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가 문명을 일으켜 역사를 써 내려가면서 사악하지 않고 정의로운 때가 과연 얼마나 있었을까? 문명의 가장 큰 불일치가 일어나는 지점이 말과 글 그리고 행동이다. 말과 글은 행동으로 먹고 산다. 행동은 말과 글의 영향을 받지만 지배당하지 않을뿐더러 지배당해서도 안된다. 왜냐하면 그것이 말과 글로 이루어진 문명사회가 수학적 가정에 기반하여 이루어진 will이라는 의지 그리고 reason, 즉 이성이라고 하는 모호하고 추상적인 언어가 만들어낸 가상세계라는 점 때문이다.
이처럼 세상을 돌리게 하는 것은 행동에 기반한 사악함이 유능함으로 옮겨갈 때 가능한 것이지 선한 의지와 합리적 이성안에 머물러 있는 개인이나 국가는 공성은 엄두도 못 내고 수성만 하다가 서서히 내리막길로 들어선다.
세상은 인간을 쓰고 버린다. 하지만 쓰임 받은 인간이 세상의 승리자가 아니라 버려진 인간이야말로 세상의 탄압을 받으면서 더 사악해지고 유능해져서 마침내 세상 자체를 바꾸어 버리기 때문이다.
과거는 현재의 토대이며 거울이기도 하다. 1980년대 대한민국을 지배한 신군부는 사악하고 유능했다. 독립전쟁에서 당랑거철한 매헌 윤봉길 의사의 살신성인도, 혼군의 한성감옥에서 살아 돌아온 우남 이승만 대통령의 민주화를 향한 일편도, 해방정국의 여순반란에서 살아 돌아온 박정희 대통령의 산업화를 향한 단심도 , 살신 성인과 일편단심으로 먼저 달려가서 우리 민족과 강토에 짭짤한 소금이 되어 얼간을 뿌린 세 얼간이들이 이루어낸 대한민국이라는 배추포기를 익히고 발효해야 할 막중한 행동을 동반한 의무가 1980년대에 등장한 사악하고 유능한 신군부에게 주어졌고 그들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들의 사악함을 그대로 드러내어 그들의 유능함을 스스로 입증해가고 있었다.
매헌이 쏘아 올린 독립전쟁, 우남이 뿌리내린 민주화 그리고 박정희가 가지를 뻗은 산업화라고 하는 세 얼간이들이 얼간을 치고 키운 대한민국이라는 나무를 잘라서 땔깜으로 쓰고 나아가 땔깜을 장만하여 적에게 갖다 받치자는 매국세력의 정체를 미리 간파했던 사악했지만 유능했던 신군부는 자신들의 약점과 장점을 적절히 알고 이용하는 기지와 기민함으로 쿠데타를 성공시키고 독립과 건국 그리고 경제개발을 한 세 얼간이들의 유업을 완성시키면서 역설적으로 사악하면서도 유능했고 불의하면서도 정의로운 대한민국을 앞당기는데 일조했다.
비록 사악했던 신군부가 80년대를 틀어 쥐고 흔들었지만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라는 말처럼 30년대 준비했고 40년대 건국했고 50년대 재건했으며 60년대 출발했고 70년대 경제를 본 궤도에 올린 대한민국호가 돛을 높이 올리고 대양으로 나아가서 80년대를 번영시키겠다는 희망은 단순한 말과 글의 수사가 아니라 반세기를 관통한 대한민국 국민들의 염원이 모인 행동의 결과였고 신군부는 그러한 거스를 수 없는 역사적 명령을 몰라볼 바보는 아니었으며 오히려 식민지 청년출신의 산업화 세력보다 한층 더 실력자였으며 유능하기까지 하였다.
1908년 1월생은 1.4 후퇴로 떠나온 제2의 고향 서울이 한강의 기적을 이루며 대한민국 경제개발의 과실을 마음껏 향유하고 1986년 아시안 게임과 함께 꿈에 그리던 1988년 서울 올림픽마저 유치했다는 소식에 젊은 날 자신의 반평생을 보냈던 동숭동 교정과 신촌의 캠퍼스 그리고 포탄이 빗발쳤던 신촌의 야산 토굴이 묘하게 오버랩되면서 가뭄과 홍수가 반복되던 한강에 다리가 놓이고 유람선이 다니며 여의도와 영등포 그리고 뽕밭과 채소밭이 즐비했던 강남과 잠실이 상전벽해하여 경제개발의 단물이 마치 해일과 같이 서울을 바꾸고 있음을 그의 마지막 여행에서 확인하고 싶었다.
1985년은 특히 서울 개발의 대역사가 눈에 보이던 한 해였다. 서울지하철 3~4호선의 개통과 함께 건설된 동호대교, 동작대교의 개통과 63 빌딩의 완공이었다. 특히 신동아건설이 만든 63 빌딩은 종전 한국 최고층 빌딩이던 종로 삼일빌딩을 뛰어넘은 고층빌딩이었고 태양을 반사하는 금빛 외장재는 서울로 기차를 타고 진입하는 한강철교에서 바로 보이면서 서울의 랜드마크와 한강 기적의 상징물로써 다가올 86 아시안 게임과 88 올림픽의 성공을 담보할 수 있다는 믿음을 온 국민들에게 깊이 각인시켰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설렘과 영화가 상영되기 전의 묘한 떨림 그리고 큰 일을 치르기 직전의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대한민국, 특히 수도 서울을 감싸고 있었지만 반세기를 준비한 한국인들의 끈기와 의지는 과거 식민지로 주눅들며 전쟁으로 무너져 내린 그들이 아니라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근거 있는 자신감으로 무장된 사악하고 유능한 신군부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정의롭고 유능하며 희망으로 발랄하기까지 한 새로운 대한민국 국민으로 거듭나면서 한강종합개발로 이제는 가뭄도 홍수도 걱정 없고 호수 같은 강물에 유람선을 띄우며 대한민국 번영을 노래할 수 있다는 가능성으로 가득 찼던 서울의 모습을 1908년 1월생은 피부로 느끼고 눈으로 보면서 감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