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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하정 Dec 08. 2023

복숭아 심지

8장. 여섯 번째 멍

해안로. 재, 바다를 보고 서 있다. 비, 걸어온다.


  사람을 왜 여기까지 불러? 한가한가 봐. 이렇게 놀러다니고.

  밤에 보면 더 멋있는데. 아, 아쉽다.

  그럴 시간 없을 텐데.

  예전에 여기 올라오기 전에 바닷가에서 살았어.

비  뜬금없이 갑자기 웬 옛날 얘기?

  봐봐. 파도 들이쳤다 사라지는 거. 마치 아무 것도 없었던 것처럼. 다 쓸려내려가는 거야. 모래, 조개, 죽은 동물들. 쓰레기까지. 어때? 가슴이 좀 뚫리지 않아? 답답한 거. 난 그렇던데.

  바다 본다고 해결될 걱정이면 좋겠네.

  딱 이런 데서 밀어버렸어.

  뭘?

재  예전에 만났던 사람.

  어?

  사랑이 실체가 없는 건 우리가 분명히 기억할 수 없기 때문이겠지.

  농담한 거지?

  네 친구 있잖아. 애인이 죽었다면서? 아니야. 안 죽고, 여전히 살아있어. 그게 문제라고. 죽여버려야 하는데. 나처럼. 안 그러면 평생 보고 살아야 돼.

비  야. 재미도 없어.

  이미 일어난 일은 꼭 고장 난 카세트 테이프처럼 우리 안에서 끊나지 않고 반복재생 돼. 우리는 그걸 멈추는 방법을 모르고, 그 과정에서 기억은 엉킨 녹음 테이프처럼 엉망진창이 돼. 나중에는 풀어낼 수도 없게, 사실과는 완전히 다른 모양으로 우리에게 남지. 그러니까…… 걘 제대로 재생도 할 수 없는 쓰레기 테이프를 버리지도 못하고 있다고. 죽여버리라고 했는데, 이미 죽어서 그럴 수 없다더라? 아, 그 말이 아닌데.

  네 말 하나도 이해 못 하겠어.

  너도 그래. 너도 걜 그만 버려야 돼. 이만큼 안 풀려도 그걸 모르겠어?

  무슨 말 하는 건지 모르겠다니까.

  어려워? 네가 못 버리겠으면 내가 대신 해줄까?

  대체 갑자기 왜 이래?

재  네가 죽을 상 하고 있는 거 더 이상은 못 봐주겠어서?

  죽을 상을 하고 있든 말든 너랑 무슨 상관인데.

  그러게?

  장난해?

  모르겠는데? 내가 너 사랑하나?

비  야, 이게 무슨 사랑이야.

  그럼 뭐가 사랑인데?

비  뭐라고?

재  돕겠다고 말은 하지만 걔를 더 괴롭게 하는 너? 아니면 그 좆같은 새끼 하나도 못 잊고 아직도 미련이나 갖고 있는 걔? 그래도 그나마 내가 제일 사랑인 것 같은데. 네가 그랬잖아. 네 말대로 나쁜 건 그 좆같은 새끼라고.

비  ……

  사랑이 있다고 생각해?

  ……

  사랑이 있어서 지금 이런 것 같아?

비  알았어. 정신 차리면 되잖아.

  그 좆같은 새끼가 몇 명을 망치고 있는지 봐봐.

  그만해. 진짜 재미 없으니까.

  나도 재미 없다. 쓸데없는 사랑 얘긴 그만하자.

  이제 더 할 말 없지?

  네 친구가 걸렸다는 그 병. 그거 내가 아주 오래 전부터 알던 병이야.

  ……진짜 있는 거야?

  모르지.

  똑바로 답해.

  네가 믿는 거면 있는 거고, 아닌 거면 없는 거고. 그게 중요하나?

  중요해.

재  그래. 누군가한텐 엄청 중요해보이더라.

  너는 언제부터 알았는데?

  네 친구가 매일 보는 그 심식나방 바이러스 감염자들만 가입할 수 있다는 카페 그거. 그거 내가 만들었는데. 그럼 꽤 됐겠지?

  장난하지마.

  우리가 장난 같아?

  어쩌다가 넌 그런 병을 알게 된 건데?

  음. 너무 오래 돼서 기억도 잘 안 난다. 그 기억도 여기다 다 밀어버렸거든.

  ……

  아, 시원하다. 그치?

비  왜 이제 말해?


사이.


  바다에 다 밀어버려. 바다는 다 지워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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