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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를리너 Apr 19. 2024

독일인과 사랑학개론(1)

그를 처음 만난 건 ‘통계학’ 수업 때였다.

내 생애 독일 남자들이 득시글한 수업을 들은 건 처음이었을 것이다. 독일인들은 옆 사람이 북을 치든 장구를 치든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자신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한. 그런 의미에서 난 존재감이 없었다.

해감 안 한 조개를 먹는 것처럼, 입속 가득 모래가 차 있는 이물감을 느꼈다. 동급생들과 섞여 수업에 앉아 있었다.

되도록 눈에 띄지 않게 있다가, 수업이 끝나면 홀연히 사라지고 싶었다. 까만 눈동자와, 까만 머리는 이미 한 번의 눈길을 낚아채기 때문이다.

수학은 고등학교 졸업 이후 다시 만날 일이 없을 줄 알았건만. 교재에 잔뜩 묻어서, 별세계로 보내는 수학 공식들과 계산 문제들에 어질어질했다.

다른 과목은 어떻게든 혼자 해결했다. 주변에 친해진 독일 여자친구들에게 물어보든, 노트를 빌리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통계학’ 수업은 친한 여자친구들도 쩔쩔매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조교를 맡고 있는 독일 남학생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벤 이 문제는 어떻게 풀지?”
난 쭈뼛거리며 다가갔다.
“아, 이거! 내가 알려줄게!”
경쾌한 남부 사투리를 섞어가며 열심히 나를 가르치는 벤.
내가 좋아하는 헤어스타일이다. 굵은 웨이브 파마에 어깨까지 내려뜨린 단발 갈색 머리. 자유롭고 개성 있어 보인다. 내가 열심히 배우고자 하니, 벤 역시 기분 좋아 보인다.
“이제 조금 이해했어. 다행이다.”

"다행이다. (Gott sei Dank 곧 자이 당크; ‘직역하면 하나님 덕분, 하나님 계셔서 다행’이라는 뜻)라는 말이 한국에도 있니?”
남부 독일 출신으로 가톨릭 신자인 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다. 
나에게 질문을 하는 벤을 보니 웃음이 피식 난다. 그의 눈에 머나먼 한국서 온 여학생이 통계학을 배우는 것이 무척 신기했나 보다. 쉬는 시간이 끝나는 줄도 모르고, 열심히 가르쳐 주는 벤을 보니 정말 고맙다. 통계학에 대한 두려움이 조금씩 사라지는 듯하다.
이성적인 감정이 느껴지는 포인트다. 첫 번째, 상대는 내가 모르는 분야를 잘 알고 있다.
두 번째, 상대가 나의 어려움을 공감하고 도와준다.
이제 도리어 통계학 시간이 즐거워진다.
전쟁터에서도 사랑은 꽃피운다고 했나? 우크라이나 전쟁 중 군복을 입고 결혼식을 올리는 커플 사진이 떠오른다. 고통스러운 시간을 함께한 사람들에게 진하게 느껴지는 전우애가 있다. 독일 동급생들도 줄줄이 사탕처럼 떨어지는 악명 높은 ‘통계학 시험’을 준비하며 사랑을 느끼게 될 줄이야. 사람 일은 정말 알 수가 없다.


그렇지만 거의 스승이나 마찬가지인 조교에게 관심을 표현할 방법이 없다. 모르는 문제를 물어봐서, 한 번 더 귀엽고 하얀 얼굴을 보는 것뿐인데. 이 방법이 먹힐지 자신이 없다. ‘나 수포자요’라고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백하는 건데. 이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한편으로는 통계학 시험이 얼마 남지 않은 나에게 선택권은 많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멘자(Mensa; 학생 식당)에서 벤을 정면으로 마주할 일이 생겼다. 바로 수학 건물이다. 맛없는 멘자 중 독보적인 인기를 누리던 곳이다.

벤이 혼자 앉아 있는 곳으로 식판을 들고 걸어갔다.

“안녕? 옆에 앉아도 될까?”

벤이 나를 쳐다본다. 순간 숨이 막힐 것 같다.

“수학 문제 물어보려는 거 아니야. 걱정하지 마.”

이 말을 하려고 하는데 입속에서 말이 우물우물 씹히고 나오질 않는다.  벤이 굉장히 의외의 표정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 그래, 그럼! 맛있게 먹어!”

역시 자유로운 헤어스타일답게, 유연하게 대답한다.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너희들은 쌀밥이 주식이지?”

벤이 어색한 분위기를 깨고 나에게 묻는다.

“응, 근데 이 쌀은 동남아 쌀이라 찰기가 없어, 우리는 찰진 쌀이야. 느낌이 달라. 쌀밥을 젓가락으로 떠먹을 수도 있어. 스테인리스 재질로 만든 젓가락으로.”

“아, 정말? 젓가락으로! 스테인리스 젓가락 멋진데?”

벤은 의외의 주제에 관심을 보인다. 스테인리스 젓가락 이야기로 남자의 관심을 끌 수 있다니.

“나도 아시안 음식 좋아해. 그런데 항상 나무젓가락으로 먹지.”

“원한다면 내가 스테인리스로 된 한국식 젓가락을 선물할 수 있어!”

벤이 관심을 보이자, 난 자제를 못 하고 젓가락 선물로 마음을 보이고 말았다.

이미 뱉어놓은 말은 다시 돌릴 수 없다. 난 깨작깨작 찰기 없는 베트남 쌀알을 포크로 집어 먹었다.

“하하하 정말 고마워! 스테인리스 젓가락이라, 처음 보는 건데 멋지다!”

벤은 고마워! 미안해!라는 표현을 정말 잘했다. 그뿐 아니라 좋은 건 좋다, 멋지다, 훌륭하다며 환호한다. 이렇게 표현력 좋은 남자는 처음이다. 

그런데 언제 젓가락을 전해주지?

산 넘어 산. 뭐 하나 해결되면, 다음이 걱정이다. 젓가락 주겠다고 따로 만나자고 할 수도 없고,

“다음 달 제메스터 파트 (Semesterfahrt) 갈 거니?”

벤이 묻는다. 

아 제메스터 파트!! 판을 깔아주다니! 학교에서 학기 중이나 학기가 끝난 후 학생들과 함께 가는 소풍이다. 한국으로 말하자면 MT! 교외로 가서 팀워크를 다지고 서로 교류를 나누는 기회.

“Servus(*)! 벤. 뭐 해? 밥 다 먹었어? 과제는 다 걷었어?”
벤에게 제메스터 파트에서 젓가락을 전해줄 상상을 했다. 마법의 양탄자를 타고 훨훨 날아가고 있는데 옆에서 당찬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불안감을 감추며 얼굴을 들었다.
아뿔싸! 벤과 같이 통계학 조교를 맡고 있는 리자다. 역시 남부 독일 출신, 170cm는 족히 넘는 늘씬하게 큰 키에 뿔테안경을 끼고 있다. 자신감이 충만하고 통계학 조교를 맡을 만큼 학업 실력도 출중하다.
항상 벤과 함께 붙어 다닌다. 리자도 Semesterfahrt를 갈 텐데. 별로 친하지 않고, 차갑게 구는 리자가 어렵고 편하지 않다.
1+1도 아니고, 리자는 어떡하지?
또 다른 고민이 스멀스멀 기어오른다.


* Servus (쎄부스) : 안녕! 잘 가! 주로 남부 독일에서 쓰는 인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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