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 <<실종자>> 독서 후기

by 오윤오

- 이번 글은 카프카의 '미완성' 장편소설 <<실종자>>를 읽고 적은 후기입니다. 편영수 역본으로 읽었습니다.

- 객관적인 기준보다는 개인적 취향과 인상을 토대로 편하게 감상을 남겨보았습니다.

- 책의 내용 전반을 언급하고 있어 열람에 주의를 요합니다. 스포일러를 원치 않는 분께서는 먼저 작품을 보고 읽어주세요!








카프카는 노동자재해보험공사에서 근무하던 관리였고, 글을 썼던 소설가였다. 그는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생전 카프카는 지인 브로트에게 모든 원고를 불태워 달라고 유언으로 부탁했다고 한다. 브로트의 배반으로써 카프카의 유고들은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장편소설 <<소송>>, <<성>>, <<아메리카>>는 카프카 사후 막스 브로트의 편집으로 연달아 출간되었다.


<<실종자>>는 독일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카를 로스만의 행적을 묘사한 소설이다. 이로써 위에 쓴 장편소설 셋을 전부 읽게 되었지만 <<소송>>과 <<성>>은 오래 전 읽어 기억이 분명하지 않다. <<실종자>>를 읽으며 나머지 작품을 읽을 때 느꼈던 것들이 조금씩 떠올랐다. 카프카의 소설은 읽는 내내 독자를 답답하게 만드는 분위기가 있다. 사건 비스무리한 무엇인가가 상세하게 묘사되는데, 그 ‘무엇인가’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파악할 수 없다. 파악해야 하는 것을 파악할 수 없음에서 오는 곤란함이 이번 실종자에서도 느껴졌다. 또 작품의 주인공이 겪게 되는 이야기가 분명한 기승전결 없이 어영부영한 듯한 느낌도 비슷했다.


완성되지 않은 세 장을 제외하면 <<실종자>>는 총 8장이다. 카프카는 그중 첫 번째 장(<화부>)을 따로 떼어서 발표한바 있다. 1장 <화부>는 장편소설의 도입인 동시에, 작가 공인의 독립된 단편인 셈이다. 1장의 구조와 장편 전체의 구조는 닮은 구석이 있다. 따라서 1장만을 따로 떼어 분석해서, 그것을 장편 전체의 이해에 참고하는 방법도 유효한 독법이라고 생각된다. 이 글에서 나는 1장을 대략적으로 요약해 보고, 그것을 작품 전반의 줄거리와 비교해 보려고 한다.



1장 요약 및 내용에 대한 추측


1장의 내용은 이러하다. 열일곱 카를 로스만은 서른 중반 먹은 하녀의 유혹에 빠져 그녀를 임신시키고 그 이유로 부모에게 쫓겨나 미국행 배에 탔다. 배가 미국에 도착하고 카를이 내리려는데 우산을 놓고 왔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트렁크를 갑판의 다른 이에게 맡기고 우산을 찾으러 배 아래로 내려간다. 우산을 찾으려다가 배에서 일하는 화부를 만나서, 찾아야 할 우산은 까맣게 잊고 화부와 대화를 나누게 된다. 카를은 대화를 통해 화부가 상사와의 불화로 쫓겨날 처지임을 알게 된다. 둘은 화부에게 내려진 처사가 부당하다고 항의하기 위해 선장을 찾아간다. 화부가 항의하고 카를은 거들어 보지만 그들의 말은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 와중에 카를은 그곳에 있는 사람 중 하나가 자기 외삼촌임을 알게 된다. 카를은 화부를 남겨 두고 외삼촌을 따라 배에서 내린다. 끝.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실종자표_0002.png 정정: "트렁크를 까먹고" -> "트렁크를 놔두고"


카를은 찾던 것도 잊고, 화부를 도와주던 것도 팽개치고 배를 떠나 삼촌과 함께 미국땅을 밟게 된다. 카를이 찾으려고 하는 것들, 즉 작품 내에서 카를의 행동 동기가 되던 목표들(우산, 화부)을 카를은 달성하지 못한다. 그런데, 1장을 포함해 이 작품에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다는 것의 의미는, 목표를 이루려고 노력하다가 좌절당한다는 뜻이 아니라 차라리 목표를 까먹어버린다는 쪽이다. 예컨대 카를은 작품 도중에 아무 노력도 없이 손쉽게 트렁크를 되찾게 되는데, 이는 트렁크 분실이 애초에 좌절할 만한 사건이 아니었다는 인상을 준다. 카를은 좌절하는 존재가 아니라, 한눈파는 존재라고 생각된다. 인생의 무게가 막중해 사람에게 좌절을 안겨 준다는 식의 전형적인 전개는 이 소설에 없고, 인생은 본디 산만해 잊혀짐의 연속이라고 소설은 말하고 싶은 듯했다.


또 하나 한가지 당황스러운 것은 1부 마지막에 볼 수 있는 카를의 반응이다. 카를은 삼촌을 따라 배에서 보트로 건너가면서 울음을 터뜨린다. 그 앞까지 읽으며 나는 카를이 눈물을 흘릴 만한 인물이라는 힌트가 될만한 대목을 찾을 수 없었고, 왜 우는지를 설명해 주는 부분도, 울 만한 사건도 찾을 수 없었다. 따라서 나는 이 눈물이 작품 내의 개연성을 초월해, 작가의 가진 의도를 위해, 흘러야만 했다고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카를은 왜 울었는가?’가 아니라, ‘눈물은 왜 흘렀는가?’가 보다 정확한 질문이라고 여겨진다. 나는 이 견해를 토대로 눈물의 의미를 이렇게저렇게 추측해보았다.


첫번째 추측: 눈물이 흐른 순간은 주변 일에 잘 휩슬리는 카를이, 잊고 있던 목표의식을 상기하고 좌절하는 몇 안 되는 순간이다. 우산이나 트렁크를 잊는 것은 물건을 깜빡하는 것 정도로 비교적 덜 중요한데, 그가 도우려고 했던 화부는 사람이기 때문에 안타까움을 느끼고 눈물을 흘리게 되었다.


두번째 추측: 도식을 통해 좀더 추상적인 추측을 시도해 볼 수 있다. 모든 잊힌 목적을 카를은 어쨌든 처음에는 추구하긴 했다. 그러나 마지막 목적인 외삼촌(혹은 ‘미국’)은 카를이 추구하려던 적이 없음에도 목적으로 카를 마음의 한자리를 차지한다. 카를은 외삼촌을 우연히 만나서 그 이후 한동한 그의 보호를 받으며 편한 생활을 하게 되는 횡재를 얻지만, 그것을 원한 적은 없다. 의도치 않은 목적이 카를의 동기를 채운 것, 그리고 그 목적에 자리를 뺏겨 화부라는 앞선 목적이 잊히게 된 것, 그것이 눈물을 흐르게끔 만들었다. 이 추측은 1부 마지막의, "이분이 과연 저 화부의 역할을 대신해 줄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을 품기도 했다(p.55)"라는 문장으로도 뒷받침할 수 있을 듯하다.(카프카를 소개하는 이런저런 글을 읽다보면 ‘실존주의’라는 단어가 곧잘 등장하는데, 이런 대목에서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다.) 카를이 화부를 도왔으면 도왔지 반대로 카를에게 있어 화부는 어떤 중요한 역할도 수행하지 않았다. 그래서 외삼촌이 대신할 화부의 역할이란 게 대체 뭔지, 소설 속 진술은 분명히 밝히고 있지 않아 일상적인 독법으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우연한 계기로 처음 만난 외삼촌이 ‘화부의 역할을 대신해 줄 수 있는지’를 카를은 대체 왜 고민하는지 분명치 않아서, 그 의미를 결국 사변적으로 탐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해당 문장은 외삼촌이라는 새로운 목적에 대한 카를 자신의 의구심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삽입된 문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두번째 추측을 받아들이면, 우리는 작품을 알레고리로 받아들이고 각 인물들을 무엇인가에 대한 은유로 파악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외삼촌을 ‘미국’의 은유로 생각해볼 수 있게 된다.


메모: 작품은 좇음과 쫓겨남의 반복을 거듭한다. 여기에 더해 작품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야기가 끝을 맺지 않고 계속된다는 혐의가 남아, 카를에게 매겨진 추구와 잊혀짐, 좇음과 쫓겨남의 반복이 강조되는 효과가 있다.



작품의 나머지 내용에 대한 요약과 추측


카를이 만난 삼촌 야코프는 운송회사를 운영하는 부자다. 카를은 그의 집에서 영어공부, 말 타는 방법 등을 배우며 지낸다. 야코프에게는 친구 폴룬더 씨와 그린 씨가 있다. 어느날 폴룬더 씨가 카를을 자기 집으로 초대하는데, 야코프 삼촌은 그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 카를은 폴룬더 씨를 따라가게 되고, 이후에 방문한 그린 씨를 만난다. 그린 씨는 외삼촌이 보낸 편지를 카를에게 전달해준다. 편지에는 삼촌의 생각을 거스르고 폴룬더 씨네 집에 놀러간 카를을 집에서 내쫓겠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그렇게 쫓겨난 카를은 한 여관에서 노동직을 찾아다니는 두 남자를 만난다. 한 명은 프랑스인이고 이름은 들라마르쉬이다. 한 명은 아일랜드인이고 이름은 로빈슨이다. 카를은 그들과 얘기하다가 두 남자를 따라 버터퍼드라는 지역에 가서, 그들이 알고 있다는 좋은 일자리를 같이 얻기로 한다. 그런데 그들은 돈이 없었고, 카를이 식비나 여비를 지출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행동한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중, 카를이 그들과 함께 먹을 점심을 구하기 위해 그들이 쉬는 사이 근처 호텔 식당을 홀로 찾아간다. 혼잡해서 음식을 구하지 못하는 와중에 호텔에서 일하는 여인을 만나 음식을 얻게 된다. 여인은 호텔 여주방장이었다. 그녀는 카를에게 호텔에서 일하는 것이 어떤지, 호텔에서 그날 밤을 묵는 것은 어떤지 따위를 권유한다. 카를은 음식을 가지고 두 사람에게 돌아가는데, 카를이 그들에게 맡겨둔 트렁크는 누군가가 뒤적거린 흔적으로 열려 있었다. 카를이 늦는다는 이유로 두 사람이 카를의 트렁크에 손댄 것이다. 카를은 그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고 트렁크를 정리하다가,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족사진이 없어졌음을 알게 된다. 카를은 두 사람을 버리고 호텔에서 일하기로 결심한다.


카를은 호텔의 엘리베이터 보이가 된다. 한동한 열심히 일을 하며 지내는데, 로빈슨이 그를 찾아온다. 로빈슨은 카를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부탁하더니, 술에 취해서인지 브랜디 냄새를 잔뜩 풍기다가 결국 그 자리에서 오바이트를 한다. 카를은 돈을 주고 로빈슨에게 떠나라고 재촉하지만 로빈슨은 말을 듣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그를 자신의 숙소에 데려다 놓고 다시 일을 하러 오는데, 마침 지나가던 그의 상사가 카를이 자리를 비웠던 것을 보고 그를 해고한다. 이런저런 변명과 항의를 해 보지만, 그가 외부인인 로빈슨을 직원 숙소에 데리고 왔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되려 해고는 확실해진다.


호텔 여주방장은 카를에게 일자리를 따로 구해주겠노라며 갈 곳을 정해 주지만, 카를은 로빈슨을 따라 들라마르쉬가 있는 곳으로 간다. 들라마르쉬는 전직 여가수 브루넬다와 함께 살고 있었고, 로빈슨은 그 커플의 하인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 세 사람은 카를에게 그도 하인으로 일해야 한다고 강요한다. 카를은 하인이 되기로 결심한다.


여기까지가 완성된 장들의 요약이며, 작가가 쓰다 만 세 장을 참고하면 나중에 카를이 다른 두 남자와 함께 브루넬다를 이고 이사를 한다는 것(브루넬다는 혼자서 행동하는 일이 없고, 목욕부터 해서 모든 것을 다른 사람이 해준다), 나중에는 그들을 떠나 다른 지역에서 새 일자리를 구하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글을 읽어내려가면서 나는 1부에서 발견한 구조가 반복되고 있음을 느꼈다. 크고 작은 변주는 있으나, ‘무엇인가를 하려다가, 원래 하려던 것을 잊는다’는 기본적인 모티프의 반복으로 소설이 진행된다는 점은 변함없다. 이 모티프는 ‘새로운 직장을 납득하기 어려운 계기로 얻게 되어, 이전 직장에서의 부당한 해고를 신경쓰지 않는다’는 보다 구체적인 상황으로 발전되어 나타난다. 살펴보면, 그가 얻는 직장들은 애초에 그가 적극적으로 원해서 얻은 직장이라고 보기가 어렵다. 아무 노력도 없이 얻게 된 물건이 간절히 원해서 얻은 물건보다 더 쉽게 분실되는 것처럼, 그의 느닷없는 취직은 느닷없는 해고로써 상쇄된다. 그리고 이 느닷없는 해고는 다시 느닷없는 취직으로 이어지면서 읽는 나에게 갑갑함을 주었다.


‘떡밥’이라는 요샛말이 있다. 책이든 영화든 이야기를 가진 매체에서 사람들의 흥미를 확 잡아끄는 소재나 장치들을, 마치 물고기를 유혹하는 떡밥 같다고 해서 일컬을 때 쓰는 말이다. 떡밥에도 미덕이 있는데, 사람들은 이 떡밥이 ‘얼마나 잘 회수되느냐’를 가지고 떡밥의 최종적인 가치를 따지고 나아가서는 작품의 수준을 평가한다. 아무리 떡밥의 맛과 향기가 좋아도 그것을 문 독자들을 수면 위로 끌어낼 정도의 완력이 없으면, 좋은 작품이 되기는 어렵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실종자>>를 떡밥과 회수의 관점으로 바라본다면 떡밥만 주구장창 던지고 그것을 전혀 회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소 실망스러운 작품으로 비친다. 한 떡밥에서 다른 떡밥으로, 독자인 나는 마치 카를처럼, 떡밥을 먹고 또 먹으면서 이야기를 따라가보지만 작품 전반을 통해 가지게 되는 허기를 끝내 달랠 수는 없었다. 이 작품에는 ‘클라이맥스’나 ‘파토스’, 혹은 ‘카타르시스’라는 말로 치하할 만한 부분이 보이지 않는다.


써놓고 보니, 이 독서 후기를 읽는 사람들은 대체 책이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인지 내 조악한 요약으로는 갈피를 잡기 어려울 것 같다. 나는 다만 한가지 교훈적인 감상으로써 이 아리송한 작품의 의미를 정리해보려고 한다. 어떤 일의 시작이 내가 원한 것이 아닌 경우에, 안 그래도 게으른 나는 그 일을 너무 태만하게 처리하는 경향이 있다. 이 태만함은 일을 열심히 해치우지 않는다는 점에서뿐만 아니라, 왜 그 일을 해야 하는지를 제대로 점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해당된다. 그런데 모든 사람은 원치 않은 시작을 한다. 바로 자기 자신의 탄생이다. 다들 원치 않은 시작을 했지만 대처는 사람마다 다르다. 태만한 사람도 있고, 부지런한 사람도 있으며, 한편으론 카를 같은 사람도 있다. 카를은 주어진 일을 나름 부지런하게 수행하는 편이지만, 주어진 일에 대한 반성적인 점검은 시도하지 않는다. 이것이 카를을 우왕좌왕하게 만드는 원인이라고 생각된다. 카를처럼 내게도 목표의식이 끊임없이 생기는데, 그것을 부지런하게 점검하지 않는다면, 이 책을 읽으며 느낀 답답함을 인생에서 쫓아낼 방법은 없을 것만 같다. 점검되지 않은 목적에 끌려다니다 보면 카를처럼 헤매고 말 것이니, 맹목적으로 근면해서는 안 되고 의미를 탐색하려는 시도도 계속되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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