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 해방
해의 집. 방문, 열린 채로 있다. 거의 텅 빈 방. 해, 창틀을 딛고 창가에 올라서 있다. 창문이 완전히 열려 있다. 그때 비, 뛰어들어온다.
비 안 돼!
비, 해를 붙잡는다. 비와 해, 함께 바닥으로 넘어진다. 아파하는 해. 해, 몸에서 흰 가루가 떨어진다. 바닥에도 흰 가루. 비, 몸에도 묻는다.
비 이게 뭐야.
해 뭐하는 짓이야.
비 너야말로 뭐하는 짓, 너 얼굴이 왜 이래? 야, 너 얼굴이 너무 창백해. ……팔은 또 뭐야. 이 가루는 대체 다 뭐야? 몸에 뭘 바른 거야?
해 바른 게 아니라…… 보면 몰라? 과수원에서 일하면서.
비 뭔데, 이게.
해 진이야. 나온지 시간이 지나서 말라붙은 거야.
비 진이 어디서 나온다는 거야.
해 내 몸에서.
비 그게 어떻게 네 몸에서 나와.
해 내 꼴 보면 모르겠어? 뭐가 나와도 안 이상하다고. 썩기 시작한지도 꽤 됐어. 이제 거의 다 끝났어.
비, 해의 멱살을 잡는다. 비, 해의 옷을 들춘다. 해의 피부 위로 벌레가 먹은 듯한 작은 구멍.
비 ……네가 왜 곪아가는지 알아? 네가 왜 썩고 있는지 아냐고.
해 아직도 넌 그걸 모르겠니?
비 네 주위가 죽은 것들로 가득하니까. 과일도 상한 애랑 같이 두면 멀쩡한 애들도 상해. 그러니까 네가 이렇게 된 건 네가 죽은 사람을 보내지 못해서라고. 제발 그만 좀 해.
해 울지 마.
비 안 울어.
해 네가 이렇게 괴로운 건 나를 놓지 못해서야. 그만 포기해.
비 가지 마. 네가 없으면, 전부 다 없던 일이 되잖아.
해 다 없던 일로 만들고 싶어.
비 진은 죽었어. 걘 이제 너한테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해 그게 너무 너무 싫다고. 걔가 아무것도 못하게 됐다는 게. 그래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게 너랑 나인 게 싫다고. 난 이렇게 됐고, 그리고 너도…
해, 갑자기 멈춘다. 비, 해를 본다.
긴 사이.
비 왜 그래.
해 들려?
비 뭐가.
해 내 심장 소리 들어봐.
비 야.
해 들리지.
비 너 안 뛰어.
해 아냐. 이렇게 빨리 뛰잖아. 엄청 빨라.
비 병원 가자.
해 점점 더 빨라지는데.
비 어? 병원 가자. 지금이라도. 이 병이 진짜, 진짜 있는 거라면… 그런 거면 뭐라도 해주겠지. 어떻게든 해주겠지.
비, 핸드폰을 꺼낸다.
비 119…
해, 비의 핸드폰을 빼앗아 던진다.
해 병원을 왜 가.
비 제발.
해 내가 얼마나 기다려왔는데.
비 구급차 부를 거야.
해 귀찮게 하지 말라고 했잖아.
비, 핸드폰을 주우려 한다. 해, 막으려고 한다. 비, 해의 팔을 붙잡는다.
해 아파.
비 그러니까 병원에 가자고.
해 너 때문에 아프다고. 놔.
해, 뿌리친다. 해의 등 뒤로 창을 타고 내리쬐는 햇살. 해, 돌아본다. 햇살, 해의 몸을 훑는다.
해 때가 왔어.
해, 일어선다. 해, 창가로 다가간다. 햇빛, 해의 심장 부근으로 모인다.
해 뭔가가… 엄청… 빠르게…
해, 고통스러워한다. 비, 일어선다.
비 뭐야. 어디서 이렇게 달달한 냄새가……
해 너 얼른 나가.
비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야.
해 나가라니까.
비 안 가. 난 못 가.
해 야, 이건 네 이야기가 아니야. 내 이야기지. 방해하지 말고 가라고.
비 나도 여기 있잖아.
해 곧 나올 거야.
비 뭐가.
해 나방이.
비 하지 말라니까.
해 부탁이 있어.
비 지금 해도 안 들어줄 거야.
해 다른 건 다 잊어도 되니까. 하나만 기억해. 날 찢고 날아갈 나방. 그건 꼭 똑바로 봐 줘.
비 나방 같은 건 나오지 않을 거야. 이번만큼은 내 말이 맞아. 지금까진 네가 다 맞고, 내가 다 틀렸어도.
해 내가 못 봤던 거, 너는 볼 수 있을 테니까.
비 내가 장담할 거야.
해 그거 나오면 잘 보내 줘. 꼭.
방 안이 환해진다. 해, 가슴을 붙잡는다.
해 장례식 날 있잖아.
비 갑자기 장례식 얘기를 왜 해.
해 그 때 하고 싶었던 말이 갑자기 생각났어.
비 그게 뭔데.
해 왜 너는 끝까지……
해, 주저 앉는다. 해의 몸이 비 앞으로 떨어진다. 비, 코를 쥔다. 비,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한다. 비, 고개를 파묻는다. 들지 못한다.
정적.
비 아니야. 아무것도 안 보여.
비, 천천히 싱크대가 있는 곳으로 기어간다. 비, 싱크대를 붙잡고 일어선다. 비, 물을 받는다.
비 밀어버려.
비, 물을 바닥에 들이붓는다. 바닥에 떨어진 진이 물에 녹는다.
비 바다가 다 지워줄 거야.
비, 해에게 다가간다. 비, 해의 몸을 바라본다. 비, 손가락으로 해의 몸에 묻어있는 진을 닦아본다. 비, 손가락을 입에 넣는다.
비 다네. 엄청…….
긴 사이.
비 왜 너는 끝까지……
긴 암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