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역에서 만난 아이들
기차역에 학과 친구들이 하나둘 모여든다.
베를린의 여름은 사람을 들뜨게 한다. 도시 곳곳에 여행객들이 붐빈다. 베를린 중앙역에서 만난 아이들. 배낭 여행객들이 몸집만 한 배낭을 지고 서 있다. 그들의 얼굴엔 호기심과 탐험 정신이 가득하다.
학과 친구들은 가방은 뭘 챙겨 왔는지 하나같이 두둑하다. 독일 친구들과 처음 떠나는 여행에 가슴이 두근두근한다.
벤이 걸어온다. 팔에 흰색 무늬가 있는 아디다스 점퍼를 입고 왔다.
“좋은 아침!”
남부 독일식으로 아침 인사 하며 싱긋 웃는 벤.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한다. 머릿속 내 표정이 어떨지 정돈한다.
기차에 앉아서 창밖 풍경을 본다. 끝없이 펼쳐진 평원을 보니 새삼 독일임을 깨닫는다. 우리나라 같으면 산등성이를 굽이굽이 지나쳤을 텐데.
고향을 떠나와서, 집을 또 떠나 있네. 여행 중 여행하는 나를 발견한다. 언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시험 다시 볼 거지?”
하늘에 동동 떠 있는 구름을 보니, 시간이 잠시 멈춘 것 같다. 벤이 와서 말을 붙인다. 볼 때마다 수학 문제를 물어보니, 내 머릿속에 통계학 벌레가 들어와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어제 1차 시험 결과가 나왔는데, 주르륵 미끄러졌다.
“그럼! 다시 들어야지!”
다음 학기에 재수강한다는 이야기를 아무리 밝게 하려 해도, 부담감을 표정에서 숨길 수 없다.
“다음엔 꼭 합격해!”
벤은 내 속상함을 눈치를 챈 듯, 한쪽 눈을 찡긋하며 엄지손가락을 내민다.
벤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누다 보니, 기차 안에서 창밖을 볼 여유가 생긴다. 귀에 이어폰을 꽂는다. 라디오에서 Ace of Base (에이스 오브 베이스)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창밖 푸른 초원에는 양 몇 마리와 말이 한가롭게 거닐고 있다. 아름드리나무들은 양팔로 껴안을 수 없을 정도로 한껏 늠름한 풍채를 자랑한다.
북독일 뤼겐에 가는 길.
평소 냉철했던 리자의 얼굴이 상기 돼 보인다.
르네와 이야기 중이다. 르네는 마치 똘똘이 스머프 같다. 토론에서 할 말이 늘 많다.
헤어스타일은 까치집 모양이다. 독일 남학생들은 헤어스타일이 다양하다. 곱슬곱슬한 짧은 금발 머리가 어찌 보면 ‘아마데우스’의 모차르트 짧은 버전 같기도 하다.
“오늘 너랑 한방 쓰는 거야?”
규칙을 중요하게 여기는 르네는 방 배정부터 챙긴다.
“야~ 그럼, 난 쥐 죽은 듯 조용히 잘 테니까 걱정하지 마셔!”
장난기 많은 세바스티앙은 르네의 진지함을 우스꽝스럽게 만든다. 리자도 옆에서 피식 웃고 있다. 긴장 풀어진 모습을 보니, 이제야 스물세 살로 앳돼 보인다. 강의실에선 말도 못 붙이게 차가워 보이는데.
중간고사가 끝난 어느 날, 미리암, 세바스티앙과 함께 ‘해리포터’를 보러 간 기억이 떠오른다. 독일 영화관은 자막이 없이 독일어 더빙이다. 자막에 익숙해진 나의 몰입을 방해한다. 텔레비전 영화도 마찬가지인데, 신기하게도 입 모양이 독일어와 딱 들어맞는다.
학과에서 유일하게 나보다 나이가 많을 것 같은 미리암은 포츠담에 산다. 베를린에서 국철로 40여 분 걸린다.
만학도들이 고른 영화가 ‘해리포터’라니. 의외성은 관계에 긴장감과 흥분을 준다.
미리암의 오래된 차를 보니, 영화를 보기 전부터 마법이 시작될 거 같다. 차를 타면 영화관이 아니라, 지붕 위로 올라갈 것 같다. 붕붕거리며, 영화관에 도착했다. 늦은 시간임에도 주차 자리가 전혀 없다. 딱 한 곳 장애인 지정 좌석만 남았다.
녹색당 당원 미리암, 평소 동물권, 장애인 권리 등 소수 약자를 위한 권리 실현에 관심이 크다.
딱 하나 남은 장애인 지정 좌석을 보고 한참 고민하던 미리암.
갑자기 다리를 절뚝절뚝하며 내린다. 너무 진지하게 연기하는 통에, 상황판단이 어려웠다. 장애인 지정 좌석에 차를 주차하고는, 두리번거리더니, 한참 지나서야 제 발로 걷는다.
“너무 늦어서, 아무도 오지 않을 거야.”
영화가 시작된 후에야 자리를 잡았다. 익숙지 않은 독일어 더빙에 집중해 본다.
해리포터를 보다 말고, 미리암의 얼굴을 본다.
참, 미리암도 재수강하지! 같이 대책을 세워야겠다! 두 번째 시험도 떨어지면 절대 안 돼!
또 떨어지면 봄학기에 개설되는 통계학 과목을 듣기 위해, 1년을 기다려야 한다. 매달 부모님이 부쳐주는 돈 곱하기 2년이다. 석사 취득이 미뤄지는 건 예정된 순서.
“잘 지냈니?”
적막을 깨는, 수화기 속 엄마 목소리는 가슴을 후벼 판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처럼, '엄마가 돌아가신 날, 세상에서 가장 외로워졌다'는데. 엄마의 죽음을 상상하는 것조차 먹먹하다. 이역만리타국에서 나를 들었다 놨다 하는 목소리를 들으면.
엄마는 아빠 몰래 부족한 유학비용을 보내주었다. 내 목소리를 하루라도 듣지 않으면 힘들어했다.
내 마음은 아는지 모르는지 미리암은 해리포터의 마법에 홀린 표정이다.
Photo by Haengphil Sh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