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하정 Dec 08. 2023

복숭아 심지

3장. 첫 번째 멍

초여름. 비가 일하는 과수원. 해가 과수원으로 들어온다. 일하던 비, 해를 발견한다.

 

  오랜만이네.

  한 달 전에 봤는데.

  한 달. 한 달 밖에 안 됐구나.

  너도 정신 없었을 테니까. 좀 더 빨리 만나고 싶었는데. 요즘 분위기도 이상하고.

  ……

  여기 오는 데 헤매진 않았어? 과수원은 처음이지? 왜 예전엔 한 번도 안 데려 왔나 몰라.

  그럴 사이가 아니었나 보지.

  말 섭섭하게 한다. 그래도 우리 한 때 친했다고 생각하는데.

  너랑 나 졸업하고 연락 한 번 안 했는데.

  졸업하곤 연락 완전 끊겼지만… 나 진 소식 듣자마자 네 생각이 났거든.

해  나 왜 불렀어?

  그냥. 궁금해서.

  뭐 또 내가 괜찮은지, 안 괜찮은지?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해  그냥 있었어. 네 말대로 분위기도 이상한데, 밖에 나다니기도 싫고.

비  꼭 요즘이 아니라… 너 대학 졸업하고 말야. 음, 난 취직 못 했다? 야, 식품영양학과는 도대체 뭘 하니? 이 취업부터가 골고루가 안 된다. 아예 포기하고 본가 내려와서 계속 놀고 먹다 슬슬 눈치 보이기 시작해서 일 년 전쯤부터 엄마 과수원에서 일하는 중이야. 그래서 같이 일하는 애가 낙하산이라고 하도 뭐라 하는데… 아, 근데 정말 내 맘대로 되는 게 아무것도 없다. 농사도 그렇더라. 엄마 일이라고 솔직히 좀 쉽게 봤는데. 여기 이 과일들 있잖아, 이렇게 내가 매일 같이 나와서 들여다보고 살펴도 어느 날 아침에 보면 벌레 먹어 있고, 상해 있고 그래. 참…….


해를 바라보던 비, 복숭아 나무를 쳐다본다.


  이거, 복숭아야.

  보면 알아.

  보면서 네 생각 솔직히 가끔 했어.

  ……

  좋아했잖아. 너. 우리 집 복숭아.

해  옛날 일이야.


비, 검은 봉지를 들고 와 해에게 건넨다.


  왜?

  먹으라고. 근데 아직 약간 설익었으니까, 집에 조금 뒀다 먹어. ……진작 갖다 줘 볼 걸. 이제야 주네.

해  필요 없는데.

비  받아. 미안한 마음을 담아 두 배로 넣었어. 사실 맘만 같아서는 세 배로 넣어주고 싶은데, 과수원이 요새 좀 안 좋아서 그럴 수가 없네.

  왜?

비  이제 여름이잖아. 벌레가 많아.

  벌레?

  응. 난리야.

  무슨 벌레?

  무슨 벌레냐고? 말하면 알아? 종류야 완전 많은데… 지금 얘네들은 특히 그… 복숭아심식나방이라고. 그거 때문에 고생하고 있어.

  심식나방?

비  그냥 여름에 유행하는 흔한 해충이야.

  몸 속으로 들어간다는 그 애벌레잖아? 그거 때문에 사람들이…

비  어떤 정신 나간 인간들이 그 끔찍한 일에 심식나방을 갖다 붙일 생각을 했는지 몰라도… 다 말도 안 되는 소리야.

해  말도 안 된다고?

  그래. 진짜 말도 안 되는 일이야. 애초에 사람 몸 속에 애벌레가 들어간다는 얘기도 이상하지만… 백 번 양보해서 정말 만에 하나 나방 애벌레 같은 게 사람 몸 안에 들어간다 쳐. 그렇다 해도 그게 어떻게 사람을 그렇게 만들어. 그렇게 끔찍하게…

해  확실해?

비  확실하냐고?

해  응.

비  왜 그런 걸 물어?

해  오늘 뉴스 봤어?

비  아니.

해  월세가 세 달이 밀렸는데, 연락이 안 돼서 집주인이 신고를 했더니 죽어 있었대. 온 몸에 퍼렇게 멍이 든 채로. 거실과 안방을 가르는 경계에 몸을 가로하고 아주 이상한 자세로 누워 있었대. 심장 부근에 크게 구멍이 나 있었고. 경찰들이 문을 따고 들어갔을 때, 텅 빈 방 안에 단내가 진동하더래. 사람이 죽었는데, 피 냄새 같은 게 아니라. 집 안에 과일 같은 거라도 썩었나 하고 봤는데, 음식 같은 건 아무것도 없었대. 그 흔한 벌레도 하나 없었고. 그런 정말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두 달 동안 끊이지 않고 계속 벌어지고 있어. 근데 넌 아니라고 확신해?

비  그래서? 웬 변종 애벌레 같은 게 갑자기 어느 날 생겨나서 그게 뭐, 사람이 느끼는 고통의 냄새를 맡는다고? 몸 속으로 들어가고 멍 들게 한다고? 그렇게 생각해? 네 말대로 두 달 내내 발견되고 있는 그 끔찍한 몸들을 보고도 그런 얘기를 믿어? 그게 믿어져? 맞거나 다친 게 아니라, 애벌레 하나가 그렇게 만드는 거라고?

해  너는 못 믿어?

비  나는 못 믿어.

해  못 믿는구나?

비  어. 못 믿어.

해  그럼 이 얘기는 믿겠어?

  또 무슨 얘기를 믿어야 하는데.

  나 병 걸렸어.

  뭐?

  병 걸렸다고.

  갑자기 무슨 소리야. 알아듣게 말해.

  내가 걸렸다고. 그 병에. 온 몸이 곪아가고, 아니 썩어가고 있어.

  뭐라고?

  썩고 있다고. 자. 네 눈으로 봐.


해, 자신의 몸에 든 멍을 비에게 보여준다. 해의 팔 위로 푸른 멍.


  너 왜 이래?

  이제 믿겨?

  너 어쩌다 다친 거야?

  벌레가 몸 안을 기어 다니는 거, 어떤 느낌일지 상상할 수 있어?

  ……

  항상 느껴지는 건 아니야. 전혀, 그 어떤 느낌도 들지 않을 때도 있어. 그땐 나도 내가 아프다는 걸 잊기도 해. 그럼 드디어 모든 걸 다 잊어버렸다고 생각이 드는데, 그러면 그 생각 때문에 다시 내가 아프다는 걸 깨닫아. 또 심장 쪽이 간지럽기 시작해.

  있잖아.

  처음에는 간질거리만 했어. 근데 어느 날 밤이었어. 잠을 자고 있었는데, 갑자기 엄청난 고통이 느껴졌고, 그래서 잠에서 깼어. 숨이 쉬어지지가 않았어. 아무것도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았고…… 그저 오로지 내 안을 기어가는 벌레만이… 더… 더… 커져서

  너 설마…

  ……

  누구한테 맞아?

  너 지금 내가 맞았냐고 물어본 거야?

비  또… 그런 거야?

  그걸 이제 묻네?

  뭐?

  옛날에는 그렇게 모르는 척 하더니.

비  왜 갑자기 옛날 얘기를 해? 말 돌리지 마.

  말은 너나 돌리지 마. 네가 물어 봤잖아. 나 누구한테 맞았냐고? 너 그게 정말 궁금해?

  ……

  맞아. 나 맞았어. 옛날에. 너도 알겠지. 필사적으로 모른 척했겠지만.

  그건…

  근데 지금은 아냐. 지금은 진짜야. 난 병에 걸렸고,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다고.

  그 때는… 내가 참견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어. 난,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도 몰랐고. 섣불리 얘기를 꺼냈다가, 네가 더 상처 받을까 무서웠어.

  ……

  아니, 사실은 내가 너무 무서웠어. 네가 여름에도 온 몸을 다 가리는 긴 옷을 입고 강의실에 나올 때, 그 옆에서 수업에 애써 집중하려고 앉아있는 내가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은 그 기분이 진짜 싫었어. 그 기분이 너무 너무 선명하게 남아서, 오랫동안 나를 괴롭혀서… 너랑 진이 헤어졌다는 얘기를 나중에 전해 듣고도 너한테 연락하지 못했어.

  ……

  장례식날, 너한테 말 건 거. 그래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 너한테 간 거, 그거 내 선택 같은 거 아니었어. 그냥 그렇게 된 거야. 그 날 나도 너한테 왜 갔는지 몰라. 사실 우리 남이나 마찬가지였는데.

  남보다 더하지.

  근데 그 날 내가 네 옆에 앉아서 이렇게 너랑 다시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게 다행이야.

  너 하나만 해.

  해, 복숭아심식나방 바이러스 같은 건 없어.

  ……

  내가 알려 줄게. 그런 건 없다는 거.

  그보단…

  ……

  정말 웃긴 게 뭔 줄 알아?

  뭐가 웃겨?

  넌 그 때나 지금이나 내가 하는 말은 전혀 믿지 않는다는 거야. 네가 믿고 싶은 대로만 생각하지. 넌 언제나 그랬어.

  하지만 이건 정말 아니야. 널 이해하고 싶어도, 말이 안 돼.

해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지?

  그렇지 않아.

  아니면 그 비슷한 상태라 생각하겠지. 그거 아니? 누구는 내가 괜찮다고 하는 걸 믿지 않고, 누구는 내가 아프다고 하는 걸 믿지 않아. 그러니까 나는 괜찮을 수도, 안 괜찮을 수도 없게 됐어. 난 장례식, 그 날 이후로, 내가 아니게 됐다고.

  이해해.

  넌 하나도 이해 못 해. 정말. 하나도. 넌 확실한 사람이니까. 말이 되고, 안 되는 것들에 대한 기준 같은 거. 넌 절대로 나를 이해하지 못할 거야.

  나 널 이해해보려 하고 있어. 그러니까, 네 얘기를, 네가 네 얘기를 해준다면…

  난 그런 거 할 수 없어. 설명 같은 거 되지도 않으니까.


둘 사이의 긴 침묵. 비와 해, 서로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해, 과수원을 나가버린다. 비, 혼자 남겨진 채 시간이 흐른다. 잠시 후, 재가 과수원으로 들어온다. 재, 검은 봉지를 들고 있다.


  누구야?

  ……누구?

  누구 온 거 아냐? 방금 들어오다 나가는 사람 본 것 같은데.

  아, 옛날 대학 동기.

  아, 친구?

  ……손에 든 그건 뭐야?

  이거? 그러니까. 과수원 들어오는데, 입구에 버려져 있더라?

  입구에?

  보니까 복숭아던데?

비  복숭아라고?

재  근데 누가 복숭아를 버려. 그것도 멀쩡한데. 다 완전 예쁜 애들이야. 아마 뭐 사장님이 아시는 분 드리려고 빼 두신 건가 그렇겠지? 근데 혹시 또 누가 가져갈까 봐, 일단 들고 왔어. …아, 맞다. 너 그거 들었어?

  뭐.

  또 발견 됐다는데. 죽은 여자.

  ……

  혼자 살던 자취방에서. 진짜 뭔지는 몰라도 소름 끼쳐.

  이 얘기 그만하자.

  왜? 넌 안 믿는다고?

  그냥.

재  몰라. 나는 심식나방 얘기 들으면 이제 아주 닭살이 돋아. 죽은 여자들도 끔찍하지만, 이번 여름 복숭아 피해만 지금 얼마야? 귀하다. 살아남은 이 복숭아들.


재, 복숭아 나무 사이를 지난다. 비, 재가 내려놓은 검은 봉지를 바라본다.


  친구 아니야.

  어?

비  친구 아니라고. 걔.

이전 02화 복숭아 심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