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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진 Aug 20. 2023

‘사적 소유’라는 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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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맑스는 <경제철학초고>에서 ‘사적 소유’라는 감각이 인류의 지배적인 감각이 된 근거는 ‘소외된 노동’이라고 밝히고 있다. ‘소외된 노동’이 ‘사적 소유’라는 감각을 탄생시킨 비밀이며 그렇게 탄생한 ‘사적 소유’라는 감각은 ‘소외된 노동’을 통해서만 유지·존속 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 둘은 한 몸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소외된 노동’은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와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야만 살아갈 수 있는 노동자를 전제로 한다.     


<자본론>에서 칼 맑스는 거대자본의 탄생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아메리카에서의 금과 은의 발견, 원주민 말살과 노예화와 광산에 매장, 동인도에 대한 정복과 약탈의 시작, 아프리카를 상업적인 흑인 사냥터로 만든 것은 자본주의 생산 시대의 장밋빛 여명을 알리는 것이었다. 이런 목가적인 소행들이 시초 축적의 주된 동력이었다.”      


거대자본이 가능하기 위한 최초의 자본은 “침략과 약탈”에 의해 가능했던 것이며 또한 자본축적은 한 지역에 국한되지 않았다. “뒤이어 온 지구를 무대로 한 유럽 국가들의 상업전쟁이 시작되었다.” 자본축적의 세계화가 시작된 것이다. 스페인은 멕시코와 페루를 정복해서 아즈텍과 잉카 문명을 멸망시키고 잔인한 착취를 일삼았다. 네덜란드도 “17세기에 최강의 자본주의 나라가 되는 데 필요한 돈을 그런 식으로 축적했다.” 네덜란드에 이어 최강의 자본주의 나라가 된 영국이 사용한 자본 축적 방법 역시 선행 국가들과 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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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오 휴버먼은 무산노동자의 탄생 과정을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설명한다. “우리는 (…) 16세기의 엔클로저(울타리치기)와 엄청나게 비싼 지대 때문에, 많은 농민들이 토지에서 쫓겨나 길거리에 나앉으면서 거지, 부랑자, 도둑으로 전락한 것을 보았다. 자유로운 노동계급은 일찍이 그렇게 창출됐다. 18세기와 19세기 초반에 다시 엔클로저가 일어났다. 이때의 엔클로저는 규모가 훨씬 더 컸기 때문에 임금을 위해 노동력을 팔아야 하는 토지 없는 불행한 사람들이 엄청나게 늘어났다.      


16세기의 엔클로저는 재산을 빼앗긴 사람들뿐 아니라 굶주림을 강요당한 대중의 폭력을 두려워한 정부에게도 상당한 저항을 받은 반면, 18세기의 엔클로저는 합법으로 인정됐다. 지주를 위해 지주의 정부가 만든 '엔클로저 법'은 그 시대의 질서였다. 토지를 가진 노동자는 이제 토지 없는 노동자가 돼 임금 노동자로서 공업에 종사할 수 있게 됐다.”      


칼 맑스가 지적하고 있듯이 이중적인 의미에서 자유로운 무산노동자가 탄생한 것이다. “‘자유롭다’는 것은 자유로운 노동자가 자유로운 인격으로서 스스로의 노동력을 스스로의 상품으로서 마음대로 처분한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판매할 다른 상품을 갖고 있지 않고 자기 노동력의 실현에 필요한 모든 물적 조건에서 떨어져 자유롭다는 이중의 의미에서이다.” 자신의 생산수단이었던 토지를 빼앗겨버려 생산수단이 없으니 공장에서 생산수단을 가진 자본가에게 몸을 팔아야만 삶을 유지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어쩔 수 없이 자유로워진’것이다.      


여기서 짚어야 할 것은 지주들의 이윤추구가 목적이었던 엔클로저가 단순히 땅에만 울타리를 친 것이 아니라 지주(자본가)와 노동자들 사이에도 법으로써 울타리를 쳤다는 사실이다. 지주를 위한 지주의 정부와 그 정부가 만든 법이라는 정치·경제 유착이 그것이다. 이렇게 초기의 상업 자본의 침략·약탈을 통한 자본축적을 바탕으로 산업 자본주의는 시작되었고 어쩔 수 없이 자유로워진 무산 노동계급을 합법적으로 착취함으로써 자본의 생명은 연장되고 있다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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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탈과 침략을 통한 자본축척 및 자본의 편에 선 정부와 법, 그러한 것들의 집합체로서의 국가라는 공식을 그대로 따르는 자본주의 사회라면 칼 맑스가 사적 소유 및 소외된 노동의 결과로 묘사한 노동자들의 상태는 과장이나 우연이 아닐 뿐만 아니라 필연적으로까지 보인다.      


“노동은 부자들을 위해서는 기적을 생산하지만, 노동자를 위해서는 궁핍을 생산한다. 노동은 궁전을 생산하지만 노동자를 위해서는 지옥을 생산한다. 노동은 아름다움을 생산하지만 노동자를 위해서는 기형적인 모습을 생산한다. 노동은 기계를 통해 노동을 보충하지만, 그 반면에 다른 일부의 노동자들을 야만적인 노동으로 몰고 가고, 또 다른 노동자들을 기계로 만든다.  노동은 정신을 생산하지만, 노동자를 위해서는 우둔함과 백치상태를 생산 한다”.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을 통해 자신을 긍정이 아니라 부정하며, 행복이 아니라 불행을 느끼며 자유로운 육체적 정신적 에너지를 발산하지 못하고 자신의 육체를 채찍질하고 자신의 정신을 황폐화시킨다. 따라서 노동자는 노동 바깥에서 자신을 느끼며 노동 안에서는 자신의 외부에 있음을 느낀다. 그는 노동을 하지 않을 때에 편안함을 느끼고 노동을 할 때에는 편안하지 않다. 따라서 노동은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강제된 강제노동이다.  따라서 노동은 욕구의 충족이 아니라 노동이 아닌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그런데 칼 맑스가 지적하고 있듯이 ‘소외된 노동’의 중대한 폐해는 인류의 삶 전체의 파괴, 즉, 노동자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파괴한다는 데에 있다. 자본가와 노동자는 협력적인 관계가 아니라 늘 적대적인 대립관계에 놓이게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동료들은 더 이상 더불어 살아야 할 이웃이 아니라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 밟고 올라서야 할 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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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무엇보다 침략과 약탈을 기반으로 완성된 ‘사적 소유-소외된 노동-사적 소유’라는 지속적인 상태는 인류의 감각마저 변화시키게 된다. “모든 신체적 정신적 감각들을 대신하여 이 모든 감각들의 단순한 소외 곧 소유라는 감각”이 생겨난 것이다.      


“사적 소유 내부에서 (…) 각자는 타인에게 새로운 욕망을 만들어주는 일을 노리고 투기하며, 이로써 타인을 새로운 제물이 되도록 강요하고, 새로운 예속관계에 빠뜨리며, 새로운 방식의 향유와 아울러 경제적 파멸로 오도한다. 각자는 타인을 지배하는 낯선 본질력을 만들어내고 이를 통해 자신의 이기적 욕구를 충족시키려고 한다. 따라서 대상들의 양이 증가함에 따라 인간이 예속되어 있는 낯선 존재들의 영역도 커지며, 새로운 생산물은 모두 상호기만과 상호약탈의 새로운 잠재력인 것이다. 그럴수록 인간은 인간으로서 더욱 빈곤해지며, 적대적인 존재를 제어하기 위해 더욱더 많은 돈을 필요로 하게 된다. 또한 돈의 힘은 생산의 양에 반비례해 하락한다. 즉 돈의 힘이 증대함에 따라 돈은 더욱더 필요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돈에 대한 욕구는 국민경제학이 생산하는 진정한 욕구이며, 그것이 생산하는 유일한 욕구이다.”      


이렇듯 약탈자들에게서 시작된 타인에 대한 약탈과 착취를 통해 자신의 이익을 충족시키려는 ‘사적 소유’라는 감각은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과정에서 소외된 노동을 겪은 노동자들에게도 보편적인 감각이 되기에 이른다.



*"   " 인용은 K.맑스/F.엥겔스, <자본론>, 김수행 역, 비봉출판사 1990, 944쪽/ R.휴버만, <자본주의역사 바로알기>, 장상환 옮김, 책벌레 2000, 201쪽/ K.맑스/F.엥겔스,「1844년의 경제학 철학 초고」,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제1권>, 최인호외 역, 박종철 출판사 1991, 75쪽.



2016. 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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