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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하정 Dec 08. 2023

복숭아 심지

6장. 네 번째 멍


과수원. 재, 쌓여 있는 박스를 옮기고는 가장 아래에 놓인 박스를 뜯는다. 박스 안에 엉망이 된 복숭아. 재, 상자를 들고 걸어간다. 과수원 한쪽에 쏟아져 있는 복숭아들. 재, 상자를 엎는다. 비, 들어온다.


  뭐하다 이제 와? 일도 많은데.

비  ……

재  표정이 왜 그래? 아, 이거 복숭아 아까워서? 좀 그렇긴 해?

  ……

  꼭 무덤 같지 않아? 복숭아 무덤. 단내가 진동을 한다.

비  나 싸웠어.

재  뭐라고?

비  싸웠다고. 해랑.

  해가 누군데.

비  과수원에 왔던 애.

  왜 싸웠는데?

비  변하는 게 하나도 없어서. 걔가 하는 이상한 소리들 내가 하도 안 믿어주니까, 자기가 미친 것 같냐고 묻더라. 솔직히… 이젠 정말 그래.

재  넌 꼭 과수원에서 일하는 사람 마인드네. 직업정신이 투철한 건가?

비  뭐?

재  너 진짜 걜 돕고 싶은 거면 우리 같은 농부가 아니라, 이 나무여야지. 집이랑 과수원을 왔다 갔다 하면서 아침에 한 번, 점심에 한 번, 저녁에 한 번, 그렇게 돌아보고 마는 게 아니라 이 뿌리 박힌 나무들처럼 계속 떠나지 않고 여기 서 있어야 한다고. 근데 불가능하지. …그리고 그건 당연한 거야.

비  뭐가 당연한데?

재  착각하지마.

비  네 말은 그러니까,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럼? 뭘 할 수 있어? 방금 네가 그랬잖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고.

  그건 걔가 달라지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니까.

  넌 네가 누굴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그게 뭐.

재  아니? 넌 걔를 구할 수 없어. 할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어? 착각이지.

  이젠 너하고까지 싸우고 있고. 진짜 지겹다.

  싸우려는 게 아냐.

  그래? 난 곧 싸울 것 같은데.

  난 널 생각해서 하는 얘기야.

  하나도 날 위하는 것 같지 않은데? 그리고, 네가 뭘 알아.

재  그건 걔도 똑같을 걸? 네가 하는 얘기, 하나도 도움 안 될 걸.

  됐다. 그만하자.

재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네 잘못이 아니라고.

  야, 그런 말 들어도 하나도 안 편해.

  야.


비의 핸드폰이 울린다. 비, 전화를 받는다.


비  죄송한데, 지금 좀 바빠서. 급한 거 아니면 나중에 다시 전화 드릴게요.


비, 이야기를 듣는다. 비, 아무 말이 없다. 재, 비를 본다. 비, 전화를 끊는다.


  왜 그래?

  해가 농약을 먹었대.

  뭐라고?

  위세척 했대.

  괜찮은 거야?

  병원이래.


긴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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