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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맘 Aug 19. 2024

엄마의 갑작스러운 대청소

월요일 오전이 소란스럽다.

안방문 옆에 서 있던 무선 청소기가 거치대에서 분리되자 작심한 듯 요란한 청소음이 조용한 집안에 울려 퍼졌다.

손님을 초대한 것도 아닌데 오늘은 자석에 끌린 듯 대청소가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청소의 동기부여가 충분해야 시동이 걸리는 타입인 나로선 특별한 일이다.

이런 날은 침대 밑의 먼지까지 모조리 구출할 정도로 청소레이더가 매섭게 작동을 예고한다.




쌀국숫집 파트타임 알바를 시작한 딸아이의 외출 덕분에 집안엔 나와 청소기 둘만의 팀워크가 발휘되는 시간이 되었다.

청소기를 앞장 세워 제일 먼저 열어본 딸의 방안은 주인에게 버림받은 긴 머리카락들만 뒤엉켜 쓰러져 있었다.

딸아이의 두피는 도대체 괜찮은 건 걱정도 잠시다.

맥없이 빨려드는 머리카락에 묘한 쾌감도 들었지만 결국 딸의 털털함을 꼬집는 궁시렁 소리만 입에서 새어 나왔다.

침대매트와 베개커버도 장마철을 지내고 청결함의 유효기간을 넘긴 것 같아 바로 아웃시켰다.




다음은 손님 같은 아들방이다.

학교기숙사와 연구실을 오가야 하는 방주인은 주말에만 집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홀연히 몸만 빠져나간다.

당연히 청소나 정리에 대한 관심은 없다고 봐야 옳다.

방문을 열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연두색 고래인형오랜 시간의 흔적을 간직한 아들의 애착인형이다.

30년 넘는 맞벌이 엄마를 대신했던 품 안에 쏙 들어오는 사이즈와 부드러운 감촉이 버릴 수 없는 매력이라고 나름 추측했다.

결국 애정결핍의 산물이 아닐까 싶어서 짠하기도 했다.

다른 건 몰라도 고래인형만큼은 침대 한편에 고이 모셔두고 집을 나서는 스물여섯 아들이다.




아들방의 살림은 침대와 책장 그리고 옷들이 걸린 행거 정도로 단출하다.

평소 침대밑 깊숙한 곳에 먼지를 못 본 척했던 마음이 걸렸었다.

침대를 반쯤 밀고서 청소기와 물걸레를 차례로 투입시키고 나니 양심의 무게가 가벼워졌다.

그리고 아들을 닮은 묵직한 3단 책상서랍을  하나씩 열어 정리를 시작했다.

서랍 속은 빼곡하고 무질서한 유물발굴터 같았다.

뒤엉킨 충전 선들, 딱딱한 수채물감, 굳어버린 볼펜들까지 잡동사니들을 휴지통에 넣고 나니 여백이 있는 서랍이 되어 갔다.



마지막 세 번째 서랍 속엔 어떤 유물이 있을지 긴장하며 손잡이를 당겼다.

스르륵 열린 서랍에는 폐기된 여권들과 훈련소 사서함주소가 적힌 오래된 편지봉투 등이 보이기 시작했다.

천천히 편지들을 정리하며 뒤적이는데 익숙한 필체의 파란 봉투 하나가 눈에 훅 들어왔다.

10년 전쯤 사춘기 아들에게 썼던 ‘100 감사 편지’에 손이 닿자 가슴이 몽글몽글 해졌다.


“아, 이게 여기 있었구나”


봉투보다 길게 삐져나온 A4용지 4장에는 아들에 대한 엄마의 100가지 감사한 내용이 담겨 있다.

아들 침대에 걸터앉아 그때를 회상하며 접은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1번.  엄마의 건강한 아들로 태어나 주어서 감사하다.

56번.  비가 올 때 네가 지붕 높은 우산을 받쳐주어 흐뭇하고 감사하다.

67번.  엄마가 잘 모르는 축구나 야구 규칙을 알기 쉽게 설명해 줄 때 감사하다.

87번.  용돈을 규모 있게 쓰진 않지만 함부로 쓰지 않아서 감사하다.

93번.  엄마 뱃속에서 하마터면 일찍 세상에 나올 뻔했었는데 정상적으로 너를 만나서 감사하다.

94번.  백화점 갔을 때 엄마한테 듣기 좋게 나중에 커서 명품선물 해 주겠다고 하는 말에 감사하다.

100번.  너는 존재만으로도 엄마에겐 감사하다.




감사의 내용 1번부터 100번까지 어느 것도 과장되거나 진심 아닌 내용은 없었다.

틈틈이 사무실에서 타이핑한 한글파일을 출력해서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돌아온 아들 책상 위에 놓았던 기억이 새롭다.

자주 퇴근이 늦었던 미안한 엄마가 아들에게 표현한 사랑과 감사의 메시지였다.

건실한 청년으로 성장한 지금의 아들에게 삶의 마중물이 되었다가 다시 나에게 감사하게 나타난 것만 같았다.




불현듯 청소하고 싶었던 이유가 아들방 책상 서랍 속에 있던 감사편지의 끌어당김이란 생각이 들었다.

8월의 청소 중에 느꼈던 후덥지근한 마음이 감사편지 에너지재부팅되면서 기분 좋은 여운으로 길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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