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한다’는 말 보다 ‘이해하고 싶다’는 말이 나는 좋더라.
‘사랑한다’는 말 보다 ‘사랑하고 싶다’는 말이 나는 좋더라.
오래전 한 친구의 말이다. 그 이유를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이해’와 ‘사랑’이라는 말이 가지는 의미가 만만하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일 것이라고 짐작한다. 그렇게 나는 그 말에 수긍했고 지금도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나는 ‘이해할 수 있다,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이 좋다.
‘이해한다와 이해하고 싶다, 사랑한다와 사랑하고 싶다’와는 조금 결이 다르지만 그 말도 결국 ‘이해’와 ‘사랑’의 의미가 가지는 만만찮음에서 기인한 것일 테다.
이해하려는, 사랑하려는, 마침내 ‘할 수 있다’는 이해의 현실화 가능성, 사랑의 현실화 가능성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좋다는 것이겠다.
드라마 ‘그해 우리는’에 감정 이입이 되었던 것도 그런 사정에 기인할 것이다. 연수와 웅 뿐만 아니라 그 두 사람을 짝사랑하는 지웅과 엔제이,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인물들의 감정을, 그들의 삶을 ‘이해할 수 있겠다’는 것이다.
타인의 감정, 타인의 삶에 대해서 함부로 이야기하는 것은 조심스럽다. 타인이 나의 감정과 나의 삶에 대해서 함부로 이야기한다면 불쾌함을 넘어 상처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들의 감정, 그들의 삶을 그들처럼 직•간접적으로 경험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고, 그 경험이 오랜 시간 반복되면서 내가 겪은 일처럼, 내 일처럼 여겨지기 때문에 이해할 수 있다고 받아들이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조심스럽지만, 간접적으로나마 인간의, 타인의 감정과 삶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문학과 예술’이기도 하다.
그들의 이야기는, 그들의 감정과 그들의 삶은 ‘그럴 수도 있는’ 현실이다. 작가가 꾸며낸 것이라는 점에서 허구이지만 그 역시 현실이다. 허구의 현실성, 진실성 여부 역시 현실에 기반한다. 작가와 함께, 작품과 함께, 독자와 함께, ‘문학과 예술’은 현실을, 진실을 현실화하기도 하는 것이다.
드라마가 보여주는, 내가 감정 이입이 되었던 그들의 감정, 그들의 삶에 대해 앞선 글들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앞으로도 ‘연수웅 이야기’를 이어가 보려 한다.
2024. 12.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