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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진 Aug 23. 2023

느껴버리고, 인식해 버린

테리 이글턴의 <성스러운 테러> 읽기

1     


희생이 문제라는 말은 희생 ‘자체’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글턴의 지적처럼 전근대사회에서는 희생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기능을 담당했으며, 이 둘을 불가피하게 얽혀 있는 개념들로 이해했다면, 근대사회는 이 둘 사이에 절대적인 구분을 설정한다.(221) 근대에게 “자아는 너무 소중해서 결코 포기될 수 없는 어떤 것이 되어버린 것”(221)이다.      


또한, 근대인들은 전근대인들처럼 “자기 포기를 자기실현의 전제조건으로 보는 대신 자기실현의 적대어로 이해하며 좀 더 쉽고 타협할 수 있는 방식의 자기실현을 추구한다.”(221) 탈근대 역시 희생이라는 개념에 회의적인데, 이는 대개의 경우 포기되기에 충분할 정도의 자아라는 것이 애초에 있기나 한 것인지에 대해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221)      


포기할 자아가 있는지도 희미한 시대라는 진단에도 불구하고 이글턴은 “희생”이 “급진적”인 개념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계에 대한 포기가 언제나 삶에 대한 부정은 아니다. 실제로 정치적 혁명가들은 종종 ‘모든 사람의 더 큰 행복이라는 목적’을 위해 자신의 안녕과 행복을 포기한다. 다시 말해 ‘풍요를 위한 금욕’의 형태가 존재하는 것이다.      


희생은 굴욕적인 존재가 권능에 이르는 과정인데, 철학자 바타유(Georges Bataille)는 이를 “상실에 의한 창조”라고 명명한 바 있다.”(221) 이글턴의 주장처럼 경험상으로도 여전히 급진적인 자기 포기라는 희생을 하는 ‘희생양’들은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분명 “희생” 하려는 자아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창조와 생명 없는 파괴와 죽음에 원인이 있을 것이다. 파괴된 양가, 파괴된 이성, 파괴된 관용, 파괴된 자유, 파괴된 자아, 창조적이고 생명을 부여하는 희생마저 파괴되어 인간들의 공동체는 파괴된 것이다.          


2     


이글턴은  <성스러운 테러>에서 ‘나쁜’ 무無에의 의지와 구분하여 “포기라는 ‘좋은’ 무에의 의지의 표현인 희생양을 좀 더 치유적인 방식의 성스러운 테러로 간주”(198)한다. 그렇다면 ‘희생’의 ‘양’들은 사라지고 있지만, 파괴적이고 죽음을 부르는 테러를 치유하기 위해 더 많은 ‘희생양’이 필요하다는 것일까. 오히려 그 반대이다.     

 

이글턴은 그러한 희생양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때 진정한 현실변혁이 이루어진 상태라고 보기 때문이다. “희생양의 존재를 말소시키지 못하는 변화는 필연적으로 불완전한 변화이기 때문에 희생양의 존속 자체가 변화의 실패를 지시하는 표지가 될 것이다. 진정한 변화는 희생양의 존재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231)       


이글턴은 희생양을 “무고한 범법자”라고 부른다. 그 이유는 “폭력이 개인적 잘못이 아니라 일반적 상황으로서 구조적으로 그 안에 각인되어 있”(230)기 때문이다. 그 자신들 개인으로서는 무구한 존재이지만 커다란 착취구조의 악취가 그들에게 선명하게 배어 있다는 점에서 무구한 범법자들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박탈당한 자들의 상징으로서 희생양은 이 왜곡된 상황 자체의 죄를 자신 안에 각인하고 있는 ‘범법자’가 된다.(230) 그들은 구조적 폭력에 의해 죽음으로 내몰려 무기력하게 죽어가는 희생자들과는 다르다. 폭력적인 구조 속에서 구조적 폭력을 ‘느껴버리고, 인식해 버린’ 이들이다. 그럼으로써 가만히 있지 못하고 어떤 형태이든 거부 행위를 할 수밖에 없는 이들이다.      


“그들은 이런 범죄적 상황을 유지할 어떤 이유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이 상황의 타파를 추구해야 할 그 모든 동기를 다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또한 ‘무구한’ 존재로서 이 사회의 잠재적 변혁이 시작되는 지점이 된다.”(231) 전체 상황의 변화 없이는 희생양 개인의 특정한 시련이 치유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희생양이 처한 상황의 보편성이 드러난다.(231) 그렇다면 문제는 이 희생양들을 어떻게 말소시키느냐는 것이겠다.           



3     


이글턴은 “고대의 제의에서는 어떤지 몰라도 현대 정치국가에서 희생양을 제거할 능력을 가진 것은 희생양 바로 자신”(231)이라고 말한다. 자기 자신을 제거하는 희생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희생양들은 힘을 확보하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힘이야말로 전체 상황의 진정한 변화를 이끌어 내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이다. 즉, 희생양이 사라진 진정한 현실변혁을 위해서 오히려 자기 포기라는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희생을 나눌 때 더 이상 희생은 필요 없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문제는 “희생”이다. 어떻게 자아 없는 자기만을 생각하는 비-인간들에게 인간적인 희생을 가능하게 할 것인가. 이글턴의 답은 “문화”이다. “인간은 영원히 문화라는 잉여를 통해 자신의 모습 이상을 재현하는 존재”(231)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문화라는 잉여”를 통해 “인간성을 공포 없이 마주하는 것”(231)이다.      

그것은 ‘숭고’와 같은 미적 체험을 하는 것, 파괴자들의 폭력에 맞서 분노를 예술적으로 승화시키는 것, ‘선’은 아니더라도 ‘악’은 되지 않겠다는, ‘좋은’ 자유주의자는 아니더라도 ‘나쁜’ 자유주의자는 되지 않겠다는 관용을 갖는 것, 당장에 희생에 동참하지는 않더라도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또한 고통을 나누는 것, 도시-농촌, 남녀노소의 벽을 넘어 소통하고 협력하며 살아갈 수 있는 공동체를 살려내는 것 등의 “문화적 향유”이겠다.     



*“ ”인용은 T. 이글턴: <성스러운 테러>, 서정은 역, 생각의 나무 2007>, (  )은 쪽수.          


2014. 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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