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진 Aug 17. 2023

낯설고도 이상한 ‘양가성’

테리 이글턴의 <성스러운 테러> 읽기

1      


여러 사전들에서 거의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테러(terror)'의 정의는 ‘특정 집단의 목적을 위해서 군중들에게 가해지는 위협⋅공포⋅약탈⋅살인 등 다양한 폭력을 동반한 행위’라는 것이다. 그리고 ‘태초에 테러가 있었다’는 ‘견해’가 눈에 띈다. 그런데 무엇보다 ‘테러'는 ‘질서를 유지하느냐 파괴하느냐’의 문제와 깊은 연관이 있어 보인다. 그리고 ‘질서-무질서’, ‘유지-파괴’, ‘유지하려는 자-파괴하려는 자’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는 것에 ‘테러’라는 문제의 복잡성이 있다. ‘테러’는 양면의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글턴에 따르면 문명 이전 상태에 대한 ‘파괴’라는 의미에서 ‘야만’은 문명의 다른 한 면일뿐이다. 문명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 자연을 정복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문명과 야만은 서로 이웃이다. “인류 문명은 자연이라는 카오스 위에 건설된 것이며, 이 과정에 포함된 조직적 폭력 없이는 그 결과를 한탄하는 현재의 생태주의 전사들 역시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글턴에 따르면 테러는 인류 문명에서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적어도 문명을 위한 파괴와 정복이라는 성격을 지닌다는 점에서 지금까지의 역사에서는 그런 ‘측면’이 있었다. 창조와 파괴, 생명과 죽음, 긍정과 부정이 늘 ‘함께 한다’는, 어느 한 면만이 존재할 수 없다는 측면에서 테러는 ‘양면적’이면서도 ‘모순적’인 성질을 지닌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러했지만 앞으로는 ‘파괴 없는 창조’도 생각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하나 그럴 경우에도 ‘창조’를 그만둘 수 있다면 모를까 ‘창조’가 아니라 약간의 변형을 위해서도 ‘어느 정도’의 ‘불가피한’ 폭력이라는 의미에서의 ‘테러’는 불가피해 보인다.      


      

2     


이글턴에 따르면 테러를 자행하는 중요한 집단인 국가, 그리고 ‘권력’이라는 것도 문명과 마찬가지로 양면적이다. 국가가 이미 위반을 토대로 해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법의 제정자가 그것의 위반자이기도 한 것인데 그 이유는 무엇보다 법치제 자체가 최초의 정복과 혁명, 침략과 전복을 통해 세워졌기 때문이다.”(106) ‘죄 없는 국가’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글턴은 모든 법이 억압적이며 모든 권위가 거부의 대상이라고 생각하거나 권력에 대해 항상 부정적인 사람들은 “법이 특권계층의 무기일 뿐만 아니라 약자들을 보호하는 도구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이들, 즉, 유아적이고 극단적인 좌파들, 공권력의 도움 없이도 잘 살 수 있는 사람들, 부유한 자유주의자들일 것”(98)이라고 지적한다.     

 

국가와 권력의 양면성에 대해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한 그들 역시 폭력적인 테러의 한 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적 이윤 추구 역시 군사적 무력과 긴밀한 동맹관계에 있다. 자본주의는 “경쟁과 착취, 군사적 침략과 파괴적 개인주의라는 형식으로 폭력에 기생해 살아가고 있는 것”(107)이다. 그런 상황을 유지하기 위해 자본주의적 유혈혁명은 불가피해 보이며 마르크스가 밝혔듯이 자본주의는 지속적인 혁명과정으로서 계속해서 파괴되고 용해되며 모습을 바꾸고 동요하는 위반의 운동이다.(107)  


         

3     


이렇듯 이글턴에 따르면 문명․국가․권력․자본주의는 ‘파괴와 건설’의 양면성을 지닌 ‘테러’의 산물이며, ‘테러’를 통해 유지된다는 이면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해서 그러한 테러와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테러를 어떻게 다루든 혹은 테러를 어떻게 이용하든 문명 속에 나름의 자리를 가지고 있는 테러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경외심과 공포, 조심성이 필요’하며, 테러를 제대로 이용하려면 우선 그것의 ‘양가성을 인정해야’만 하겠다.      


이글턴에게 ‘테러’라는 용어는 바로 이 양가적 개념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다. “이 개념의 양가성은 ‘sacer'라는 단어가 축복과 저주, 성과 속 모두를 의미하는 데서 비롯된다.”(13) 고대 문명에는 창조적인 테러와 파괴적인 테러, 생명을 부여하는 테러와 죽음을 불러오는 테러가 동시에 존재했던 것이다.     

 

신성한 것은 위험한 존재로서, 유리 상자보다는 우리(牛李)에 가두어져야 할 무엇이었다. “이 개념은 언어적 동물의 수수께끼, 즉 삶을 불러오는 힘과 죽음을 야기하는 힘이 어떻게 하나의 기원인 언어로부터 비롯되는가 그리고 결국 그 자신의 창조적 힘에 의해 파괴되고 마는, 스스로를 역행하는 이 동물의 정체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들과 관련된다.”(13)          


 

4     


낯설고도 이상한 이런 양면성을 고려하지 않고 테러라는 개념을 파악하는 것은 전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테러리즘 역시 그렇지만, 처음에 테러는 종교적인 개념으로 나타났으며, 종교는 무엇보다 존재의 열락과 무화 모두를 관장하는 이 양가적 힘을 자신의 핵심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14)      


다시 말해, 파괴적이고 죽음을 부르는 테러의 공범자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도 창조적이고 생명을 부여하는 테러에 조심스럽게 가담하는 것이 하나의 기원을 가진 테러의 양가성을 인정해 주는 하나의 행동일 수 있겠다. 


*“ ”인용은 T. 이글턴: <성스러운 테러>, 서정은 역, 생각의 나무 2007. (  ) 안은 이 책의 쪽수.          


2014. 11. 1.           

이전 06화 느껴버리고, 인식해 버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