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도 두번쯤 있었네, 종자돈 만질 뻔한 기회가
재테크 책을 읽으며 얻은 가장 큰 깨달음은, '돈'이라고 다 같은 '돈'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같은 액면 금액이라도 그 돈이 품은 '시간'(이자)와 '가능성'(기회비용)을 생각해보면 전혀 다른 돈임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노동을 통해 번 돈과 주식투자로 번 돈 정기적인 돈과 비정기적인 돈, 목돈과 쪼개진 돈, 느긋한 돈과 급한 돈, 20대의 돈과 40대의 돈은 다르다.
이 중에서도 목돈은, 꽤 오랜 시간을 들여 형성된 것이고 다양한 투자 가능성을 만들어낼 수 있는 '종자돈'이다. 나도 살면서 목돈을 만질 기회가 두 번 있었다. 여태까지 한번도 없었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아침 출근길에 우연히 생각이 났다. 아, 나에게도 두번쯤 있었네, 종자돈 만질 뻔한 기회가...
1. 첫직장 퇴직금 1천만원
SKY 대학을 졸업하고 ㅇㅇ시험공부를 했다. 두어번의 실패 후 백수로 지내던 어느 날(간단히 표현했지만...쉽지 않은 날들이었다), 우연히 엄마랑 차를 타고 지나가다가 멋진 건물을 보게되었다. 무슨 회사인지는 몰랐다. 엄마는 아는 듯 했다.
엄마, 나 저 회사 들어가면 어때? 저기 좋아?
아이구, 완전 좋지. 저기 들어가기만 하면.......
엄마는 엄지 손가락을 높이 쳐들고 있었다. '좋다'는 말보다 몇배 더 강력한 뜻이 담겨있었다. 아, 저 회사에 들어가고 싶다...저 회사 들어가서 엄마를 기쁘게 해드릴 수 있다면 여한이 없을 것 같았다. 몇년간의 시험 준비로 나 못지않게 고생을 하신 엄마였다.
그 해 연말, 자포자기 심정으로 그 회사에 지원을 했는데, 거짓말처럼 합격을 했다. 시험공부가 헛된 것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감사합니다...너무 감사합니다...(울먹)
인사팀 직원의 합격 통보 전화를 받고, 감격에 겨워 수화기에 대고 연신 고개를 꾸벅이며 인사했다. 살다보니 이런 행운이 다 생기는구나. 내가 속할 곳이 있다고? 나를 받아주는 곳이 있다고? 믿기지가 않았다. 5-6개 회사에 지원을 했는데 다 떨어지고 여기 한군데만 붙은 것이다. '기적'이라는 말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었다.
그렇게 회사생활을 시작했다. 정말 좋은 회사였다. 일도 재밌고, 사람들도 좋았다. 하루하루가 즐거웠고, 이런 회사의 직원이 되었다는 사실이 꿈만 같았다. (지금 생각해봐도 정말 좋은 회사이다.)
그렇지만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은 모든 것에 적용되는 듯했다. 2년, 3년 지나면서 회사의 좋은 점은 당연해지고, 단점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하는 일이 한심해 보이고, 비전도 없어 보였다. 이러다가 언젠가 이 회사 망할지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부침이 있긴 하지만 절대 망하지 않을 회사인데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마침내, 회사가 지긋지긋해졌다.
결혼하여 아기가 태어났고, 3대 독자 손자가 너무 소중했던 시부보님은 나에게 맞벌이 하기보다는 아이를 키우며 공부를 해보면 어떻겠냐고 권유했다. 옳다구나 냉큼 사직서를 제출했다. 시댁에서 공부를 시켜주신다고 하니, 더 이상 좋을 수 없는 기회였다. 인사팀에서는 퇴사보다는 휴직을 권했으나, 일말의 여지를 남기고 싶지 않아 결연히 퇴사를 했다. 세상을 모르던 시절이었다.
퇴직금으로 1천만원이 나왔다. 주위 사람 중 유일하게 나의 퇴사를 슬퍼하던 엄마가 떠올랐다. ㅇㅇ시험을 떨어졌을 때, 그리고 이 회사에 기적적으로 입사했을 때의 엄마 얼굴도 떠올랐다.
그토록 갖고 싶었고 운좋게 얻은 것인데, 나는 왜 그렇게 쉽게...버렸을까?
자책감과 후회가 밀려왔다.
내 퇴직금은 엄마 드려야겠어.
남편에게 말했다. 생각해보면 경제공동체인 남편한테 미안한 일방적인 행동이었지만, 남편은 반대하지 않았다. 그렇게 나의 퇴직금은 엄마의 위로금이 되었다. 첫 직장에서의 추억만 남긴채 말이다.
...참고로, 시댁은 형편이 어려워져 공부를 지원해주지 못했고, 나는 재취업을 해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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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첫집 인테리어 비용 3천만원
처음 우리 아파트에 실거주하러 들어갈 때였다. 하루는 아버님이 호출을 하셨다.
첫집이니 예쁘게 꾸미고 살고 싶을텐데 , 인테리어 하고 들어가거라.
3천만원이었다. 당시 20평대 아파트를 최고급으로 인테리어하고도 남을 돈이었다.
처음에는 인테리어 조금만 하고, 나머지는 저축해야지 생각했다. 어짜피 평생 살지도 않을 20평대 집, 그냥 싱크대나 갈고 도배장판 해서 들어가라고, 엄마가 조언을 한 것이다. 그런데 인테리어의 신세계에 입문해 매일 가구, 소품, 벽지, 전등 등을 폭풍 검색하다보니 점차 욕심이 커졌다. 주변 지인들도 거실 베란다 트고, 주방 구조 바꿔 인테리어 잘해놓으면 실거주하기에도 좋고 나중에 비싸게 팔수 있다고, 이왕 하는 김에 제대로 잘하라고 부추겼다. 결국 3천만원을 신나게 다 써서 여기저기 공들여 인테리어를 했다. 마치 그 집에 평생 살 것처럼.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약간 외곽이어서 그런지, 거실 테이블에 앉아 창밖의 나무를 바라보노라면(저층이었다) 마치 리조트에 놀러온 기분이었다. 그런데, 한달, 두달 지나고, 처음의 새롭고 좋던 느낌은 점차 익숙하고 지겨운 느낌으로 변했다. 인테리어의 유효기간이 딱 6개월이었던 것이다. 둘째가 태어나면서 외곽의 20평대 집이 답답해진 우리는 중심지의 더 넓은 집으로 전세를 가기 위해 그 집을 내놓았다. 시세보다 2천만원 비싸게 내놓았지만, 부동산 비수기에 인테리어는 제 값을 받지 못했다.
제가 원하는 인테리어 스타일은 아니어서요…
매수자가 얄미웠지만, 시세보다 950만원 더 받고 2년만에 그 집을 팔았다.
그렇게 내 인생 두번째 종자돈은 결국 남 좋은 일 해주는 데 써버렸다. 그 3천만원이 시댁에서 지원해 주시는 처음이자 마지막 종자돈이 될 줄 그 때 알았더라면, 결과가 달랐을까?
그렇게 내 인생에서 종자돈을 만질 뻔한 두 번의 기회를 돌아보니, 유사한 패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원하던 것을 운좋게 얻는다.
처음에는 너무 좋아하다가
시간이 지나며 이내 싫증을 낸다.
언제 갖고 싶어했었냐는 듯 쉽게 버린다.
원하던 것을 잃고, 종자돈도 그 과정에서 사라진다..
운좋게 얻는 것은, 소중함을 잘 모르기에 또 그렇게 쉽게 잃는 게 아닐까... 그렇지만, 인생은 직접 겪으면서 배워가는 것인지, 소중한 것을 경솔하게 잃은 두 번의 경험은 이후 소중한 것을 필사적으로 지키는 힘이 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