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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진 Aug 25. 2023

포데모스: 포퓰리즘이면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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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당-운동'에 역동적인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 정당들의 중심에 스페인의 포데모스 Podemos가 있다. 변화를 일으키는 만큼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그야말로 ‘뜨거운 감자’와 같은 존재다. ‘정보화·자치·청년’이라는 시대 변화를 잘 보여주는 당이라고 할 수 있다.      


포데모스 창당 전부터 이 당의 이념을 준비하는 무대가 ‘인터넷 방송’이었다는 사실이 시대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시대 변화의 흐름에 따른 새로운 형태의 정당이라고 할 수 있지만 변화의 흐름에 편승한 ‘좌파포퓰리스트’ 당이라는 문제도 제기된다. 하지만 그들이 좌파 당으로서 성과를 내면서도 문제시되는 근본 이유는 포퓰리즘 populism이 아니라 ‘운동론’의 문제일 것이다. 과연 그들은 문제일까, 무엇이 문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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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시기 유럽 좌파당 운동>에서 박석삼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포퓰리즘’은 그 자체가 논란거리라고 쓰고 있다. “카스 무데가 포퓰리즘을 시대정신이라고 주장한 이래 비교정치학계에서는 현시기 유럽 좌파당 운동을 포퓰리즘의 틀로 분석하는 것이 대유행이다. 그런데 현시기 유럽의 수많은/대부분의 좌파당들이 포퓰리즘을 채택하였다든지, 포퓰리즘이 좌파당의 성장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주장”(유럽 22)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주장에 대해 박석삼은 “좌파적 정서를 가진 사람들은 동의하기 어려운 것인데, 이에 대한 체계적 반론이 아직 없다”(유럽 22)고 쓰고 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현시기 유럽 좌파당 운동은 포퓰리즘의 틀로 파악할 이유나 가치가 없고, 현시기 유럽 좌파당들의 성장에 포퓰리즘이 기여했다는 주장은 Podemos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수용되기 어렵다”(유럽 22-23)고 주장한다. 어쨌든 포데모스의 경우 포퓰리즘이 그들의 성장에 기여했다는 점에서 ‘포퓰리즘’에 대해서 좀 더 논해 볼 필요가 있겠다.  


정병기에 따르면 포퓰리즘의 문제는 “대중적 인기를 얻기 위해 실현 불가능한 공약을 남발하며 카리스마적 권위주의 정치를 추구하는 대중추수주의”의 포퓰러리즘 popularism의 문제이며, “포퓰리즘의 핵심은 사회를 엘리트와 인민의 대립 구도로 보고 엘리트에 대항해 인민(국민)을 대변한다는 것”이다,      


“포퓰리즘의 반대 개념은 엘리트주의”인데, 포퓰리즘 전체를 배격한다는 것은 포퓰리즘의 반대 개념인 엘리트주의를 지지하는 것이 된다고 쓰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포퓰리즘과 포퓰러리즘을 잘 구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 구분의 기준은 결국 ‘무엇을 하는 정치냐’ 일 것이다.      


“민주주의 질서에서 정치인은 (…) 자유의지를 가진 독자적 사고와 행동을 할 수 있는 정치적 존재이며, 이들이 국민의 피노키오가 아니라 특권층과 기성세대의 꼭두각시가 된다면, 그것이 주는 실망감은 더욱 클 것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누가 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하느냐다. 자유의지가 무엇을 향해야 하는지를 올바로 인식해야 한다. 이러한 새롭고 젊은 정치가 실현될 때 새로운 시대는 도래할 것이다.”      


장석준은 최근의 한국의 우파가 ‘여성·장애인·성소수자’를 혐오하는 ‘혐오정치’를 하고 있는데 그는 이를 우파 포퓰리즘이라고 본다. 그리고 그가 던지는 물음은 ‘좌파’는 ‘혐오의 정치’에 맞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좌파 포퓰리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대중들의 인기에만 영합하여 추수하는 포퓰러리즘이 아니라 대중들이 호응할만한 ‘정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국 정치에 좌파들이 ‘새 바람’을 일으켜야 하고 대중들이 호응할만한 보편적 이상을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장석준은 ‘혐오의 정치에 맞서는 연대가 모습을 갖추려면, 우선 사회운동 안에서 경제적-조합적 단계를 넘어서려는 노력이 시작돼야 한다’ 고 진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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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포데모스는 처음에는 정당이라기보다는 주로 소셜 미디어를 통해 소통하는 느슨한 전국적 네트워크였다. 창당 이후 2018년 기준으로 당원이 51만 명에 육박한다. 사회노동당 당원 수의 2배다. 이 중 절반이 소셜 미디어를 통해 가입한 당원이다.      


포데모스는 가히 정보화 시대의 진보 정당이라 부를만하다. 또한 각 지역에 기존 정당의 지역조직에 해당하는 ‘서클’들을 1,000여 개나 조직했다. 이들 서클은 별도의 대의기구 없이 모든 당원이 참여하는 ‘시민총회’를 통해 운영된다. 그래서 ‘운동형 정당’을 넘어선 ‘정당형  운동’이라는 분석까지 나온다.      


포데모스의 경제 대안을 정리한 <민중을 위한 경제대안>의 내용을 살펴보는 것은 그들을 판단하는 요소일 수 있을 것이다. “위기의 핵심 원인은 불평등의 엄청난 확대이며, 이로부터 금융, 경제 및 정치 위기가 비롯됐다. 그 중심에는 자본(금융자본의 헤게모니 아래 있는)과 노동 사이의 갈등이 있다. 이로 인해 임금이 하락하고 실업이 증가하며 사회보장 지출이 삭감됨으로써 내수가 급감한 것이다. 따라서 임금인상과 고용 확대를 통해 내수를 증가시키고 사회보장 지출과 공공투자(특히 사회적 인프라스트럭처에 대한)를 확대함으로써 불평등의 확대를 역전시켜야 한다. 그리고 금융 공공성을 확대해서 가계와 중소기업에 신용을 제공해야 한다. 또한 노동시간을 주 35시간으로 단축하고 정년을 인민당과 사회노동당이 도입한 67세에서 65세로 돼돌려야 한다. 이는 자본에 맞서 노동의 역량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동시에 성별 불평등을 반드시 해소해야 하며, 이는 고용을 확대하는 중요한 수단이기도 하다. 이상의 정책을 실시하는 데 필요한 재원은 국가 예산 구조의 변경과 탈세 방지를 통해 마련한다.”      


이들은 선명한 진보적 정책을 보여준다. 그런데도 포데모스에게는 ‘과연 좌파가 맞느냐’는 의문이 따라다니기도 한다.(세계 490-492) 왜 그럴까. 몇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좌파 전통으로부터 많이 벗어난 것 같은 이들의 생각과 말, 행동 때문이다.      


포데모스는 ‘자본주의’보다는 ‘78년 체제’(프랑코 사망 후 민주화 체제)를 더 자주 언급하고 ‘자본’ 대 ‘노동’이 아니라 ‘카스트 대 서민’의 대립 구도를 제시한다. 그러면서 인민당뿐만 아니라 사회노동당까지 ‘정치 카스트’라고 싸잡아 비판하며, 양당이 정치를 독점하는 78년 체제를 전복해야만 신자유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중간층부터 비정규직, 청년 실업자를 아우르는 ‘서민’이 직접 정치에 참여해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민주화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세계 4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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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삼은 ‘노동자를 호명하지 않는’ 포데모스의 포퓰리즘 문제를 운동론의 차이보다 전략의 차이로 파악한다. 포데모스는 “노동계급 헤게모니를 인정하지 않는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급진민주주의 전략에 기초하여 자본과 노동의 대립이 아니라 인민과 기득권층의 대립을 축으로 하는 포퓰리즘 전략을 능동적으로 채택한 당이다. 따라서 다른 좌파당들과는 달리 반자본주의나 사회주의의 이상을 공유하지 않는다.”(유럽 62)     


또한, “노동계급 헤게모니를 인정하지 않는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의 입장에 따라 노동과 자본 혹은 좌우의 대결이 아니라 인민과 특권층 Caste의 대립 즉 상하의 대립으로 나누고 여성, 생태 등 다양한 요구를 등가의 연쇄로 묶어 급진민주주의를 추구한다”(유럽 121-122)고 말한다.      


그리고 박석삼은 “좌파가 대중에게 호소할 때 인민을 호명하고 낡은 기득권층을 비난하고 그들을 인민에게 대립시키는 것은 좌파 정치에서는 당연한 것이다. 인민을 호명하면서 엘리트나 기득권층에 대립시키는 포퓰리스트적 시도란 모든 종류의 착취와 억압에 반대하고 인간해방을 추구하는 좌파라면 당연한 시도다. 이런 이유에서 인민을 앞세운 좌파의 정치와 투쟁을 따로 떼어내어 포퓰리즘이라고 부를 이유가 없다”(유럽 120)는 입장이다.     


“좌우의 분단과 상하의 분단은 전혀 다른 것 같지만 좌우의 대립에서의 지배계급이 상하의 대립에서 기득권층을 이루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양자의 차이는 좌파가 제도, 구조, 체제를 중시하는 반면에 포퓰리스트는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상층을 장악한 인적 집단을 중시하는 것이고, 이것은 대자적 인식과 즉자적 인식의 차이와 같다고 할 수 있다.”(유럽 121-122)      


그런 점에서 박석삼은 ““포퓰리즘의 가장 높은 형태는 사회주의일 수밖에 없다”는 라클라우(2005)의 주장은 당연하고, 이때 포퓰리즘과 좌파 사상과의 관계는 보편과 특수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유럽 121-122)고 주장한다. “2차 대전 직후 동구와 동북아시아의 공산당 정권이 모두 인민민주주의 혁명을 제시하고 인민민주주의공화국을 수립한 것은 착취받고 억압받는 비노동자 계급(주로 농민이나 빈농)과의 연대인데, 이런 연대는 마르크스주의나 좌파의 사상과 전혀 충돌하지 않고 모든 종류의 착취와 억압에 반대하는 좌파의 기본적 자세이기도 하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 즉 착취받고 억압받는 모든 세력을 인민이라는 이름으로 단결시키고 제국주의나 지배계급과 투쟁하는 것을 좌파적이 아니라 포퓰리즘이라고 한다면 좌파의 사상과 전략에 대한 무지 또는 억지라고 할 수밖에 없다”(유럽 119-120)고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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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삼이 언급한 급진민주주의자들인 라클라우와 무페는 “대의민주주의가 정착된 사회에서는 누가 어떻게 다양한 사회 집단들을 ‘인민 people’으로 구성하는지가 정치의 요체라고 주장했다. 포퓰리즘은 민주주의 정치의 필연적인 형식이며, 단지 어떤 방향과 내용의 포퓰리즘인지, 즉, ‘우파’ 포퓰리즘인지 ‘좌파’ 포퓰리즘인지 문제일 뿐이다”(세계 496)고 주장한다.     


과거에 좌파 정당이 노동계급을 강조한 것 역시 ‘노동자’ 담론을 바탕으로 인민을 구성하려던 전략이었다고 본다. 하지만 이제는 많은 것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노동운동은 여전히 중요하지만, 인민을 구성하는 전략은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스페인이라면, 78년 체제에 결탁한 세력들을 고립시키면서 이에 반대하는 다양한 집단들을 결집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러자면 78년 체제의 양대 정당과 겹쳐 있는 기존의 ‘좌파/우파’ 틀을 넘어서야 한다. 이것이 포데모스의 고민의 출발점이다.”(세계 496)      


결국, 노동계급의 중요성은 여전히 인정하지만 정치적인 전략에 따른 선택이라는 것이다. 그들 스페인의 현실에서는 그렇다는 것이고 한국의 경우는 한국이 처한 현실에 맞게 전략을 구상해야 할 것이고, 또 다른 지역에서는 그곳의 현실에 맞게 그 지역의 ‘극단적 중도파’에 맞설 수 있는 그곳의 ‘노동자인민’을 결집할 수 있는 전략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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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데모스는 사회의 다양한 진보적 요소들의 결합과 연대를 통해 총선에서 ‘양당 독점 구도 해체’라는 약속을 어느 정도 실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포데모스는 여전히 여러 도전 속에 있다고 여긴다. 그런 도전을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창당 초기에 보여준 젊고 열정적인 사회운동과 함께하는 혁신적 정당이라는 기조를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포데모스 다수파의 입장은 과거 사회주의 교리로부터 많이 벗어나 있다. 논쟁의 여지가 많다. 하지만 이러한 발상의 전환 덕분에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정치적 가능성들이 열렸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세계 479)      


변화한 자본주의의 현실에서 탄생한 그들의 현실성은 분명 변화를 이끌 역동성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들의 문제가 문제로 여겨지지 않는 것은 늘 있어 왔고 앞으로도 있을 문제로 보이기 때문이다.      


‘개혁−혁명’, ‘갈등−모순’, ‘불평등 해소−자본주의 전복’ 등. 현실이 그러하듯, 진보 운동 역시 개혁하다 혁

명하고, 혁명해도 개혁해야 하고, 갈등하며 해소하거나 해소 못해 모순에 이르거나, 불평등을 해소하다가 해소되지 못한 불평등이 폭발하여 자본주의 전복에 이르게 되고 그랬고 그럴 것이기 때문이다.      


진보하기 위해 운동하는 것이지만 운동을 어떻게 하느냐가 진보를 결정하기도 하는 것이다. ‘연대하며 평등하게’ 운동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필자가 주목하는 지점은 그들이 ‘좌파-당-운동’에 어떤 기여를 할 것인가, 혹은 ‘좌파-당-운동’에 어떤 해악이라도 끼치게 될까라는 것이다.          



“   ” 속 인용은 박석삼, <현시기 유럽 좌파당 운동>, 타흐리르 2020 / 정병기, <이준석은 누구의 피노키오인가>, [경향신문] / 장석준, <혐오의 정치에 맞서는 길>, [한겨레신문] / 

장석준, <세계 진보정당 운동사>, 서해문집 2019.          



2022. 1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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