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네 번째 멍
과수원. 재, 쌓여 있는 박스를 옮기고는 가장 아래에 놓인 박스를 뜯는다. 박스 안에 엉망이 된 복숭아. 재, 상자를 들고 걸어간다. 과수원 한쪽에 쏟아져 있는 복숭아들. 재, 상자를 엎는다. 비, 들어온다.
재 뭐하다 이제 와? 일도 많은데.
비 ……
재 표정이 왜 그래? 아, 이거 복숭아 아까워서? 좀 그렇긴 해?
비 ……
재 꼭 무덤 같지 않아? 복숭아 무덤. 단내가 진동을 한다.
비 나 싸웠어.
재 뭐라고?
비 싸웠다고. 해랑.
재 해가 누군데.
비 과수원에 왔던 애.
재 왜 싸웠는데?
비 변하는 게 하나도 없어서. 걔가 하는 이상한 소리들 내가 하도 안 믿어주니까, 자기가 미친 것 같냐고 묻더라. 솔직히… 이젠 정말 그래.
재 넌 꼭 과수원에서 일하는 사람 마인드네. 직업정신이 투철한 건가?
비 뭐?
재 너 진짜 걜 돕고 싶은 거면 우리 같은 농부가 아니라, 이 나무여야지. 집이랑 과수원을 왔다 갔다 하면서 아침에 한 번, 점심에 한 번, 저녁에 한 번, 그렇게 돌아보고 마는 게 아니라 이 뿌리 박힌 나무들처럼 계속 떠나지 않고 여기 서 있어야 한다고. 근데 불가능하지. …그리고 그건 당연한 거야.
비 뭐가 당연한데?
재 착각하지마.
비 네 말은 그러니까,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재 그럼? 뭘 할 수 있어? 방금 네가 그랬잖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고.
비 그건 걔가 달라지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니까.
재 넌 네가 누굴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비 그게 뭐.
재 아니? 넌 걔를 구할 수 없어. 할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어? 착각이지.
비 이젠 너하고까지 싸우고 있고. 진짜 지겹다.
재 싸우려는 게 아냐.
비 그래? 난 곧 싸울 것 같은데.
재 난 널 생각해서 하는 얘기야.
비 하나도 날 위하는 것 같지 않은데? 그리고, 네가 뭘 알아.
재 그건 걔도 똑같을 걸? 네가 하는 얘기, 하나도 도움 안 될 걸.
비 됐다. 그만하자.
재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네 잘못이 아니라고.
비 야, 그런 말 들어도 하나도 안 편해.
재 야.
비의 핸드폰이 울린다. 비, 전화를 받는다.
비 죄송한데, 지금 좀 바빠서. 급한 거 아니면 나중에 다시 전화 드릴게요.
비, 이야기를 듣는다. 비, 아무 말이 없다. 재, 비를 본다. 비, 전화를 끊는다.
재 왜 그래?
비 해가 농약을 먹었대.
재 뭐라고?
비 위세척 했대.
재 괜찮은 거야?
비 병원이래.
긴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