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세 번째 멍
해의 자취방. 방은 정돈되어 있지 않다. 비, 냉장고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있다.
해 몸에 멍이 안 사라져. 계속 간지러워. 벌레가 더 커진 것 같아.
비 너 청소 안 하지. 청소 좀 해. 그거 먼지 알러지일 수도 있어.
해 그런가?
비 너 냉장고 안에 다 맛 간 거 알고 있어?
해 몰랐네.
비 집안 꼴이 이게 대체 뭐야.
해 아… 청소기가 너무 무거워서 들지를 못하겠어서.
비 무슨… 청소기 그게 뭐… 너 매일 집에만 이렇게 온종일 박혀 있는 거야?
해 바깥은… 덥잖아. 귀찮고.
비, 냉장고 속에서 검은 봉지를 꺼낸다. 봉지를 열자 안에는 짓물러 터진 복숭아가 들어있다.
비 야.
해 왜.
비 너 이거 뭐야?
해 그게 뭔데?
비 복숭아잖아.
해 아…
비 아?
해 잊어버렸네.
비 그게 다야?
해 왜, 변했어? 냉장고 안에 넣어뒀는데도 그래.
비 너… 내가 모를 줄 알았어?
해 뭘?
비 내가 너 과수원에 부른 날. 네가 복숭아 버리고 간 거 모를 줄 알았냐고.
해 ……알면 그만 챙겨주지.
비 뭐?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해 왜 계속 챙겨줬니.
비 야. 네가 좋아했잖아.
해 내가 좋아했지.
비 근데, 넌 어떻게 사람이 생각해서 준 걸 그렇게 버리고. 이 따위로 내팽겨쳐둘 수가 있어? 너는… 그래? 내 관심이 이런 거야? 전혀 쓸모 없는 거? 여기 처박아 두고 싶은 거?
해 넌 보고 있으면, 가끔 정말 재밌어.
비 뭐?
해 넌 지금도 내가 그걸 좋아할 거라고 생각해?
비 어?
해 지금은 그게 너무 싫을 거라는 생각은. 해 본 적 없니?
비 너 정말 좋아했잖아, 우리 복숭아. 대학교 다닐 때.
해 너는 모르지… 모르겠지… 절대 절대 모르겠지. 네가 들고 있는 그 썩어 문드러진 복숭아가 차라리 날 더 이해할 거야. 네가 말한 그 대학교 때. 그래… 내가 그때가 떠오르는 순간, 순간들이 정말 미쳐버릴 것 같다는 건 모르지?
비 ……내가 멍 하나 안 든 복숭아들을 골라내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데…
해 무슨 생각을 했는데.
비 네 멍도 없었다는 것처럼 사라지기를.
해 ……
비 네가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기를.
사이.
해, 웃는다.
해 너무 좋다.
비 ……
해 좋아서 미쳐버릴 것 같다. 정말 미쳐버릴 것만 같아.
비 너한테 나는 그 뿐이야? 그 예전의 나 말고는 아무것도 아니니?
해, 비에게로 다가온다. 해, 비가 들고 있던 봉투를 낚아채더니, 봉투 속에서 무른 복숭아를 꺼낸다. 해, 복숭아를 씹어 먹기 시작한다. 복숭아의 과즙이 터져 흐른다. 비, 그 모습을 쳐다본다.
해 됐니?
비 ……
해 됐어?
비 ……
해 이제 만족하니?
해, 더 이상 웃지 않는다. 비의 침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