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두 번째 멍
과수원. 비와 해, 마주 서 있다.
해 더 할 얘기가 있어?
비 직접 보여줄게. 그냥 벌레일 뿐이라는 거. 너한테 어떤 해도 입힐 수 없다는 거.
해 넌 그렇게까지 증명하고 싶니? 네가 틀리지 않았다는 거?
비 난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고 싶은 게 아니라…
해 아니라고?
비 난 틀렸어.
해 웃기시네.
비 그래. 난 틀렸었어.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고.
해 넌 몰라. 알면 이럴 수 없지.
비 사람들이 떠드는 그 병, 왜 못 믿느냐고 물었지? 너 때문이야.
해 모든 게 다 내 탓이겠지.
비 오래 생각했어. 우리가 이렇게 된 이유. 삼 년 전에 내가 널 내버려둬서 그런 걸 거라고.
해 옛날 얘기 좀 그만해.
비 네가 수시로 병결 내기 시작했을 때도 난 더 의심하지 않았어. 사실 그때 네 문제는 병이 아니란 걸 알았으면서도. 내가 신경 쓰는 걸 싫어한다고도 생각했어. 물었을 때 회피했었잖아. 네 탓 하는 건 아니고, 그래서 더 못 믿겠는지도 모른다고. 그 바이러스라는 거. 나한테는 꼭 이게 기회 같아서. 내가 그때 믿지 않았던 거 이제라도 믿어야 할 것 같아서.
해 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
비 미안해.
해 이제 와서 사과 같은 거 해도 의미 없어.
비 방금 그 말은 너한테 아무 의미도 없겠지.
해 그걸 아는데도 해?
비 근데 내가 바꾸려는 건 과거가 아니니까. 그러니까… 한 번만 봐 주면 안 될까?
해, 비에게 다가간다. 비와 해, 복숭아 나무 앞에 함께 선다.
해 뭘 보라는 건데.
비 여기 보여? 이 구멍.
해 보이네.
비 대충 보면 찾지 못하겠지? 눈에 잘 띄지도 않으니까. 겨우 이거야. 심식나방 애벌레가 갉아먹은 자국.
해 그래도 얘네는 아프겠지. 겨우 이 정도로도.
비 그러니까 이런 구멍 하나 없는 복숭아들은 진짜 귀한 거라고. 운 좋아서 이런 아픔 모르는 애들이잖아. 내가 준 복숭아 방치하지 말고……
해, 말이 없다. 비, 애벌레가 갉아먹은 복숭아를 따서 반으로 가른다.
비 갉아먹은 자국만 작은 게 아니라, 애벌레도 진짜 작지? 네 손톱만 해.
해 색깔도 손톱 색 같네.
비 지금은 이렇게 약간 누런 흰 색이긴 한데, 나중에 탈출할 때는 붉은 빛이 돌아.
해 붉은색이 된다고?
비 복숭아에서 나올 때는.
해 무섭다. 꼭 피라도 빨아먹은 것 같잖아.
비 복숭아에 피가 어딨어.
해 그래서 말했잖아, 진짜 그렇다는 게 아니라. 꼭 그런 것 같다고.
비 직접 눈으로 보니까 어때.
해 끔찍하네. 내 안에도 이런 게 있다고 생각하니까.
비 너무 크지.
해 뭐?
비 이 작은 벌레에 비하면 넌 너무 크다고. 이런 게 네 몸 안에 들었다고 해도, 이런 거에 맞서서 지기에는 네가 크다고.
해 그래서?
비 그래서 네가 싸울 수 있다고. 널 괴롭히고 있는 그게 뭐든.
해 뭐든?
비 정말 나는 이해할 수도 없는 신종 바이러스든. 내가 어떻게 할 수도 없이 이미 너무 지나와 버린 시간이든.
해 ……
비 진이든.
해 내가 어떻게 싸울 수 있는데? 그렇게 많은 거랑?
비, 복숭아 몇 알을 딴다. 비,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복숭아를 담는다. 비, 봉투를 해에게 건넨다.
비 내가 지켜볼게.
해 ……
비 하루도 빠짐없이 나와서 살펴볼게.
해 ……
비 나 그런 거 잘 해. 그게 일이라서.
사이. 해, 천천히 옷소매를 걷는다. 가려져 있던 팔이 드러난다.
해 지난 번에 만났을 때보다 멍이 늘긴 했지만.
해, 복숭아가 담긴 봉지를 받아 들고는 과수원을 나간다. 재, 과수원으로 들어온다.
재 넌 모르는 사이에 복숭아도 줘?
비 누가 모르는 사이라고 했어?
재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는 사이도 아니고, 그럼 뭐야.
비 지난 번에 장례식 갔던 날 만났어.
재 장례식에서 친구를? 뭐, 가는 사람이 있으면 오는 사람도 있지.
비 죽은 애 여자친구였어.
재 방금 나간 사람?
비 응.
재 너랑은 무슨 사인데?
비 그냥 나 혼자서 돕고 싶어 하는 사이.
재 왜?
비 잘못한 게 있어서.
재 힘들겠다.
비 힘들겠지. 난 상상도 할 수 없고.
재 걔 말고. 너 말하는 거야. 진짜 상상도 할 수 없을 걸.
비, 과수원 밖을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