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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진 Jul 22. 2023

그 해 우리는 : 지독한 믿음

드라마 [그 해 우리는] 읽기


<그 해 우리는>의 웅이에게 느닷없이 찾아온 연수와의 이별의 순간을 교통사고에 비유하자면 사망에까지 이를 수 있는 초대형 사고에 해당할 것이다. 이유조차 알 수 없는 교통사고, “내가 가진 것 중에 버릴 게 너밖에 없다”던 연수의 ‘독한 이유’를 알아차릴 새도 없이 버림받은 웅이가, 연수로 인해 인생 포기한 폐인처럼 살던 웅이가, 5년이나 지나 드라마처럼 유명 작가가 되어 다시 연수를 만나, 두 번은 없을 것 같던 사랑을 하고 마침내 행복한 결말을 보여주는 드라마는 작가의 ‘소망’ 드라마일 수 있다. 


그럼에도, ‘일반인들의 연애가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을 수 있다’ 던 드라마 속 피디의 말처럼, 위대한 작가의 현실에 대한 총체적인 인식이 드라마에 전형적인 현실을 담을 수 있을지언정 그보다 더 전형적인 현실은 여전히 현실 속에 살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전형적인 현실은 하나가 아니니까 말이다. 


현실적인 것만도 소망적인 것만도 아닌 현실적인 소망, 현실에 근거한 소망이 담겨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다. 단지 작가만의 소망이 아니라 ‘우리’의 소망일 수 있는 것이다. ‘현실적인 것이 이성적인 것’(헤겔)이라는 말을 ‘현실적인 것이 우리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라고 믿게 되는 순간이다.  




어릴 적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상처’로 인해 버림받는 것이 두려울 수밖에 없는 웅이이기에 만남도 헤어짐도 쉬울 수 없다. 버려서 상처 주는 것과 같은 일은 더더욱 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런 웅이였기에 연수를 좋아하면서도, 누가 봐도 좋아하는 것이 맞는데도 ‘먼저’ 좋아한다는 결정적인 말을 하지 않아 연수를 짜증 나게 했을 것이고, 그런 웅이였기에 ‘만약에 말이야’, 만약에 화법으로 끊임없이 사랑을 확인하던 연수가 마침내, ‘만약에 말이야 우리가 헤어지면, 내가 너 버리고 가면’ 어떡할 거냐는 ‘불길한 물음’에 “안 헤어져, 헤어져도 나는 안 헤어져”라며, 헤어지면 ‘다시는 안 봐’라며 연수의 표현처럼 ‘평소와는 다르게’ ‘헤어짐’에 관해서 만큼은 ‘단호’했을 것이다. 


“가난이 너무 싫은 건 남에게 무언가를 베풀 수가 없다는 거”라던 ‘가난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가난한 형편으로 인해 상처받는 것이 두려울 수밖에 없는 연수였기에 웅이를 좋아하면서도 느닷없는 이별 통보를 하고 ‘우리가 왜 헤어져야 하는데!’ 이유를 묻는 웅이에게 차마 그 이유를 말하지 못하고 삼킨다. “너와 나의 현실이 같지 않아서, 아니, 정말 사실은 내 지독한 열등감을 너한테 들킬 것만 같아서”. 그렇게 대형 사고를 내고 연수는 “너 없이 살 수 있을 줄 알았던 내 오만”에, 자신도 어쩔 수 없었던 그 ‘오만’에 슬퍼하며 눈물 흘린다. 


연수를 짝사랑했던, 웅이의 절친이었던, 가장 가까이서 지켜봤기에 두 사람을 가장 잘 아는 지웅이 ‘버림받아 상처받을까 봐’ 지독한 이별을 한 두 사람이 ‘서로 상처를 줄 만큼 줘서 다시는 안 볼 거라던’ 소망 섞인 확신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상처’를 뒤로 한 채 서로를 너무나 좋아했던 두 사람이 다시 만나 행복한 결말을 이루기를 소망했을 것이다. 그러한 소망을 가능하게 했던 건 두 사람을 ‘둘러싼’ ‘믿음’ 때문이라고 믿게 만든다.  




현실 속의 작가이기에 현실이 작가를 만드는 것이지만, 현실 속의 작가이기에 작가가 현실을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현실은 인간들의 현실에 대한 총체적 인식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기도 하지만 인간들의 간절한 소망에 의해서 만들어지기도 한다. 현실에 대한 총체적 인식과 간절한 소망이 함께 한다면 바라는 현실을 만들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만약에 말이야, 웅이와 연수가 애초에 서로의 상처를 잘 알고 있었더라면 그들의 사랑의 모양은 달랐을까. 그들은 서로의 상처를 보듬으며 더 따듯한 사랑을, 서로에게 상처 주지 않는 사랑을 했을까, 아니면, 오히려 그 반대였을까, 5년을 만나다 서로에게 지독한 상처를 주고 헤어졌지만, 그 보다 더 지독한 상처를 남기고 영영 헤어졌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만약에 말이야, 어떠한 가정이든 할 수 있지만 ‘상처가 상처를 보듬는 따듯한 사랑’보다 ‘서로에게 상처만 남긴 채 헤어지는 사랑’이 더 현실적일 수 있지만 두 사람의 행복한 결말을 이루어주고 싶었던 작가의 ‘현실적인 소망’으로 인해 드라마는 작가의 소망 드라마이면서도 ‘우리’의 소망 드라마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연수와 웅이가 상처로 인해 사람에 대한, 무엇보다 자신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에게 믿음이 되어준 연수 할머니, 웅이 양부모와 같은 사람들 덕분이었을 것이다. 가난으로 상처받은, 버림받아 상처받은 연수와 웅이의 세상에서, 어쩌면 우리와 다르지 않은 세상에서 그들이 가진 상처로 인해 헤어질 수밖에 없었지만 그들을 둘러싼 믿음이 두 사람의 사랑을 다시 꽃 피워준 것이라고 믿게 된다. 


연수 할머니와 웅이의 양부모가 그들을 낳은 친부모가 아니라는 점에서 할머니와 양부모가 보여주는 믿음은 의미가 있어 보인다. 그들이 보여준 믿음이 ‘사회적인 것’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즉, 사회에 그런 믿음이 있다는 것은 가난의 상처, 버림받은 상처가 상처에 머물지 않고 오히려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전이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삶에 절망할 수밖에 없음에도 소망하는 것은 자신을 둘러싼 믿음 때문이라고 여긴다. 그러하기에 자신보다 더 삶을 소망하게 하는 사회와 그런 사회를 이루는 사람들이 이루는 믿음이 무너지면 사회도 사람도 자신도 무너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가난과 버려짐’으로 무너져 가는, 파괴와 분열로 파멸해 가는 인류의 시간 속에서 어딘가 믿는 구석이 있다는 것은 한 줄기 빛과도 같다. 세상의 구석구석에서 믿음의 빛이 발하고 있다는 것은 세상의 구석구석에서 현실에 대한 총체적 인식에 근거한 소망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과 그들이 밝혀주는 믿는 구석이 있다는 것일 테다. 그들의 지독한 믿음으로 인해 견고할 리 없는 세상은 견뎌지고 있는 것일 테다.


2023. 7.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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