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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하정 Dec 08. 2023

복숭아 심지

5장. 세 번째 멍

해의 자취방. 방은 정돈되어 있지 않다. 비, 냉장고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있다.


  몸에 멍이 안 사라져. 계속 간지러워. 벌레가 더 커진 것 같아.

비  너 청소 안 하지. 청소 좀 해. 그거 먼지 알러지일 수도 있어.

  그런가?

비  너 냉장고 안에 다 맛 간 거 알고 있어?

  몰랐네.

  집안 꼴이 이게 대체 뭐야.

  아… 청소기가 너무 무거워서 들지를 못하겠어서.

  무슨… 청소기 그게 뭐… 너 매일 집에만 이렇게 온종일 박혀 있는 거야?

  바깥은… 덥잖아. 귀찮고.


비, 냉장고 속에서 검은 봉지를 꺼낸다. 봉지를 열자 안에는 짓물러 터진 복숭아가 들어있다.


  야.

  왜.

  너 이거 뭐야?

해  그게 뭔데?

  복숭아잖아.

  아…

  아?

  잊어버렸네.

  그게 다야?

  왜, 변했어? 냉장고 안에 넣어뒀는데도 그래.

  너… 내가 모를 줄 알았어?

  뭘?

  내가 너 과수원에 부른 날. 네가 복숭아 버리고 간 거 모를 줄 알았냐고.

  ……알면 그만 챙겨주지.

  뭐?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왜 계속 챙겨줬니.

  야. 네가 좋아했잖아.

해  내가 좋아했지.

  근데, 넌 어떻게 사람이 생각해서 준 걸 그렇게 버리고. 이 따위로 내팽겨쳐둘 수가 있어? 너는… 그래? 내 관심이 이런 거야? 전혀 쓸모 없는 거? 여기 처박아 두고 싶은 거?

  넌 보고 있으면, 가끔 정말 재밌어.

  뭐?

해  넌 지금도 내가 그걸 좋아할 거라고 생각해?

  어?

  지금은 그게 너무 싫을 거라는 생각은. 해 본 적 없니?

  너 정말 좋아했잖아, 우리 복숭아. 대학교 다닐 때.

  너는 모르지… 모르겠지… 절대 절대 모르겠지. 네가 들고 있는 그 썩어 문드러진 복숭아가 차라리 날 더 이해할 거야. 네가 말한 그 대학교 때. 그래… 내가 그때가 떠오르는 순간, 순간들이 정말 미쳐버릴 것 같다는 건 모르지?

  ……내가 멍 하나 안 든 복숭아들을 골라내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데…

  무슨 생각을 했는데.

  네 멍도 없었다는 것처럼 사라지기를.

  ……

  네가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기를.


사이.


해, 웃는다.


해  너무 좋다.

비  ……

  좋아서 미쳐버릴 것 같다. 정말 미쳐버릴 것만 같아.

  너한테 나는 그 뿐이야? 그 예전의 나 말고는 아무것도 아니니?


해, 비에게로 다가온다. 해, 비가 들고 있던 봉투를 낚아채더니, 봉투 속에서 무른 복숭아를 꺼낸다. 해, 복숭아를 씹어 먹기 시작한다. 복숭아의 과즙이 터져 흐른다. 비, 그 모습을 쳐다본다.


  됐니?

  ……

  됐어?

  ……

  이제 만족하니?


해, 더 이상 웃지 않는다. 비의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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