어나 세상을 넓게 펴서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 같기도 했다.     


요즈음 건강 100세 시대를 맞이하여 새로운 삶을 개척하기 위해 인생 후반에 쌓는 경력을 뜻하는 ‘앙코르 커리어(Encore Career)’에 관심이 높다.

나 역시 직장에서 쫓겨 나와 새로운 경력을 쌓듯이 봉사활동을 통해 마을공동체를 경험하고 보람 일자리를 통해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을 만났다. 

나의 작은 수고로 주변 사람들을 기쁘고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을 알게 되면서 비로소 나는 유쾌한 삶의 전환을 시작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핑계 낌에 아내와 함께 유럽으로 날아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