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내 인생에 나타난, 몇 안되는 귀인일지 몰라
주말 아침 이모님이 해놓고 가신 반찬으로 집밥 먹으며 행복해하는 세 남자를 볼 때면 이런 생각이 들곤했다. 매주 금요일, 이모님은 우리 네 식구가 주말동안 먹을 요리 두어가지와 각종 반찬, 국을 넉넉히 준비해주셨다. 덕분에 나는 주말 오전 9시쯤 느즈막히 일어나서도, 10시면 세 남자 밥 차려 먹이고 설겆이까지 끝낸 '상황 종료' 상태를 만들 수가 있었다.
이모님이 해주신 음식은 정말 신기하게도, 불고기, 장조림, 건새우볶음, 콩나물 등 어떤 음식을 떠올렸을 때 기대하는, 바로 그 맛이었다. 반찬가게나 음식점에서 만나게 되는, 한치의 오차도 없는 레시피 그대로의 맛!
이모님은 그동안 인스턴트 음식에 길들여져있던 아이들에게 나물, 김치 등 재래식 음식을 자주 만들어주셨고, 가끔은 특식으로 잔치국수며, 부침개며, 김밥과 튀김, 오뎅국으로 이루어진 분식 세트도 만들어주시곤 했다.
아이들은 날로 토실토실해졌고, 나는 퇴근을 하고나면 할일이 없어 무료할 지경이었다.
돈 아까워말고 이모님 잘 모시자.
내 시간과 에너지 아껴주시고, 무엇보다도 삼시세끼 스트레스 안받게 해주시는 이모님은 '무늬만 주부'인 나에게 찾아온 '살림 요정'이 분명했다.
날로 실해지는 아이들과는 달리, 나의 통장 잔고는 텅 비어갔다.
하루 걸러 한 번씩 마트장을 봐야했는데, 냉장고가 비면 이모님이 한소리 하시기 때문이다. 문제는, 어느 순간부터 아이들이 이모님 음식을 예전처럼 잘 먹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이모님표 집밥에 질렸는지, 주말이면 외식을 하고 싶어했고, 이모님이 주말동안 먹으라고 만들어주신 많은 음식은 고스란히 남기는 일이 잦아졌다.
한편, 이모님은 '살림의 달인' 답게 각종 도구를 잘 활용하셨는데, 그로 인해 여태까지 한번도 사본 적이 없는 각종 조리도구, 주방용품, 청소도구 등을 계속 사들여야 했다. 이런 소소한 비용도 쌓이니 은근히 부담이 되었다.
당시 우리집 재무구조는 단순하기 그지없는 (노동소득) - (지출) = (저축)이었는데, (지금은 약간의 월세소득이 추가되었다.) 월급을 받아 보험, 연금, 관리비, 월세, 이자 등등 내고 아이들 학원비, 이모님 비용, 식비 등 나가고 나면, 남는 것이 없어서 왜 고생하며 맞벌이를 하고 있는 것인지 회의감이 밀려오곤 했다. 자연스럽게 '퇴사'를 생각하는 날이 많아졌다.
그런데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지출을 줄일 데가 없는 것이다. 아이 학원은 이미 영어, 수학, 운동 등 최소한으로 보내고 있고, 외식비라도 줄여볼까 했지만 그나마 없던 요리 솜씨도 이모님 덕분에 쓸일이 없으니 더 퇴화하는지 자꾸 외식에 의존하게 되었다. 남은 것이라고는 가계 지출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이모님 비용과 식비 뿐이었다.
무엇보다도, 너무 '과분한 호사'를 누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불안했다. 이모님이 척척 다 해주시니 나도, 아이들도 점점 나태해지고 의존적으로 변하는 것이다. 이런 생활에 익숙해지다보면 아이들도 나처럼 '생활지수 제로'인 어른으로 자랄 것이 분명했다. 지금부터라도 헝그리 정신, 독립심을 가지고 스스로 계획하고, 아끼고, 규모있게 사는 연습을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생각만해도 두려웠다.
이모님 비용보다 외식비, 배달비가 더 드는거 아냐? 매일 배달음식 먹다가 병원비가 더 들지도...
집안일은 또 어떻고. 지금도 퇴근 후엔 이렇게 녹초가 되는데 이런 저질체력으로 잘 해나갈 수 있을까?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전조사가 필요했다. 나는 맘카페에 "이모님 없이 살 수 있을까요?" 글을 올렸고, 30여개의 댓글이 달렸다. '나도 잘 살고 있으니 넘 걱정하지 말라'는, 비슷한 처지의 직장맘들 응원 글이었다. 실질적인 팁을 알려주신 분도 꽤 있었다. 많은 용기를 얻을 수 있었고, 비로소 이모님과 헤어질 결심할 수 있었다.
독립을 앞두고, 나만의 원칙을 몇 가지 세웠다.
1. 더러우면 더러운대로 산다. 청소에 목숨걸지 않는다.
2. 음식은 아웃소싱 하되, 외식은 줄이려 노력하고 배달음식은 최소화한다.
무엇보다도 청소하기 쉬운 집과 집안일하기 편리한 시스템을 만들어야 했다. 대대적인 '물건 버리기'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