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에 대한 만화
이번에 읽은 <<만화의 이해>>는 재미있는 만화가 어떻게 재밌는 것인지, 왜 재밌는지를 조리 있게 말하고 싶다는 바람으로 중고서점에서 골라잡았다. 만화를 설명하는 만화라는 독특함도 눈길을 끌었다. 그러나 정확한 지식의 습득을 통해 독서의 목적을 달성한 것은 아니고, 책의 주장을 비판적으로 검토해 보면서 만화를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는 데 의의를 두고 있다.
<<만화의 이해>>는 만화에 대한 정의, 만화의 역사, 만화가 시간의 흐름을 다루는 방식, 컷과 컷 사이에 일어나는 일, 만화가 인물과 동작을 만화적으로 표현하는 방식, 색의 활용 방식 등을 탐구한다. 만화를 고유한 장르로 긍정하는 탐구들이다. 한편으로 <<만화의 이해>>는 전통 미술 사조의 흐름을 소개하고, 그것을 만화와 비교대조하며, 예술 작품의 제작 과정을 간략히 소개하고, 만화 또한 그 과정을 따르고 있다고 주장한다. 만화가 어엿한 예술로서 문학이나 소위 ‘정통미술’이라 하는 형식과 대등함을 긍정하는 작업이다. 즉 <<만화의 이해>>는 만화만의 예술적 특징과, 만화가 다른 장르와 공유하는 예술적 특징을 양쪽으로 논하는 책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비평적으로 소외되어 있던 만화를 예술적 논의의 장으로 끌어오려는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다.
내가 책을 읽기 전에 기대했던 것은 대중적 만화에 으레 사용되는 각종 기법들의 세목이었으나, 실제 제시되는 것은 만화가 예술로 성립하는 방식에 대한 주장이다. 기대한 것은 일종의 각론이었으나, 실제로 읽은 것은 원론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 원론적 이론 또한 탄탄한 논증이나 과학적 방법을 통해 정초되었다 볼 수는 없었고, 다소간 저자의 경험이나 추측에 기대고 있다.
작가가 ‘카툰화’로 불리는 만화의 기법에 대해 어떻게 논술하고 있는지를 보자. 보다 사실에 가깝게 그리는 기법을 사실화라 한다면, 보다 사실에서 멀어지고 간략하게 그리는 기법을 카툰화라 이른다. 얼굴을 사진처럼 세밀하게 묘사하면 사실화고, 마치 ‘이모티콘’처럼 눈코입 위주로 추상화해 표현하면 카툰화다. 저자는 여기서 더 나아가, 얼굴을 카툰화로 표현하면 사실화로 표현할 때보다 인물에 대한 독자의 이입이 더 수월해진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 원리 또한 제시하고 있는데, 독자가 카툰화의 추상화된 얼굴을 자기 얼굴의 추상으로 쉽게 받아들일 수 있어서 카툰화 캐릭터와 스스로를 동일시하기가 좋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매력적인 이론이지만, 분명한 추론이나 과학적 통계적 논거로 뒷받침되지 아니하고 있기에 비판적으로 수용해야 할 주장이다. 저자의 주장대로라면 예컨대 <<슬램덩크>> 속 강백호의 얼굴보다는 <<크레용 신짱>> 속 짱구의 얼굴이 독자의 이입(동일시)을 이끌어내기 용이하다는 것인데, 냉큼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둘 모두 충분히 몰입할 만한 캐릭터 조형이라는 데까지는 인정할 수 있으나, '강백호의 얼굴보다 짱구의 얼굴이 본질적으로 더 몰입하기 좋다'는 판단으로는 나아갈 수 없었다. 어떤 캐릭터의 조형 그 자체에 독자의 이입을 이끌어낼 가능성의 정도가 미리 정해질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나는 만화 <<피너츠>>를 감상한 적이 없다. 다만 <<피너츠>> 속 찰리 브라운의 얼굴이 그려진 머그컵을 본 적이 있다. 그것을 보고 드는 감각은 ‘귀엽다’ 정도로, 카툰화로 추상화된 이 캐릭터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아내려는 일말의 경향성이 있었는지는 의심스럽다. 그저 귀여운 소년의 그림으로서 머그컵 속 캐릭터는 인지되었을 뿐이었다. 머그컵만 보고서는 그 캐릭터가 몰입해야 할 만화 속 인물이라는 것조차도 분명히 자각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나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캐릭터인 호크아이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 캐릭터 이미지만 보면, 호크아이가 찰리 브라운보다 ‘더 사실적으로 묘사된’ 캐릭터라는 데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그 두 캐릭터를 이야기(만화) 속의 캐릭터로 접한 적 없는 내 입장에서, 즉 두 캐릭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입장에서, 호크아이보다 찰리 브라운에 더 쉽게 이입하는 경향이 내겐 없어보인다. 귀엽고 매력적인 캐릭터군, 하고 생각이 들 뿐이다. 굳이 따지면 오히려 리얼하게 그려진 호크아이의 모습이 나라는 인간과 좀더 비슷해서 몰입할 만해 보인다. 작은 체구에 어딘가 멍한 듯한 표정을 한 찰리 브라운의 데포르메에 나는 동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만화 속 캐릭터로 만날 때야 찰리 브라운과 호크아이는 이입의 대상이 될 것이며, 그 전까지는 둘 모두 타자일 뿐이다. 둘 중 어느 쪽이 ‘덜 타자’인지를 그 외형의 카툰화된 정도로 판단할 수 있다는 의견에, 내 경험과 직관을 버리고까지 동의해야 할 좋은 근거를 이 책에서 찾을 수는 없었다. 내 생각에 조형된 캐릭터가 독자의 동일시를 이끄는 것은 ‘주인공다움’으로 보이는데, 그것은 캐릭터가 이야기 속에 배치된 다음에야 생겨나는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저자가 제기하는 주장과 근거는 말하자면 심오한 논의라고 할 수 있는데, 깊이 있는 논의일수록 호시우보의 접근이 중요해지지만 이 책에서는 다소의 비약을 감수하고 있는바, 250페이지가 채 되지 않는 분량 속에서 만화를 만화로써 개론하려는 야심의 한계라 할 수 있겠다. 앞에서 예시로 든 설명에 사용된 추측의 탐구 방식이 거듭 시도되고 있기 때문에, 흥미롭게 읽는 한편으로는 '가설들의 나열'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독자가 안심하고 수용해도 좋은 만화비평의 정론이라고 할 수는 없을 듯하다. 그런 점에서는 책의 말미에 수록된 역자의 비판적 해설이 독서의 균형을 찾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 책이 90년대 초반에 처음 발간되어 만화라는 비평의 불모지에 뛰어든 모험적 작품임을 독자는 감안해야 할 것 같다. 본서가 만화만의 예술성을 논구하려 하면서도 소위 정통미술의 비평언어에 기대고, 문학을 거론하며, 철학적 논의를 끌어오고 있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2020년대의 독자인 내 입장에서, 만화가 그 자체로 독립적인 예술 장르로 충분하다는 생각은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그렇기에 만화가 저급한 예술이 아니라는 것을 거듭 주장하고 있는 본서의 구호는 당연한 것이어서 사족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이는 계몽주의적인 태도를 내세우는 작품에 대한 나의 거부감 때문에 더욱 아쉽게 느껴진다. 그래도 방대한 예시를 그때그때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방식은 ‘만화에 대한 만화’라는 독특한 형식만이 가질 수 있는 장점이며, 특정 기법의 사용빈도를 통계로 제시하려는 과학적 방법론이 시도된 파트도 마음에 들었다. 서구 만화의 역사에 대한 개관도 한일 만화에 익숙한 입장에서 새로운 배움이었다. 무엇보다도 나는 이 만화가 주장을 얼버무리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높이 사고 있다. 정확성을 기해야 하는 논의에 있어 언제나 선명한 오답은 선문답보다 좋다고 나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책이 오답투성이란 뜻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