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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를리너 May 10. 2024

엄마 목소리


“유니냐? 잘 지내니?”

독일 유학 시절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엄마 목소리엔 그리움과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초등학교 때 ‘꿈나무’라는 문집에 내 산문이 실린 적이 있다. 제목이 ‘엄마의 행복’이었다. 엄마가 외할머니의 무릎을 베고 누워있는 모습이 행복해 보였다. 나에게 세상 전부인 것 같은 엄마가,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할머니와 함께 있는 모습이 신기했다.  

어렸을 적, 엄마 손 잡고 재래시장에 자주 갔다. 다리를 비닐로 두르고 꿈틀거리며 차가운 땅바닥을 기는 장애인들이 있었다. 찬송가를 틀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어버버’ 읇조렸다. 엄마는 손에 잡히는 대로 몇천 원을 깡통에 넣어주곤 했다.     


칠 남매 중 셋째 딸인 엄마는 영특했지만, 가부장적인 조부모님 때문에 남자 형제들에 밀려 뒷전이 됐다. 상급 학교 진학이 늦어졌다. 엄마보다 공부를 못했던 친구들은 교복 입고 등교했다. 엄마는 골목길에 숨어 창피해서 울었다고 다. 엄마의 공부에 대한 ‘한’ 덕분에 나는 배움의 기회를 풍족하게 누렸다. 독일 유학까지 갈 수 있었다.     

엄마는 중고등학교 시절 아침마다 김치 볶음, 구운 김, 모양낸 비엔나소시지 볶음을 해서 도시락 반찬을 싸주었다. 내 반찬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밥통에 엄마가 싸준 반찬을 쟁여놓고 먹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안심하고 천천히 먹을 수 있었다.

엄마는 택시를 타면 기사님께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어요~ 인사했다. 이삿짐센터 기사분이나, 집수리하러 오는 기사 아저씨들에게 정성껏 커피와 제과점빵을 준비해서 드렸다.


키가 작은 엄마는 큰 손을 가졌다. 넘치는 정은 큰 손이 되어 김치를 담가 이웃, 형제, 자매들에게 나누었다.    나는 큰 손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어려운 일을 대신해 주는 서비스직 종사자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다. 택배 배송 기사분 그리고 아파트 환경미화원 아주머니를 위해 간식을 준비해 현관에 둔 적이 있다. 환경미화원 아주머니가 답장으로 써둔 쪽지 ‘잘 먹었습니다’를 보면서 오히려 내 마음이 따뜻해졌다.      


엄마는 밝은 성격이지만 천성적으로 신경이 약하고 우울증이 있다. 그리고 병원 방문을 극도로 싫어한다. 엄마가 병원에 갈 때는 이미 수술을 해야 할 정도로 나빠진 것이다. 난 사업으로 바빴던 아빠 대신 엄마의 크고 작은 수술을 대신 지켜봐야 했다.

엄마는 커진 혹을 제거하기 위해 개복 수술을 한 적이 있다. 회복실 창문을 통해, 마취 깰 때 통증으로 몸부림치고 있는 엄마를 보고 큰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난 K 장녀로서 부모님에 대한 책임감 그리고 애틋함이 있는데, 결혼해서도 크게 바뀌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 부모님과 심리적 독립을 해야 한다고 들었는데, 아직도 부모님에게 많이 붙어있는 기분이다. 억지로 거리를 두기도 했는데, 이제 떨어져 지내니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거라 생각한다.     


이번 5월 연휴에 시댁 가족들이 처음 집에 방문했다. 얼마 전 회전근개파열로 어깨 수술을 받았던 엄마는 어깨에 파스를 붙이고, 팔을 걷어붙였다. 각종 김치와 밑반찬 시댁 어른들이 사용할 이불과 베개를 보자기에 싸주었다. 모자란 밥그릇챙겨주었다. 문자메시지를 보내 불고기와 생선 밑반찬 상차림 위치까지 일러주었다. 그 덕분인지 시댁 어른들은 잘 먹고 간다며, 고생했다고 어깨 두드려주었다.


결혼하고 나서 남편에게 고마움이 많았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본인이 하고 싶은 것보다 먼저 하게 하고. 내가 필요한 것을 먼저 사게 한다. 본인은 인터넷에서 청바지를 주문하고  브랜드옷을 사 입는다. 중고 마켓에서 구입한 무거운 책장을 둘이 함께 들 수 있어 든든하다.

강아지 키우는 것도, 양보해서 내 말을 들어주었다. 아직 오지 않은 아기를 기다리는 애타는 마음을 헤아려 준다. 남편에게 진 마음의 빚을 갚고자, 시댁 어른들이 편히 지내도록 노력했다.


엄마는 시댁 어른 첫 식사 대접을 잘 통과했다며 기뻐했다.     

결혼 전 내 짐을 남편 차에 싣고 옮길 때 엄마는 물리적 이별을 실감한 듯 눈시울을 붉혔다. 이제는 헤어질 때 울지 않는다. 엄마는 내가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 같겠지만, 난 오히려 연로한 엄마가 걱정된다. 회복이 더딘 여린 마음에 상처 날까 봐.


친정집 앞 고등학교에 개나리, 매화꽃 복숭아꽃이 피면 감동하고, 내가 적은 생일 카드 글귀를 몇 번이고 다시 읽는 엄마.

때로 세파가 거칠게 나를 휘몰아 가도, 엄마 목소리를 들으면 초등학생으로 돌아간다. 엄마가 세상의 전부 인 때로. 독일 유학 시절, 기숙사 방의 끔찍한 적막이 나를 누를 때 들린 엄마의 목소리. 세상과 무기력한 나를 이어주었다. 엄마는 말하지 않아도 내 감정을 읽는다. 힘들거나 우울하거나 상처받거나 불안할 때 더욱.


엄마의 목소리를 들으면 눈물이 도망간다. 엄마 목소리는 나를 북돋운다. 마치 특별한 사람이 된 것처럼. 내가 살아가는 동안 엄마에게 받은 사랑을 나누어 주어야겠다. 그러면 다른 누군가도 특별한 사람이 되는 마법을 누릴 수 있지 않을까. 아주 잠시일지라도. 그 힘으로 인생의 다음 장을 넘길 수 있으면 좋겠다. 엄마의 사랑이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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