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돌아오는 11월 11일은 일 년 중 유일하게 일이 네 번 반복되는 빼빼로 데이이다. 숫자 일처럼 생긴 막대기 과자에 현대 문명을 쥐락펴락할 정도의 파워를 가진 달콤한 초콜릿을 발라 가성비까지 갖춘 독보적 PX매출 1위 초코 파이와 함께 군인 아이 어른 가리지 않고 사랑을 받는 과자가 빼빼로이다.
왜 과자 이름을 빼빼로라고 지었는지는 모르나 작대기처럼 마른 외양이 빼빼하다는 순우리말과 이미지가 상통하고 과자 이름으로서 무슨 데이로 널리 불려지는 날은 빼빼로 데이 말고는 떠오르지 않는다. 비록 그것이 과자회사 홍보와 상술의 일환이었다 할지라도 대단한 일이다.
일이 네 번 반복되는 날에 현대의료의 모순점을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일일이 조목조목 짚어 보려고 한다. 그리고 이루 헤아릴 수도 없는 풍성한 현대의학적 경험이 환자의 생명과 삶의 질을 풍성하게 하는 대신 다국적 제약기업과 백신회사 그리고 대형병원의 몸집만 천문학적으로 키우고 진료의 핵심인 의사와 환자의 처지를 마치 빼빼로 과자처럼 빼빼 마르게 했는 가를 극명하게 보고 느낀 두 사건이 내 앞에 펼쳐졌다.
97년을 건강하게 사시고 10개월을 집에서 평안히 누워계시다가 잠자는 듯 경각에 임종하신 어머니, 그리고 그야말로 구구팔팔이삼사를 실현시킬 듯이 백수를 넘기신 장인어른 삶의 끄트머리에서 마주친 낙상 사고 후 고관절 골절과 뒤이은 수술 그리고 심정지와 CPR 처치 후 기도삽관에 이은 인공호흡 장치와 치렁치렁 매달린 생명연장 호스를 몸에 휘감고 힘겨운 생명유지 장치를 뒤집어쓴 모습으로 중환자실에서 사투를 벌이다가 보름 만에 돌아가신 두 부모님의 마지막은 자연사와 의료사 간의 극명한 차이를 내 몸으로 실감한 천붕天崩이자 지붕地崩이었다.
이처럼 현대의학은 전쟁의학에서 출발한 학문답게 실제 진료현장에 들어가 보면 죽음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바이탈 신호를 살리려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려고 달려들고 의사에게 있어 환자의 죽음은 곧 의료의 패배로 인식되는 분위기가 의료계를 지배하는 상식이 되어 버린 지 오래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의학은 모든 증상을 수치화했고 계량화 했으며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나누었고 점점 더 환자를 쳐다도 보지 않고 의료 장비가 가리키는 숫자를 보게 되었으며 급기야 이제는 수치화된 자료가 집적된 컴퓨터 모니터 화면만 뚫어지게 응시하면서 환자에게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검진결과의 숫자를 알려주면서 환자의 삶의 질은 도외시 한 채 오로지 죽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집중하면서 3분 진료를 이어나가고 있는 것이 우리가 병원을 방문해서 몇 시간의 대기 끝에 볼 수 있는 의사의 모습이다.
이러한 폭력적이고 일방적인 현대의학은 죽음을 무기로 환자와 의사를 볼모로 삼아 하면 안 되는 수많은 시술과 수술을 하게 되었고, 병원을 찾는 수많은 환자들의 만의 하나 심리를 이용하여 그 환자를 진료하는 의사들에게는 죽음은 의료의 패배라고 하는 잘못된 고정관념을 심어주었다.
탈은 벗기고 병은 뚫어주어야 한다는 탈도 많고 병도 많은 환자들에게 마치 탈이 나면 처방의 폭포수 PRESCRIPTION CASCADE를 퍼붓고 병이 나면 장기를 들어내는 수술 만능이라는 전쟁의학의 후예답게 처방을 남발하고 장기를 제거하는 수술 만능주의를 의료의 승리라 오인하면서 점점 더 환자의 처지를 미궁으로 빠트려 곤궁한 처지로 몰아가서 죽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하는 애매한 지옥도를 열면서 공룡의료 조직의 배만 불리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나 어렴풋이 짐작은 해도 선뜻 발설하지 못하면서 '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처럼 현대의료는 터부시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상태의 의료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늘려 놓는 데는 성공했지만 자연스러운 노화를 부정하고 노화마저 정복해야 할 질병으로 규정 지우면서 유한한 생명체 인간의 생사관 마저 왜곡시키고 나아가 세포 차원의 완벽함을 강요하면서 도달할 수 없는 기준점을 상상하고 설정하면서 의료의 대상인 인간을 보지 않고 순식간에 요동치는 바이탈 신호와 생체가 균형을 잡으려는 실상의 안간힘을 질병이라고 규정하고 인체가 균형을 잡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생체신호를 가상의 데이터로 치환하여 환자의 상태를 보고 관찰하는 진찰이 아닌 컴퓨터 모니터와 자판을 두드리는 것으로 진료실을 비롯한 의료환경은 급속히 바뀌었다.
현대의료의 현장은 건강보험, 장기요양 보험과 같은 공적 보험과 실손보험 간병보험 손해보험 등의 사적 보험이 한데 뒤엉켜 매달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막대하게 집행되는 보험금을 누가 더 빨리 가져가는 가라고 하는 치열한 치킨게임을 보는 듯하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이런 게임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온 국민을 대상으로 한 전통적 의료는 물론 백신 보건 그리고 미용 성형까지 비급여 의료까지 영역을 확대한 현대 의료는 국민 건강을 볼모로 영리를 극대화하는 본말전도의 의료환경을 만들고 있다.
호의가 지나치면 권리가 되듯이 환자와 의료인 그리고 초거대 의료조직 간의 힘의 균형은 기울어진 운동장을 지나 허물어진 운동장이 되어 가고 있다.
그리고 그 허물어진 운동장은 우리가 언제든지 환자복을 입고 걸어 들어가야 할 운동장이며 그 운동장 안에서 생로병사 라고 하는 모든 인생의 애환과 아픔 그리고 폭압적인 의료행위와 조우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모든 의료행위가 우리를 살리고자 하는 선의로 시작되었지만 그 포장된 선의를 감당하기에 우리들의 생체는 너무도 연약하며 질기기까지 하다. 몸의 소리와 기존의료에 세뇌된 생각과의 간극이 이렇게 심각할 줄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짐작도 못할 것이다.
중환자실 침상에 곧추 눕혀져 손가락 하나 까딱 하지 못하고 인공호흡에 의존하여 강제 생명유지 장치를 부지불식간에 환자의 온몸에 휘감아 끼워놓고, 빼면 살인이라고 의료악법을 들먹이며 죽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하는 환자의 곤궁한 처지에 촌철살인의 일침을 가하는 빌런과도 같은 현대의료를 그대로 외면하기에는 우리 가까이 현대의료가 너무 깊숙이 들어온 것은 아닐까? 현대의료에 대한 미몽과 세뇌에서 이제 벗어날 때도 되었다는 한숨과 탄식이 교차하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