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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하정 Dec 08. 2023

복숭아 심지

7장. 다섯 번째 멍

병원. 한 병실. 해, 퇴원 준비를 하고 있다. 옷을 갈아입는 해. 해의 몸에는 멍이 가득하다. 비, 병실로 들어온다. 뒤따라서 재, 들어온다.


  넌 나방 애벌레에 대해서 잘 안다며.

  놀랄 일이 더 있을 거라곤 생각 못 했는데, 넌 지금 처음으로 할 말이 그거야? 대단하다. 진짜 대단해. 제발 그만 좀 하지? 그 바이러스 얘기라면 지겨워 죽겠으니까. 더 할 말도 없고. 너는 네가 지금 기어코 뭔 짓을 한지나 알아? 대체 제정신이냐고.

  죽으려고 한 거 아니야.

  그럼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한 건데?

  이렇게 하면 애벌레가 밖으로 나올까 했어. 두 눈으로 보고 싶었거든.

  봐서 뭐하게?

  그냥. 내 고통을 알아준 건 이 벌레밖에 없었으니까.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했어.

비  죽었으면 어쩔 뻔 했냐고.

  안 죽었잖아. 난 이렇게 안 죽어.

  네가 그렇게 잘났어? 죽을지 안 죽을지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애벌레가 내 안에서 나오기 전까지는 난 안 죽어.

  제발 말 같은 소리를 해.

  이 고통을 다 겪고 나면 우리한테서 나방이 나온대. 그 나방이 떠나가고 나면 우리는 해방이야. 완전한, 해방.

  뭐라고?

  심식나방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이 가입할 수 있는 카페가 있어. 거기서 그랬어.

  카페도 있어? 근데 인터넷 의사들 믿으면 안 되는데.

해  내가 물어봤었잖아. 복숭아에 해충이 생기면 넌 어떻게 하냐고. 그러니까, 네가 그랬잖아. 약을 쓰거나, 불에 태워 없앤다고.

  그게 뭐?

해  해 본 거야.

  그래서 농약을 먹었다고?

  응.

  그러니까, 너는 나한테 네가 어떻게 하면 죽을 수 있는지 물었다는 거네?

해  죄책감 가질 필요는 없어. 아무 일도 안 일어났잖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넌 이게 아무 일도 아니야?

  ……

  묻잖아.

  너, 내가 졸업하고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하다고 했었지? 난 살고 싶지도, 그렇다고 죽을 의지도 없었어. 그러니까… 그래, 난 걔에 대한 미움만으로 가득차서 살았어. 그거 말고 다른 건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어. 네가 취업 고민할 동안 난 남들은 다 잊어버린 기억 속에 갇혀서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몰랐어. ……그런데 어느 날 그러더라. 걔가 죽었대. 갑자기.


사이.


  그 날 이후로 난 텅 비었어.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고. 슬픔도. 아픔도. 근데 내 안에 이 벌레가 생긴 거야. 난 이제 뭔가를 느껴. 이 벌레 때문에 나는 너무 편해졌어. 알겠어?

  ……도와주겠다고.

  뭐, 다른 대처법 있어? 약이나 불태우는 거 말고. 참고로 죽이고 싶지는 않아.

  너 농약 처먹고 위세척하고 지금 겨우 퇴원하는 거야. 네 꼬라지 너는 안 보여? 내가 병원 전화 받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기나 해? 기다리다 그대로 정신 나가는 줄 알았다고. 근데 넌 지금 나한테 진짜 그딴 거나 묻고 싶어?

  그게 네가 나한테 해줄 수 있는 거라면.

  난 못 해.

  방금은 날 돕겠다며.

  미쳤어. 넌 진짜 이기적이야.

  그래. 난 미쳤어. 어떻게 미치지 않을 수 있겠어.

  야. 나쁜 게 나야? 이렇게 만든 게 나냐고.

  ……

  어? 좆같은 그 새끼지.

  ……

  그러니까…… 그 새끼 때문에 왜 네가 이렇게 돼야 하는데?

  맞아.

  이제 그만 잊어버릴 순 없는 거야?

  근데 난 너도 용서 못했던 것 같아. 알아. 내가 싸울 사람은 네가 아니지. 나도 아니까. 난 네가 나를 귀찮게 하지 않으면 좋겠어. 내가 관심 있는 건, 지금 내가 걸린 이 바이러스 뿐이야. 네가 믿든 말든. 그건 더 이상 중요하지도 않아. 그러니까 괜히 시간 낭비하지 말자. 넌 돌아가서 나 말고 그 복숭아들이나 돌보면 돼.

  정말 내가 시간을 낭비했네.


비, 병실을 나간다.


해  왜 안 따라가?

재  ……

  왜 너도 내가 이상해서?

  별로. 나도 그랬던 적 있어.

  농약 먹어봤다고?

  아니. 나도 누굴 엄청 미워해봤다고.

  얼마나?

  죽이기까지 했어.

  죽인 건 좀 무섭네.

  너도 언젠가는 죽여야 할 거야.

  아쉽지만, 이미 죽었어. 아까 못 들었어?

  ……

  나도 걔를 정말 여러 번 죽여버리고 싶었는데. 그랬던 것 같은데.

  ……

해  이렇게 사라지는 건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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