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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하정 Dec 08. 2023

복숭아 심지

10장. 해방

해의 집. 방문, 열린 채로 있다. 거의 텅 빈 방. 해, 창틀을 딛고 창가에 올라서 있다. 창문이 완전히 열려 있다. 그때 비, 뛰어들어온다.


  안 돼!


비, 해를 붙잡는다. 비와 해, 함께 바닥으로 넘어진다. 아파하는 해. 해, 몸에서 흰 가루가 떨어진다. 바닥에도 흰 가루. 비, 몸에도 묻는다.


  이게 뭐야.

해  뭐하는 짓이야.

  너야말로 뭐하는 짓, 너 얼굴이 왜 이래? 야, 너 얼굴이 너무 창백해. ……팔은 또 뭐야. 이 가루는 대체 다 뭐야? 몸에 뭘 바른 거야?

  바른 게 아니라…… 보면 몰라? 과수원에서 일하면서.

  뭔데, 이게.

  진이야. 나온지 시간이 지나서 말라붙은 거야.

  진이 어디서 나온다는 거야.

  내 몸에서.

  그게 어떻게 네 몸에서 나와.

해  내 꼴 보면 모르겠어? 뭐가 나와도 안 이상하다고. 썩기 시작한지도 꽤 됐어. 이제 거의 다 끝났어.


비, 해의 멱살을 잡는다. 비, 해의 옷을 들춘다. 해의 피부 위로 벌레가 먹은 듯한 작은 구멍. 


  ……네가 왜 곪아가는지 알아? 네가 왜 썩고 있는지 아냐고.

  아직도 넌 그걸 모르겠니?

비  네 주위가 죽은 것들로 가득하니까. 과일도 상한 애랑 같이 두면 멀쩡한 애들도 상해. 그러니까 네가 이렇게 된 건 네가 죽은 사람을 보내지 못해서라고. 제발 그만 좀 해.

  울지 마.

  안 울어.

해  네가 이렇게 괴로운 건 나를 놓지 못해서야. 그만 포기해.

비  가지 마. 네가 없으면, 전부 다 없던 일이 되잖아.

  다 없던 일로 만들고 싶어.

  진은 죽었어. 걘 이제 너한테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그게 너무 너무 싫다고. 걔가 아무것도 못하게 됐다는 게. 그래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게 너랑 나인 게 싫다고. 난 이렇게 됐고, 그리고 너도…


해, 갑자기 멈춘다. 비, 해를 본다.


긴 사이.


  왜 그래.

해  들려?

  뭐가.

해  내 심장 소리 들어봐.

  야.

  들리지.

  너 안 뛰어.

  아냐. 이렇게 빨리 뛰잖아. 엄청 빨라.

  병원 가자.

  점점 더 빨라지는데.

  어? 병원 가자. 지금이라도. 이 병이 진짜, 진짜 있는 거라면… 그런 거면 뭐라도 해주겠지. 어떻게든 해주겠지.


비, 핸드폰을 꺼낸다.


  119…


해, 비의 핸드폰을 빼앗아 던진다.


  병원을 왜 가.

  제발.

  내가 얼마나 기다려왔는데.

비  구급차 부를 거야.

해  귀찮게 하지 말라고 했잖아.


비, 핸드폰을 주우려 한다. 해, 막으려고 한다. 비, 해의 팔을 붙잡는다.


  아파.

  그러니까 병원에 가자고.

  너 때문에 아프다고. 놔.


해, 뿌리친다. 해의 등 뒤로 창을 타고 내리쬐는 햇살. 해, 돌아본다. 햇살, 해의 몸을 훑는다.


  때가 왔어.


해, 일어선다. 해, 창가로 다가간다. 햇빛, 해의 심장 부근으로 모인다.


  뭔가가… 엄청… 빠르게…


해, 고통스러워한다. 비, 일어선다.


  뭐야. 어디서 이렇게 달달한 냄새가……

  너 얼른 나가.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야.

  나가라니까.

  안 가. 난 못 가.

해  야, 이건 네 이야기가 아니야. 내 이야기지. 방해하지 말고 가라고.

  나도 여기 있잖아.

해  곧 나올 거야.

  뭐가.

  나방이.

비  하지 말라니까.

  부탁이 있어.

  지금 해도 안 들어줄 거야.

  다른 건 다 잊어도 되니까. 하나만 기억해. 날 찢고 날아갈 나방. 그건 꼭 똑바로 봐 줘.

  나방 같은 건 나오지 않을 거야. 이번만큼은 내 말이 맞아. 지금까진 네가 다 맞고, 내가 다 틀렸어도.

  내가 못 봤던 거, 너는 볼 수 있을 테니까.

비  내가 장담할 거야.

  그거 나오면 잘 보내 줘. 꼭. 


방 안이 환해진다. 해, 가슴을 붙잡는다.  


  장례식 날 있잖아.

  갑자기 장례식 얘기를 왜 해.

  그 때 하고 싶었던 말이 갑자기 생각났어.

비  그게 뭔데.

  왜 너는 끝까지…… 


해, 주저 앉는다. 해의 몸이 비 앞으로 떨어진다. 비, 코를 쥔다. 비,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한다. 비, 고개를 파묻는다. 들지 못한다.


정적.


  아니야. 아무것도 안 보여.


비, 천천히 싱크대가 있는 곳으로 기어간다. 비, 싱크대를 붙잡고 일어선다. 비, 물을 받는다. 


  밀어버려.


비, 물을 바닥에 들이붓는다. 바닥에 떨어진 진이 물에 녹는다. 


  바다가 다 지워줄 거야. 


비, 해에게 다가간다. 비, 해의 몸을 바라본다. 비, 손가락으로 해의 몸에 묻어있는 진을 닦아본다. 비, 손가락을 입에 넣는다. 


  다네. 엄청……. 


긴 사이. 


  왜 너는 끝까지……


긴 암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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