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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쇄를 벗어던지고

이방인에서 이방인으로

by 도쿄키무상 Jan 22.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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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새해, 이유 모를 전염병이 발생하면서 세상을 점차 마비시킨다.

이 전염병은 많은 이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리고 나의 유일했던 꿈마저.


나는 인생의 큰 계획을 세우지 않고 살아가는 편이다.

삶이라는 것은 계획대로 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나에게도 유일한 목표이자 계획이 있었는데, 20대 중반부터 시작되는 7년짜리 워킹홀리데이 계획.

호주를 시작으로 뉴질랜드, 캐나다, 파리, 일본까지.

나는 30대 초반이 되어 돌아오려고 했다. 정확히는 멋진 30대가 되어 돌아오고자 했다.


학창 시절부터 학교에도 사회에도 의구심이 가득했다. 다행인 점은 겁이 많은 성격 탓에 반항심으로 비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부모로부터 선생님으로부터 때로는 친구들의 시선으로부터 이해가지 못할 말과 행동을 지시를 받았다.

내 기준에서 납득이 어려운 부분들이 많았다. 그럼에도 어렸기 때문에 남들도 나와 같이 감내하며 살아간다고 생각했다.


성인이 되어서도 어딘지 모를 나의 어긋남은 여전했다.

이런 나는 결국 대학을 끝내 완주하지 못했다. 학문적 배움보다 동기간의, 선배 간의 유대감을 중요시하는 곳이었다.

내가 배우고자 하는 것은 이곳에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대학을 나오지 않은 스스로에게 떳떳하고 싶었다. 그렇게 마냥 멋스럽다고 생각되는, 긴 장기여행을 계획하게 된다.

그게 나의 7년의 워킹홀리데이 계획이 되었다.

나름대로 준비를 착실히 해왔다. 아르바이트를 쉬지 않고 해 오면서 돈도 모으고, 또래보다 사회적 경험치에서 앞서나갔다 생각했다.

19년도 말이 되어서야 나의 꿈에 첫걸음을 내딛는 순간이 되었다. 호주행 비행기표를 예매했다. 드디어 멋진 모험이 시작될 거라고 생각했다.


20년 새해가 밝았다. 친구들과 함께 일출을 보기 위해 한강으로 향한다.

새해의 첫해를 날이 흐린 탓에 보지 못했다.


이 때문이었을까.

나의,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날은 줄곧 흐림이었다.


이해의 나의 발 한쪽에는 족쇄가 채워진다.



코로나가 터지면서 일하던 곳을 잃고, 꿈 또한 좌절됐다.

나만의 문제가 아니었기에 억울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호주에서의 25살이 아닌 여전히 한국에서의 25살을 지낸다.

비교적 코로나로부터 자유로운 제주도로 도망쳤다.


호주 앞바다가 아닌 월정리 앞바다를 보며 마음을 애써 위로했다.


26살의 나는 여전히 제주에 머물렀다.


27살의 나 역시 같은 곳에 지내왔다.


어느 시점부터였을까.

오랫동안 느껴왔던 이질감들이 큰 불만으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정말 사소한 부분에서부터 말이다.


‘이 사람은 나를 언제 봤다고 반말이지?’

‘저 사람은 공공장소에서 왜 저렇게 시끄럽지?’

‘내가 내 돈 주고 택시를 타는데 왜 기분이 나빠야 하는 걸까?’


사실 나만이 특별하게 느끼는 문제들은 아니었다.

이 별거 아닌 것들은 어느 순간 나의 마음 한편을 검게 물들이고 불행이라는 이름으로 자리한다.


‘친구면 이렇게 함부로 해도 되는 거야?’

‘왜 나만 손해 보면서 살아야 하는 건데?’

‘어째서 나만 남 눈치를 보고 배려하면서 살아야 하는 거야?!’


작은 문제들은 점점 불만이 되어 커져갔다.

아니,

나의 불행이 깊어져갔다.


내가 상대방에게 건네는 친절과 호의는 당연한 게 되어갔고,

내가 받는 불편과 불쾌함 또한 당연하게 되어갔다.

28살의 나를, 주변인들이 예민하다고 치부하기 시작했다.

나조차도 나의 문제들을 예민함이라는 단어로 정의했다.


일상의 불행이 너무나 크게 다가왔다. 견디기가 어려웠다.

그럼에도 내가 극도로 혐오하는 사람들과 같은 부류의 인간이 되는 것을 경계했다.

스스로를 철학적 의미의 초인이라고 애써 위로했다.


이 시기의 나의 발에는 또 하나의 족쇄가 채워졌다.


22년 10월 전염병의 종식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 시점부터 해외여행도 허용이 되었다.

비싸게 티켓을 끊고서 도쿄로 향했다.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는 여행이었다.

전형적인 나의 도피 방법이었을지 모른다.


이때의 도쿄여행이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멀미약에 취해서였을까, 여행을 위해 급하게 맞은 백신의 부작용이었을까.

이상하리만치 이 시기의 도쿄여행에 대한 기억이 없다.


단 한순간을 제외하고 말이다.


여행 첫날 숙소에 짐을 두고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서 근처 식당을 찾아 나섰다.

구글 지도를 보고서 근처 돈카츠 집을 방문해서 식사를 했다.

음식이 너무나도 맛있었다. 한창 스트레스를 미식으로 해소하겠다며 이런저런 음식에 목숨 걸었던 시기였다.

일본식 돈카츠에 돈지루라고 불리는 일본식 된장찌개에 흰쌀밥. 평범한 음식들이었지만 감동적이었다.

무엇보다 맛보다 기억에 남는 건 식당 직원분들의 웃음과 친절함이었다.


일본 여행이 처음이 아니었기에, 낯선 모습이 아니었다.

하지만 특정하지 못할 무언가로 인해 자욱했던 나의 일상에 정말 작은 빛으로 다가왔다.


이걸 계기로 의도적으로 일상 속에서 사람들을 지우며 살아왔던 나는,

여행 동안 사람들의 얼굴을 똑바로 보기 시작했다.


언제나처럼 찌푸려진 미간이 아닌 모두가 웃고 있었다.

날카로운 어투가 아닌 너무나도 조심스러운, 상냥한 말이 오고 갔다.

내 옆을 지나치는 사람이 경계되는 것이 아닌, 그의 발걸음을 배려하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흘러갔다.


22년 12월 일본 워킹홀리데이 접수가 시작되었다.

모두가 코로나에 움츠려 들어있을 시기가 나에게는 큰 행운으로 찾아왔다.

나는 비교적 쉽게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두 달 전 내가 느낀 마음에 확신을 갖고서 일본으로 떠나고자 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23년 12월.


나는 한쪽에 채워진 족쇄를 벗어던지고,

스스로 채운 또 한쪽의 족쇄마저 내려놓는다.


그렇게 나는 도쿄행 비행기에 몸을 실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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