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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하정 Dec 08. 2023

복숭아 심지

9장. 부화


과수원. 복숭아 무덤 앞의 비. 비, 복숭아 무덤을 쳐다보고 서 있다. 비의 엄마, 과수원으로 들어온다.


엄마  가만히 서서 뭐해?

  그냥 보고 있었어.

엄마  뭐, 다 벌레 먹은 애들인데. 그거 보고 있으면 뭐가 달라지니?

  그러게. 아무것도 달라지는 게 없네.

엄마  혹시 재 봤니?

  못 봤는데.

엄마  못 봤다고? 이상하네.

  왜?

엄마  오늘 출근 안 한 것 같은데. 연락도 안 되고. 너 뭐 들은 거 없어?

  없는데.

엄마  연락도 없이 안 올 애가 아닌데. 뭔 일 있나?

  모르겠는데.

엄마  네가 연락해볼래?

  안 받는다면서 뭘 나까지 해. 있다 오겠지 뭐.

엄마  그래도 모르잖아. 이상한 세상이고. 혹시 무슨 일 생긴 거면 어떡하니.

  쓸데 없는 얘기를 해.

엄마  못 들었어?

  뭘.

엄마  시체 또 나왔대잖아.

  시체?

엄마  그거 바이러스 말이야. 몸 밖으로 꼭 뭐가 뚫고 나간 것처럼 심장에 구멍이 나있더래. 혼자 살고 있던 이십대 여자애라던데. 거의 네 또래지. 자취방에서 혼자 죽은 채로 발견됐다던데, 너무 끔찍하지 않니? 아니, 세상이 어떻게 되려나 몰라. 별별 이상한 뉴스들이 끝도 없이 들리지. 너도 조심해. 뭔지는 몰라도 무섭다. 늘 여자가 조심해야 해. 결국 잘못되는 건 다 여자애들이야.

  어디였는데?

엄마  어?

비  어디라고 했냐고.

엄마  어디냐고? 서울이었던 것 같은데. 서울 어디였지. 모르지. 그걸 어떻게 다 기억해.


비, 과수원을 나가려다 붙잡힌다.


엄마  얘기하다 말고 갑자기 어디 가?

  가봐야 할 데가 있어. 급해.

엄마  어디? 엄마가 알아야지.

  알아서 뭐하려고.

엄마  요즘 이상하게 자주 나가던데, 누구 만나? 남자니?

  나한테 신경 좀 꺼.

엄마  안 돼. 방금 엄마 얘기 못 들었어? 걱정돼서 어딜 보내. 안 그래도 오늘 재도 없어서 과수원에 일할 사람도 없고. 그냥 한동안은 과수원 일에 집중해. 여름 막바지라 할 일도 많잖아. 괜히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말고. 그래, 오늘은 지난 주 주문 들어온 건들 다 준비해놔? 벌레 먹은 저것들도 이제 그만 다 정리하고? 알겠지? 

비의 엄마, 과수원을 나가려한다. 비, 나가려는 엄마를 본다. 

비  엄마.


비의 엄마, 다시 돌아본다.


  내가 과수원에서 일하게 된 날 기억해?

엄마  응?

비  나 학교 졸업하고 일 년쯤 지났을 때였나. 엄마가 나 취직 준비도 아무것도 안 하고 처울고 누워서 우울해하고 있는 거 못 보겠다고 과수원에서 일하게 시켰잖아. 단순노동이라도 하면 머리가 좀 빈다고. 그냥 손이랑 발이랑 움직이게 된다고. 그러다보면 내가 하고 있는 생각 그거 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엄마  아. 그랬나?

  그래, 뭐라도 해보자 했어.

엄마  어쨌든 나아졌고… 안 그래?

  그래서 난 그날 이후로 계속 이 벌레가 처먹은 복숭아만 지겹도록 들여다봤어. 여기에 뭔 정답이라도 있는 것 마냥. 나는 믿었다고. 근데 아니, 여긴 아무것도 없었어. 난 하나도 나아지지 않았어. 그때 날 괴롭히던 거 전부 다, 끝나지 않았다고. 난 계속 그 자리야.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지. 아니, 어쩌면 더 엉망진창……

엄마  무슨 일 있니? 너 도통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모르겠어.

  엄마는… 나한테 그런 것밖에 안 가르쳐줬잖아. 아무것도 아닌 셈 치는 거. 그냥 잊는 거. 새로 시작하는 거.

엄마  뭐? ……너 지금 내 방법이 잘못됐다는 거야?

  내가 뭘 더 할 수 있었겠어?

엄마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그럼 엄마가 뭘 더 할 수 있었겠어? 나보고 어쩌라고? 난 노력했어. 이혼하고, 널 혼자 키워보려고. 그딴 인간 있느니만 못한 인간이지만, 그래도 너한테 아빠가 없단 거 부족한 걸로 느껴지지 않게 하려고.

  여기서 아빠 얘기가 왜 나와?

엄마  ……전부 다 네 아빠 탓이니까.

  엄만 늘 그래. 엄만 늘 아빠 탓이야.

엄마  그럼 누구 잘못이야? 내 잘못? 네 잘못? 네 아빠 아니었으면, 네가 과수원에서 꼴도 보기 싫은 복숭아 쳐다보고 있을 필요나 있었겠니? 네가 이 땡볕에서 박스 포장이나 해야 하는 거 다 네 아빠 때문이야. 그렇게 싫어 죽겠으면 나한테 뭐라고 하지 말고 네 아빠나 탓해.

비  누구 잘못도 아니니까. 나한테 신경 끄라고.

엄마  넌 내 마음을 어쩜 하나도 모르니?

  난 기억도 안 나는 아빠보다, 엄마가 이러는 게 더 짜증난다고.

엄마  나보고 어떡하라는 거니?

비  어떻게 되든 이제 나도 모르겠어.


비, 비의 엄마를 지나쳐 과수원을 나간다.


엄마  야.


비의 엄마, 제자리에 서 있다.


엄마  너까지 일 안 하고 가 버리면 어떡해.


비의 엄마, 텅 빈 과수원을 둘러본다.


엄마  아무도 없잖아.


비의 엄마, 과수원에 혼자 남겨진 채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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