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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해 록] 백년전쟁 47, 벌거벗은 포로들 1953

by 윤해


옷이라는 것이 무엇이길래 먹고 자는 것보다 앞에 있어 의식주이다. 3년 하고도 한 달이 넘게 피 터지고 치열하게 싸우다가 멈춘 전쟁, 6.25 전쟁은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정전협정이 발효됨으로써 멈추어 섰다.

전쟁이라는 지옥도는 거시사보다 미시사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전쟁의 거시사는 흥미진진한 서사가 될 수도 있지만 전쟁의 미시사는 최전선과 최후방을 가리지 않고 생사의 기로에서 헤매고 있는 보병과 피난민이 펼치는 백병전과 난장판의 모습으로 형상화되고 형해화된다.

전쟁의 시작은 어느 한 독재자의 야심과 망상이 적당히 어우러져 시작되었겠지만 그 독재자들은 무책임하고 평온하게 사라지거나 오히려 전쟁을 이용하여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며 천수를 누리는 것은 물론 자손대까지 대물림하면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반면 최전선에서 몸이 가루가 되도록 피아가 뒤섞여 싸우다가 전사하고 객사하는 이 땅의 민초들과 어둠의 자식들은 전쟁의 비극을 온몸으로 책임지는 미시사의 퍼즐을 완성하는 온전한 전쟁의 당사자였다.

정전협정은 과연 이 전쟁이 수백만명의 사상자와 한반도를 초토화한 전쟁이 맞는가 싶을 정도로 순식간에 양측이 협정문에 사인하고 돌아서는 것으로 한국전쟁의 거시사를 써내려 갔지만 거시사가 저질러 놓고 흩뿌려 헤친 수많은 미시사의 조각들을 하나하나 붙이고 나누고 잘라내고 봉합해야 할 지난한 작업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르락내리락했던 6.25 전쟁의 특성상 포로인 듯 포로가 아닌 듯 국군인 듯 북한군인 듯 북한출신의 국군 남한출신의 북한군, 이뿐만 아니라 중공군의 출신마저 공산당과 국민당으로 갈라져 있었다. 출신은 그래도 분류가 가능했으나 그들이 전쟁을 겪으면서 흔들리는 갈대처럼 바뀐 이념의 스펙트럼과 마음만큼은 설득과 회유로 쉽사리 분류할 수 없다는 것이 전쟁의 미시사를 써 내려가는 모두의 아픔이요 안타까움이었다.

망국과 독립전쟁, 건국과 6.25 전쟁 속에서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아무런 옷도 걸치지 않았지만 장밋빛 희망이라는 멋진 옷을 걸친 대한민국의 미래를 믿어 의심치 않았던 1908년 1월생이 마주한 초토화된 국토와 잘린 허리에 더해 정전협정 후 몇 달간에 걸친 포로교환의 현장은 이 세계와 저세계를 넘나들면서 어김없이 발생하는 겉옷과 신발을 벗고 내동댕이 치면서 교환되는 벌거벗은 포로들의 절규였다.

1953년 6월 8일 중립국송환위원회에 대한 권한위임사항을 포함한 포로송환협정이 체결되었다. 이에 따라 양측은 1953년 7월 22일 최종적인 포로숫자를 상호 통보하였고 유엔군사령부는 74000명(북한군 69000명, 중공군 5000명), 공산 측은 12,764명(한국군 8,186명, 유엔군 4,780명)이었다. 그리고 판문점에서 절규하고 시위했던 벌거벗은 포로들은 최소한 그들의 의사에 따라 그들이 원하는 조국으로 갈 수 있었다. 심지어 남도 북도 아닌 중립국을 선택한 88명도 그들 안에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라는 미시사의 비극은 판문점에 나타난 운 좋은 벌거벗은 포로가 아니라 조국을 위해 목숨을 내놓고 싸우다 적지에서 고립된 국군과 인민군의 운명이었다. 그들은 포로송환협정의 대상에서도 누락된 체 적지에서 붙잡혀, 죽을 때까지 삼수갑산의 탄광에서 강제노동을 하거나 재판도 없이 형무소에 수감되어 평생을 적국의 탄압과 감시 그리고 전쟁을 일으킨 독재자의 전쟁범죄라는 거시사를 오롯이 개인의 몫으로 뒤집어쓰면서 비극으로 점철된 전쟁의 미시사를 전쟁이 끝나고 난 뒤에도 숨이 붙어 있는 한 계속 써 내려가고 있었고 남과 북 어디에서도 그들을 애써 기억하려 하지 않았고 그렇게 그들은 비극적으로 잊혀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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