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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해 록] 백년전쟁 46, 비목碑木1953

by 윤해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 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이름 모를 비목이여/먼 고향 초동 친구 두고 온 하늘가 /그리워 마디마디 이끼되어 맺혔네. 궁노루 산울림 달빛 타고 /달빛 타고 흐르는 밤 /홀로 선 적막감에 울어 지친 울어 지친 비목이여/ 그 옛날 천진스러운 추억은 애달퍼 /서러움 알알이 돌이 되어 쌓였네​.


비목이라는 가곡이 이렇게 슬픈 가사를 담고 있는 줄은 몰랐다. 비목碑木이 비목悲木이 아니고 초연硝煙이 초연超然히가 아니며 초동樵童친구가 초등初等학교 친구가 아니었고 궁노루Musk deer가 노루가 아니었다.


백암산 전투는 정전협정 조인 직전인 1953년 7월 14~18일 화천군 북쪽 백암산 부근에서 벌어졌다. 정전협정 체결을 앞두고 한 뼘이라도 더 땅을 확보하기 위해 마지막 공세에 나선 중공군 제60군이 백암산 일대를 점령하면서 전투가 시작됐다. 육군 제5사단이 반격에 나섰지만 험난한 지형과 중공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공격이 지체되자 제6사단 7 연대가 5사단에 배속돼 백암산을 우회해 북쪽으로 진출한 뒤 정상을 탈환했고 이어 철원군 내성동리와 등대리 방면으로 전진해 금성천~북한강 방어선을 확보했다. 이 방어선이 그대로 군사분계선이 되면서 당시 방어선을 따라 남북이 대치하는 상황이 70년째 이어지고 있다.


1939년생 한명희의 시에 1932년생 장일남이 작곡한 비목은 1969년 가곡으로 발표된 비장미 넘치는 불후의 명가곡이지만 그 의미를 제대로 알고 부르고 감상하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1964년 7사단 백암산 OP 수색대 소대장으로 근무했던 한명희 학군 소위가 군생활 중 우연히 목격한 6.25 전쟁 휴전직전 20만 중공군과 격돌한 금성전투에서 죽어나간 무명용사의 돌무덤 위에 비석도 아닌 비목을 보고 전역 후 4년이 지난 어느 날 통금通禁으로 귀가하지 못한 숙직실 한편에서 비목 위 얹혀있는 무명용사의 철모를 떠올리며 쓴 시가 비목이며 이듬해 이 시에 장일남이 곡을 부쳐 탄생한 비장한 가곡이 비목이다.


천년의 적 중공군은 그해 6월에 전격적으로 단행된 신의 한 수, 반공포로 석방을 통해 한국군 단독으로라도 북진통일을 하겠다는 우남의 결기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화천수력발전소가 있는 화천댐을 점령하기 위해 20만 대군을 동원하여 미군이 지키는 지역을 피해 물밀듯이 내려왔다.


공식적으로 한국군 2846명이 사망하고 8141명이 부상(영구장애)을 입었으며 미군 사망자도 305명이 나왔다. 중국 측 자료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만도 한국군 2766명과 미군 70명을 포로로 잡았다고 주장한다. (공식적으로 4136명 실종 및 미송환) 중공군의 피해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지만 먼저, 미 8군의 경우에는 중공군에게 최소 7만 명의 피해가 났다고 추정했고 국군은 중공군에게 6만 명의 피해가 났다고 추정하였다.


아무튼 이 전투 이후 전선은 소규모 정찰 전과 포격만이 지속되었으며, 7월 17일 공산 측은 휴전체결을 수락하고, 24일 휴전감시위원회가 입국하고, 쌍방 연락회담이 열렸다. 그러나 7월 26일까지 일부구역에서 땅 한 뙤기를 더 뺏으려는 혈전은 계속 지속되었다. 백암산 전투는 그야말로 초읽기에 들어간 정전협정 직전 마지막 순간에 안타깝게 희생당한 무명용사의 혼백이 넋이 되어 잠들어간 자취가 우리 역사상 가장 비장한 가곡, 비목으로 탄생된 것이다.


1908년 1월생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한반도 통일을 방해한 천년의 적 중국이 이제는 천년의 원수가 되어 금성전투에서 피아를 합쳐 수십만 명의 젊은이들을 사지로 몰아넣고 수만 명의 피를 적시게 한 정신 나간 공산주의자들의 집요하고 잔인함에 치를 떨고 할 말을 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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