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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수정 Nov 14. 2023

가드니아 2

[단편소설] 2023년 아르코 창작기금 선정작


경자는 이불을 끌어안고 기다시피 거실로 들어와 누웠다. 채광이 좋지 않은 거실은 어두웠다. 죽은 벌레가 유리 안으로 쌓여 얼룩덜룩한 거실 등이 보였다. 경자는 자주 그 모양이 바뀌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그 모양은 남편이 퉁박을 주던 자신의 삐뚤빼뚤한 글씨 같았다. 자신도 시간이 지나면 알아볼 수 없는 글자. 가슴이 조여들고 자꾸 몸이 아래로 가라앉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간신히 일어서서 서랍장을 열었다. 빨간색의 액상 우황청심원병이 빼곡했다. 떨리는 손으로 병 뚜껑을 열었다. 쌉싸름한 액체를 삼키자 조금 살 것 같았다. 숨을 골랐다. 들숨 날숨. 들숨 날숨. 의사가 가르쳐 준 대로 깊은숨을 내쉬고 들이켰다. 그래도 숨 쉬기가 버거웠다. 다시 우황청심원 병을 따서 마셨다. 이불을 깊이 끌어안았다. 치자꽃 냄새가 났다. 팽팽했던 신경의 끈들이 조금씩 느슨해지는 느낌이었다. 손가락 하나도 들어 올릴 수 없을 만큼 몸은 노곤해졌지만, 정신은 말짱해졌다. 몸은 바닥으로 한없이 가라앉는데 생각은 바늘처럼 또렷해지는 느낌. 경자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부딪혔다 떨어지는 눈꺼풀의 감각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죽을 뻔했다.

 경자는 몸을 떨며 그 순간을 기억했다. 몸이 불현듯 휘청이던 순간 온 세계가 멈췄다. 눅눅한 공기 속 불어오던 한줄기 바람도 이마로 들러붙던 성가신 머리카락도 아프던 팔다리도 다 사라지고 오로지 한가지의 느낌만 벼려졌다. 죽음. 경자는 몇 번이고 베란다에서 몸을 내밀고 이불을 털다가 중심을 잃고 휘청대던 순간의 공기 흐름과 주변의 빛깔, 소리 같은 걸 기억하고 또 기억했다. 


 경자에게 죽음은 쌓인 시간의 당연한 결과였다. 시어머니가 그랬고 남편이 그랬다. 그들은 주어진 시간을 느릿하게 유영하다 못내 아쉬운 얼굴로 끌려가듯 떠났다. 경자는 그 두 사람을 보며 자신은 산뜻하게 세상과 작별하리라 생각했었다. 누구에게도 애원하지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고 죽음을 맞으리라고 생각했다. 

 경자는 오늘의 경험이 특별했다. 누군가와 나누거나 어디엔가 기록해두고 싶었다. 처음 죽음을 느낀 순간.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 순간.


 박경자 님이 평소에 하시는 생각을 적어두시는 것도 도움이 되죠.

 상담사의 말을 떠올리며 더듬더듬 노트를 찾았다.

 노트엔 삐뚤빼뚤한 글씨로 칸을 넘나들며 써놓은 글씨가 가득했다. 경자는 죽음이라고 쓰려 했지만,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떨리는 손으로 헛손질을 몇 번 하다가 결국 쓴 글씨는 가드니아였다. 가드니아. 해독되지 않는 이름.       


 전화벨이 울렸다. 경자는 흠흠 목소리를 가다듬고 전화를 받았다. 아들이었다.

 그래. 별일 없지?

 똑같죠. 뭐.

 일은 안 힘들고?

 네.

 난 괜찮아.

 경자는 새된 목소리로 묻지도 않은 안부를 전했다.

 나 죽을 뻔했어. 라는 말이 목구멍을 간질였으나 나오지 않았다.


 아들은 침묵했다. 둘 사이의 대화는 늘 이어지기 어려웠다. 아들은 철이 들고 나서부터 경자에게 예의 바른 빚쟁이처럼 행동했다. 경자는 남편이 자신에게 하듯 ‘무조건 참으라’는 말을 자주 했을 뿐인데 자신을 연민하지도 않는 아들이 서운했다. 아들은 혼자 세상에 태어나 혼자 큰 아이처럼 굴었다. 딱 한 번 감정을 표현한 적이 있었는데 남편이 죽고 경자가 구청 복지과 직원의 권유로 아파트 역모기지론을 신청한 걸 알게 되었을 때였다. 아들은 참 어지간하시네요, 라고 씹어뱉듯 말했다. 꽉 깨문 턱 근육이 바르르 떨리는 것을 보며 경자는 감정을 드러내는 아들이 신기해서 눈을 떼지 못했다.

 침묵이 이어졌다. 할 말이 없어도 먼저 끊지 못하는 아들의 성미가 자신과 닮은 점이라고 생각했다. 별로 달갑지는 않았다. 나 죽을 뻔했어. 여전히 목구멍 속으로 그 말이 뱅글뱅글 돌았으나 나오지 않았다. 경자는 겨우 긁어내듯 말을 뱉었다.

 궁금해서 걸었어.


 경자는 말을 뱉고는 풋 웃었다. 그녀는 늘 아들의 전화를 이편에서 받아도 버릇처럼 궁금해서 걸었다고 했다. 다시 한번 까르르 웃었다. 한번 터진 웃음은 경자의 의지와 상관없이 앞으로 굴러나갔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아들이 말했다.

 이따 잠깐 들를게요.


 경자는 잠깐 반가웠으나 곧 귀찮아졌다. 아들은 두 달에 한번정도 집에 잠깐 들르는 것으로 자식의 의무를 다 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들과 무슨 말을 하고 무슨 일을 할 것인가. 경자는 아들의 방문을 거절하려 했으나 전화는 끊긴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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