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의 여름 날씨는 사람을 들뜨게 한다. 도시 곳곳에 여행객들이 붐빈다. 베를린 중앙역에서 만난 아이들. 배낭 여행객들이 몸집만 한 배낭을 지고 서 있다. 눈빛에 미지의 세계를 향한 탐험 정신이 가득하다.
학과 친구들은 가방 속에 뭘 챙겨 왔는지 하나같이 두둑하다.
독일 친구들과 처음 떠나는 여행에 가슴이 두근두근한다.
저 멀리 벤이 걸어온다. 팔에 흰색 무늬가 있는 아디다스 점퍼를 입고 왔다. 안보는 척 위아래로 한번 쓱 스캔해 본다. “좋은 아침!”
남부 독일식으로 아침 인사 하며 싱긋 웃는 벤.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한다. 머릿속에 내 표정이 어떨지 정돈한다.
베를린 여름 패션 트렌드는 상의는 자유, 하의는 청바지이다. 여자 친구들은 상의는 끈 민소매 등 비교적 자유롭게, 하의는 청바지로 털털하게 입는다. 베를린 쿠담에 있는 거리에서쇼핑했다. 큰맘 먹고 제메스터 파트 Semesterfahrt(학과 단체 여행, 엠티와 비슷) 패션을 완성했다. 나보다 6~7살 어린 친구들인데, 청바지와 티셔츠를 입으니, 비슷하게 섞이는 것 같다.
기차에 앉아서 창밖 풍경을 본다. 끝없는 평원이 펼쳐진 풍경이 새삼 독일이다 싶다. 우리나라 같으면 산등성이를 굽이굽이 지나쳤을 텐데.
고향을 떠나와서, 집을 또 떠나 있네. 여행 (?) 중에 여행하는 나를 발견한다. 언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시험 다시 볼 거지?”
하늘에 동동 떠 있는 구름 따라 생각도 하염없이 흘러가고 있을 무렵, 벤이 와서 말을 붙인다.
볼 때마다 수학 문제를 물어보니, 내 머릿속에 통계학 벌레가 들어와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어제 1차 시험 결과가 나왔는데, 주르륵 미끄러졌다.
“그럼! 다시 들어야지!”
다음 학기에 재수강한다는 이야기를 아무리 밝게 하려 해도, 부담감을 표정에서 숨길 수 없다.
“다음엔 꼭 합격하길 바래!”
벤은 내 속상함을 눈치를 챈 듯, 한쪽 눈을 찡긋하며 엄지손가락을 내민다.
벤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누다 보니, 다시 뤼겐 가는 기차 안으로 생각이 돌아왔다. 귀에 MP3 이어폰을 꽂는다. Ace of Base (에이스 오브 베이스)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빠른 템포곡이 분위기를 바꿔놓는다.
창밖 푸른 초원에는 양 몇 마리와 말이 한가롭게 거닐고 있다. 아름드리나무들은 양팔로 껴안을 수 없을 정도로 한껏 늠름한 풍채를 자랑한다.
북독일 뤼겐에 가는 길.
평소 냉철하게 보이는 리자도 얼굴이 상기되어 보인다.
르네와 이야기 중이다. 르네는 마치 똘똘이 스머프 같다. 강의 중 토론에서 할 말이 늘 많다.
헤어스타일은 새 집 모양이다. 독일 남학생들은 헤어스타일이 다양하다. 곱슬곱슬한 짧은 금발 머리가 어찌 보면 ‘아마데우스’의 모차르트짧은 버전 같기도 하다.
“나 오늘 너랑 한방 쓰는 거야?”
규칙을 중요하게 여기는 르네는 방 배정부터 챙긴다.
“야~ 그럼, 난 쥐 죽은 듯 조용히 잘 테니까 걱정하지 마셔!”
장난기 많은 세바스티앙은 르네의 진지함을 우스꽝스럽게 만든다. 리자도 옆에서 피식 웃고 있다. 긴장 풀어진 모습을 보니, 이제야 스물몇 살 정도로 앳돼 보인다. 강의실에선 말도 못 붙이게 차가워 보이는데.
중간고사가 끝난 어느 날, 미리암, 세바스티앙과 함께 ‘해리포터’를 보러 간 기억이 떠오른다. 독일 영화관은 자막이 없이 독일어 더빙이다. 자막에 익숙해진 나의 몰입을 방해하기도 했다. 텔레비전 영화도 마찬가지인데, 신기하게도 입 모양이 독일어와 딱 들어맞는다.
학과에서 유일하게 나보다 나이가 많을 것 같은 미리암은 포츠담에 산다. 베를린에서 S Bahn이라는 국철로 40여 분 걸린다.
만학도들이 고른 영화가 ‘해리포터’라니. 의외성은 관계에 긴장감과 흥분을 준다.
미리암의 오래된 차를 보니, 영화를 보기 전부터 마법이 시작될 거 같다. 차를 타면 영화관이 아니라, 지붕 위로 올라갈 것 같다. 붕붕거리며, 영화관에 도착했다. 늦은 시간임에도 주차 자리가 전혀 없다. 딱 한 곳 장애인 지정 좌석만 남았다.
녹색당당원 미리암, 평소 동물권, 장애인 권리 등 소수 약자를 위한 권리 실현에 관심이 크다.
신념과 현실이 충돌하는 순간! 미리암의 선택은?
딱 하나 남은 장애인 지정 좌석을 빙빙 돌다가 결국 포기한다. 몇 바퀴를 돌다 결국, 영화 시작 직전에 들어간다. 익숙지 않은 독일어 더빙에 집중해 본다.
해리포터를 보다 말고, 미리암의 얼굴을 본다.
참, 미리암도 재수강하지! 함께 대책을 세워야겠다! 두 번째 시험까지 떨어지면 안 돼!
또 떨어지면 봄학기에 개설되는 통계학 3 과목을 듣기 위해, 1년을 기다려야 한다. 매달 부모님이 부쳐주는 돈 곱하기 1년이다. 포어 디플롬(Vordiplom; 석사 전 받는 학위) 취득이 미뤄지는 건 예정된 순서.
‘유니니? 잘 지냈니? “
기숙사 방의 적막을 깨는, 전화 속 엄마의 목소리는 마음을 후벼 판다.
언젠가 읽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처럼, '엄마가 돌아가신 날, 세상에서 가장 외로워졌다' 라는데. 상상 조차 하기 싫다. 이역만리 타국에서도 나를 들었다 놨다 하는 목소리를 들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