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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희 Feb 28. 2024

기묘한 책

저주토끼(정보라)

“선생님, 도서관에 <꼭두각시 살인사건> 있어요?”

벌써 다섯 번째 요청이다. 도서관 업무를 담당한 첫 해, 채 3주도 지나기 전에 꾸준히 요청이 들어오는 책이 있었다. 꼭두각시가 뭔데 왜 그렇게 살인을 저지르는 건지 당체 알 수 없었지만 아이들 뿐만 아니라 선생님들과 행정실 주무관님들에 이르기까지 온통 살인 청부업자처럼 '살인사건'을 찾아다니니 궁금해질 밖에. 명색이 일 년에 백 여권 씩 꼬박꼬박 책을 읽어 온 멸종 위기의 독서인으로서 다니엘 콜의 '살인사건' 시리즈의 존재를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이토록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워낙에 스릴러 장르를 싫어하기도 했고 안 그래도 이상한 세상 속에 살며 부러 잔인한 이야기를 읽고 싶지는 않았기에 관심을 둔 적이 없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의 관심이 이토록 뜨거우니 나도 모르게 그 내용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아니, 사람들은 왜 그렇게 스릴러 장르를 좋아할까? TV 프로그램에 이어 책에 이르기까지 온통 핏빛으로 물든 이야기들, 서사라고 하기에는 개연성이 떨어지고 특수하고 기묘한 상황만이 도드라지는, 배경 설정과 개연성이 떨어지는 인물들은 왜 이다지도 많은 이들에게 강하게 어필할까? 그 해답은 책의 존재 이유에서 찾을 수 있다.



책은 왜 존재하는가? 문자의 탄생으로 인해 한 시대를 풍미하는 지혜나 지식이 후대로 이어져 축적될 수 있게 되었고 그렇게 오랜 세월 책은 지혜를 전하고 거인의 어깨를 마련해 주는 발판이 되어 왔다. 그것이 바로 책과 책을 읽는 사람이 그토록 존중받으며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지식을 전달할 수 있는 수단이라는 가치만으로 책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다양한 매체로 지식을 배울 수 있는 현대 사회에는 더 이상 생존 가치가 없는 물건일 수밖에 없다. 또한 그렇게 엄중하고 재미없는 교과서적인 목적에서라면 그토록 오랜 시간 인기를 누리며 영향력 있는 매체가 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중세에도, 근대에도, 현대에도 책을 읽는 가장 대중적인 목적은 바로 재미, 곧 유흥을 위함이었다. 스릴러는 책의 유희론적 목적에 부응하는 장르다. 책을 읽는 동안 독자들은 주인공에 몰입하여 흡사 안전장치를 가득 매달고 놀이기구에 올라타듯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혹은 존재하지 않기에 흥미로울 수 있는 공포감을 느끼며 온몸을 전율케 하는 재미에 빠진다. 또한 이 책들은 공격성을 거세당한 현대인들이 현실에서는 강하게 저항받을 잔혹한 서사를 합법적으로 즐기며 일종의 대리만족에서 오는 쾌락을 느낄 수 있게 하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출처 : 언스플래쉬


우리가 스릴러를 즐기는 두 번째 이유는 그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강한 상징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스릴러의 등장인물들은 현실에서 존재하는 부정적인 인물 군상들을 상징하거나 때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가장 몰입할 수 있는 부자와 빈자를 상징하기도 한다. 또는 자연과 환경오염을 행하는 인류, 힘과 경제력이 없어 괴롭힘을 당하는 인물들과 그들을 괴롭힘으로써 재미를 느끼는 반동인물 등을 집약적으로 표현하는 상징적인 인물들이 스릴러에는 즐겨 등장한다. 그리고 현실에서는 결코 쉽지 않은 부정적 인물들의 몰락을 보며 실현되지 못하는 평등이나 정의에 대한 대리 만족을 하게끔 유도한다.


이처럼 스릴러는 인간의 근본적인 욕구나 불안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우리를 일정 부분 쾌락에 젖게 하고 그 상당한 몰입감으로 독서에의 관심과 만족도를 끌어올려주니 태생부터 매력을 지닌 흥행의 보증 수표와도 같은 장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지나치게 잔인하고 피비린내 나는 이야기들을 중학생에게 선뜻 내밀 수 있을 것인가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이다. 하지만 중학생들의 독서에 대한 글을 쓰면서 그들이 제일 좋아하는 책들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아마도 우리는 아이들이 경쟁하듯 읽어 내려가는 잔혹 서사를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 문은 일개 교사나 부모가
억지로 막는다 해서
닫힐 수 없는 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조금 더 안전한 문을
열어주자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쓰기로 했다.



저주토끼(정보라)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올라 관심을 받았던 정보라 작가의 <저주토끼>이다. 표제작 저주토끼 외에 10편의 단편 소설로 구성된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서툰 독서가였던 한 아이의 추천에 의해서였다. ‘책을 좋아하지 않지만 이 책은 너무 재밌어요. 선생님도 꼭 읽어 보세요.’ 조심스레 건네던 손길에 내용이 궁금해져 읽기 시작했고 책을 덮을 때까지 멈출 수 없었다.  

“저주에 쓰이는 물건일수록 예쁘게 만들어야 하는 법이다.”
할아버지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 저주토끼(정보라) p.9

이토록 매력적인 서두를 읽고 발을 빼기는 어려웠다. 이 책을 읽고 이 이야기들만이 가진 매력, 다른 잔혹 동화들과의 두드러진 차이점이 무엇일까 생각했다. 한 편 한 편을 읽으며 씁쓸하고 허망한 마음에 괴로워하고 눈물짓다가 인과 없이 잔혹한 장면이나 공포를 즐기려 쓰인 여타 소설과는 달리 어디에도 기댈 곳 없는 사회적 약자들의 마음이, 그들의 아픔과 분노가 스며들어 있다는 것이 이 책의 특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판타지나 스릴러, 공포의 차양을 두른 뒤에야 비로소 토해내듯 전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를 통해서만 화를 내고 마침내 폭발시킬 수 있는 감정과 이야기가.  


https://youtu.be/PEnUaFjQis0

출처 : 인플루엔셜 유튜브 채널


스릴러나 범죄, 잔혹 동화를
읽지 않는 세상을 꿈꾼다.
현실에서 부유하다가
잔혹한 판타지 안에서만 해결되는 감정이
사라지는 세상을 꿈꾼다.
그러나 그런 세상을 꿈꾸는 일이야말로
판타지일지도 모른다.

판타지 같은 아름다운 세상이
쉽게 펼쳐지지 않는 한
우리 곁에서 사라지지 않을 이 장르에서  
위안받는 아이들이
조금은 덜 아프기를 바라며
오늘도 도서관 문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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