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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팬지 Aug 27. 2023

월급 외 첫번째 파이프라인을 만들다

20평 아파트는 2년 전 신혼부부가 올수리해 살던 집이었는데, 35평 집보다 작은 방 2개, 화장실 1개만 모자랄 뿐이지, 거실이나 주방은 짜임새가 더 좋았다. 또 붙박이장, 블라인드 등이 부착되어 있었다. 6개월 동안 여러 집을 봐왔기에 이 집을 보자마자 잡아야겠다, 확신이 들었고 바로 계약금을 부쳤다. 하루만 더 생각해본다고 했다가 놓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월세 수요가 많은 학군지인데다가 고금리로 월세 수요도 많은 상황이었다. 작은 평수로의 이사를 반대하던 남편도 집 상태가 나쁘지 않으니 이사를 못이기는 척 수용했다.


그렇게 해서 35평집 계약 만료 6개월 전에 20평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이사까지 남은 기간은 두달, 매일 퇴근 후에 한 일은 35평 집의 구획을 나누어 물건을 버리는 일이었다. 오늘은 안방 붙박이장, 내일은 작은방 서랍장, 모레는 거실 책장 등등...안쓰는 옷가지와 책은 물론, 하다못해 아이들이 쓰던 자질구레한 학용품과 풀지 않은 문제집까지 중고마켓을 통해 싸게 판매했는데, 의외로 다 팔렸다. 두달 동안 2천원, 3천원, 또는 1만원, 2만원씩 팔아 총 419,000원의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티끌모아 태산이라는 말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이사가면서 사야할 것들도 있었는데, 요즘 물가가 너무 오른지라 새 상품은 살 생각도 않고 중고물품을 알아보고 있었다. 20평 집에 살던 신혼부부는 신혼살림으로 2년 전 장만한 최신 에어컨과 인덕션을 360만원에 넘겨주겠다고 제안해왔다. 청약받은 집으로 들어가는데 풀옵션 집이라 더이상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10년은 쓸거라고 생각했는지 최신 디자인과 성능을 갖춘 고가의 제품이었는데, 정가 대비 40-50%의 할인율이었다. 신혼부부인만큼 깨끗하게 사용했을 터였다.


중고물품 구매를 번거로워하던 남편은 당장 양도받자고 했다. 예전의 나 같으면 당장 양도받았을 테지만, 지금은 돈을 아끼려고 20평으로 줄여가면서, 감가상각이 심한 중고가전을 360만원이나 주고 사는게 맞는지, 영 마음이 안 내켰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저렴한 중고물품 사서 몇년 쓰다가 나중에 우리집 들어갈 때 번듯한 새 제품을 장만하는 편이 나아보였다. 어쨌든 이 일로 남편과 또 한 번 의견 충돌이 생겼고, 남편은 나에게 모든 것을 알아서 하라고 위임하고는 두 손을 들어버렸다.


그 날부로 당근마켓에 <에어컨>, <인덕션>, <건조기> 등 키워드를 알림 설정해두고, 틈틈히 괜찮은 물건이 있는지 검색하기 시작했다. 요리도 잘 못하는데 비싼 인덕션이 필요있을까 싶어, <가스레인지>로 키워드를 교체했다. 한달 정도 들여다봤을까(세상에 뭐하나 쉬운 일은 없었다...), 마침내 좋은 물건들을 저렴한 가격에 구매할 수 있었다.


2017년산 엘지 인버터 1등급 에어컨(스탠드 및 벽걸이) 37만원

2018년산 엘지 인버터 1등급 전기건조기 22만원

2020년산 린나이 생선 그릴 포함 3구 가스레인지 16만원


에어컨 설치비용이 45만원 추가로 들긴 했지만, 어쨌든 총 비용 120만에 필요한 살림을 모두 장만한 것이다. 신혼부부가 제안한 에어컨 및 인덕션 가격의 1/3에 불과한 비용이었다. 이사 당일 이삿짐 차에 부탁해 동네 여기저기서 중고물품을 가져오는데, 이사 도우미 아주머니가 보시고는 중고물품인데도 새 제품 같다며 놀라던 모습이 기억난다.


이렇게 득템한 중고물품들은 지금도 아주 유용하게 잘 쓰고 있다. 여름 내내 틀어놓았지만 전기세 5만원 더 나왔을 뿐인 고효율 인버터 에어컨, 우리 집에서 세탁기와 더불어 가장 열일 하고 있는 전기건조기, 화력이 강하고 불 조절이 쉬워 나같은 요리 초보가 사용하기에는 더없이 편리한 가스레인지 등등.



     

20평으로 이사한지 6개월이 지났다. 우리 가족은 언제 35평 아파트에 살았던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만족하며 잘 살아가고 있다. 화장실이 하나 뿐이어서 불편할 때가 있지만, 또 큰아들이 오는 주말에는 거실 한구석에 놓아둔 싱글매트리스를 꺼내야 하지만, 매월 통장에 꽂히는 130만원의 불로소득(월세 120만원+관리비 절감 10만원)은 이 모든 자질구레한 불편함을 상쇄시켜준다. 단지 금전적인 측면 뿐만 아니라, 여러 장애요소와 불편함을 이겨내고 처음으로 월급 외 파이프라인을 만들어냈다는 사실 자체가 뿌듯했다.


집은 작아졌지만, 희망은 커졌다.


Photo by Nathan Fertig on Unsplash


그동안 집 계약이나 이사 등 큰 일은 전적으로 남편한테 맡겨왔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부동산을 접촉하고 집을 보러다니고 이사를 준비하면서 느낀 바도 많았다.


1.  부동산은 미리미리 보러다녀야 한다.

- 너무 이르다 싶을 정도로 미리 다니는 것이 좋다. 이번에 계약기간이 1년도 넘게 남은 상태에서 이사갈 집을 보러 다닌 덕분에 여유를 가지고 마음에 드는 집을 골라 이사할 수 있었다.

- 급매 등 좋은 물건은 네이버부동산에 매물로 게재되기도 전에, 미리 접촉해둔 부동산을 통해 연락이 왔다. 미리 부동산과 안면을 터놓고, 좋은 물건 나오면 1순위로 연락을 달라고 요청해볼 일이다.


2. 이사도 미리미리 준비해야 한다.

- 그동안 이사를 많이 다녔지만, 이번처럼 오랜기간(2달) 준비해서 이사한 적은 처음이었다. 덕분에 불필요한 물건들을 많이 덜어낼 수 있었고 작은 집에서 미니멀한 라이프를 무사히 시작할 수 있었다.


3. 남편과 의견 충돌 시, 내가 맞다고 확신이 들면 적극적으로 설득해야 한다.

- 그 동안은 남편의 의견을 맹목적으로 따랐다. 남편의 말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거니와, 무엇보다도 내 의견에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종일관 위험을 기피하고, 현재를 희생하여 미래에 대한 투자를 하는 것을 원치 않는 남편의 성격은 자산 폭등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아직도 아쉬운 것이, 단 2억원이면 경희궁자이 20평대를 갭투자로 구매할 수 있었던 2017년 무렵, 해외 나가기 전에 전세끼고 하나 사둘까 나홀로 인근 부동산을 찾아가 매물까지 보고 왔지만 집값 하락을 굳게 믿는 남편의 반대로 결국 사지 못했다. 해외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학군지에 자리잡을 때에도 처음부터 20평대 아파트로 들어가 돈을 아끼자고 말했지만, 우리 나이쯤 되면 30평대에는 살아야 사회적 위신이 선다는 남편의 주장에 못이겨 35평 아파트에 자리를 잡았다. 처음에는 남편이 문제라고 생각했지만, 점차 남편을 설득하지 못한 내 자신이 문제였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번 20평 아파트의 월세 계약과 중고가전 구매, 이사 등 전 과정은, 이제부터 내가 우리 가계의 금융 관련 중요한 결정에서 방관하지 않고 주도권을 잡겠다는 신호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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