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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팬지 Aug 04. 2024

ㅇ억 받기 전에 영수증부터 써달라구요?

오늘은 우리집 전세계약이 있는 날.


강북에 위치한 우리집에서 자그마치 집값의 1/2에 달하는 전세금을 빼낼 예정이다. 종자돈도 없이 작은 실거주 집을 사고 싶어하는 나를 위해 월세를 주장하던 남편이 백번 양보하여 풀전세 놓기로 한 것이다.  


요즘 전세값이 올랐다고는 하지만, 우리집 주변은 지지부진하다. 아마도 요즘 대세인 '신축'이 별로 없는 구축 동네이기 때문이겠지. 그 와중에 이 정도 전세값을 받고 계약을 하게 된 것은 정말 행운이었다.


진짜 내 수중에 ㅇ억 목돈이 생기는거야?


믿기지 않았다. 마침 얼마전 집보러간 모 지역 부동산 사장님께 전화가 왔다.


사장님, 저 지금은 집값이 단기간내 너무 많이 올라서 살 때가 아닌거 같구요. 목돈 들고 기다리고 있을테니, 집값 안정되고 좋은 매물 나오면 바로 연락주세요.




주말 오후, 부동산에 도착하니 우리측 사장님과 임차인측 사장님이 각자 분주하게 계약서류 작업을 하고 있었다.


남편 시켜 홈택스에서 출력한 국세/지방세 납세증명서를 우리측 사장님께 내밀었다. 요즘은 전세사기 등 여파로 부동산 계약할 때 제출할 서류도, 포함시켜야 할 문구도 많다고 한다.


잠시후 마스크를 하고 모자를 쓴 중년 남성이 들어왔다. 임차인의 아들이라고 하며 임차인의 신분증을 내밀었다. 그런데....


임차인이 자그마치 1930년대생.


헐, 90대 할머니 혼자서 30평 아파트 쓰시는거야?

돈이 많으신가 보네.


(임차인) 제가 바로 옆라인에 살아요.

어머니 옆으로 모셔와서 돌봐드리려구요.


와, 효자 아들이네...아들이 돌봐드리려고 옆 라인으로 모셔오다니...좋으시겠다. 바로 옆라인 사시는 이웃주민이라고 하니 반갑고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나) 그런데 어머님 연세가 저희 부모님보다 더 많으시네요.

(임차인측 부동산) 제가 뵈었는데 아직 정정하세요. 강북 40평대 아파트 살고 계시다가, 아들 옆으로 오신다고 그집 전세놓고 여기로 전세 오는거예요.



그런데 90대이시면...우리집에서 안좋은 일이라도 생기시면 어쩌지? 임차인 연세 많으시다고 뭐라고 하기도 그렇고 (나도 곧 늙을텐데..ㅠㅠ)


남편을 힐끗 보니 아무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역시...괜찮겠지?


나와 남편은 부동산 사장님의 안내에 따라 계약서에 서명을 하기 시작했다. 서명할 페이지가 너무 많아 부동산 사장님이 옆에서 열심히 페이지를 넘겨주셨다.




(임차인측 부동산) 가계약금 이미 보내드렸죠?

(나) 네네..임차인분 명의로 송금 받았어요.

(임차인측 부동산) 오늘 나머지 계약금 다 드릴 거니까 여기 계약금 수령증에 먼저 싸인하시고...

(나) 네네.

(임차인측 부동산) 잔금 ㅇ억(전세금 90%)은 9월에 드릴 건데, 그 때 다시 부동산 나오기 번거로우시니까 지금 잔금 수령증에 먼저 싸인을 해놓으시면, 부동산에서 잘 보관하고 있다가 임차인 드릴게요.


엥? ㅇ억을 받지도 않았는데 수령증에 싸인을 하라고? 원래 부동산 계약은 이렇게 하는건가? 부동산 다시 나오는거 별로 번거롭지도 않은데...그렇다고 안한다고 하면 부동산 믿지 못한다는 말이니 기분 나빠할텐데...


나는 마지못해 싸인을 했다.

그렇지만 남편은 거부를 했다.


(남편) 제가 9월에 다시 나올게요.


휴...다행.

제동을 걸어준 남편이 고마웠다.


그럼 그렇지, 받지도 않은 거금의 수령증에 왜 싸인을 해! 오늘 처음 본 부동산을 어떻게 믿고.




이제 임차인의 아들이 계약금의 잔액만 더 부치면, 전세 계약 절차가 마무리 된다. 모바일로 송금을 하려던 임차인 아들은, 송금이 잘 안된다면서 잠시 집에 돌아가 OTP를 가져오겠다고 했다.


(나) 네, 다녀오세요.


임차인 아들이 나가자마자, 남편이 기다렸다는 듯 부동산 사장님께 말했다.


(남편) 그런데, 저 분이 임차인 아들임을 입증하는 자료를 주셔야죠, 신분증과 가족관계증명서도 안보여주시면 어떻게 합니까.


그리고 사장님은 왜 받지도 않은 돈을 수령했다고 싸인하라고 하세요?


(임차인측 부동산) 아...그건...두번 나오기 번거로우시니까 편의상 그렇게 하려고 했던 거죠. 가족관계증명서는 아드님 돌아오시면 바로 여기에서 발급받아 보여드리도록 할게요.


(남편) 그리고 임차인이 이렇게 고령자이신걸 왜 이제야 알려주세요? 혹시라도 안좋은일 생기고 유산 분쟁이라도 생기면 저희가 거기에 휘말리게 되는데요. 아드님이랑 계약하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지금 임차인과 계약을 하게 되면 저희가 너무 골치아파질것 같습니다. 부동산 측에서도 사전 고지를 안해주신 과오가 있으니, 지금이라도 아드님과의 계약으로 변경해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진행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임차인측 부동산) 아드님과의 계약으로 하게 되면 또 증여 문제가 있어서요..


남편은 부동산에 강하게 항의를 했고, 잠시 우리 부부가 자리를 비우는 동안 아직 계약금 잔액을 송금하지 않은 임차인 측에 이러한 우려를 전하고 계약자 변경을 요청해달라고 말했다.




(부동산) 사모님, 어서 부동산으로 돌아오세요. 임차인이 그냥 가계약금 돌려받고 다른 데 구하신다고...


인근 커피숍에 있던 우리 부부는 얼른 부동산으로 가서 가계약금 돌려주고 전세계약을 없던 것으로 할 수 있었다.


(남편) 당신 그 돈 빼서 집샀다가, 유산분쟁 휘말려서 전세금 돌려주지도 못하고 다른 세입자 들이지도못하면…어떻게 되는줄 알아? 큰일 나는거야.

(나) 나는 생각지도 못했네. 그런거 어떻게 알았어?

(남편) 바로 검색해봤지.


남편 말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나는 그저 임차인이 너무 고령이셔서 우리집에서 안좋은 일이라도 생기시면 어쩌지 걱정할 뿐이었는데...전세금으로 인해 유산분쟁에 휘말릴 위험, 그것이 나의 부동산 매매에 미칠 영향까지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나) 그나저나 다른 임차인을 어떻게 구하지? 이제 시간도 얼마 안남았는데...

(남편) 그냥 월세로 계약하자. 전세는 무리야.

(나) 그럴까?ㅠㅠ


간이 콩알만해진 우리 부부는 집을 월세로 내놓기로 했다. 그제서야 마음에 안정이 찾아왔다.


앞으로 2년 동안 열심히 종자돈이나 모아야겠다.

전세금 빼서 실거주 집사려고 해도, 자고 일어나면 집값이 천정부지로 오르는데 어떻게 하냔 말이다.


무슨 1930년대 하이퍼인플레이션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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