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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맘 Oct 21. 2024

 '그려' 하며 살아요

작은아버님! 왼쪽으로 가셔요~


동행하는 우리와 떨어져 5미터 앞에서 직진으로 일관하시는 작은아버님을 놓칠까 봐 나의 시선이 바빴다.

어디든 아랑곳하지 않고 홀로 앞장서서 걸으시는 모습이 오래전 무뚝뚝한 친정아버지를 보는 것 같아서 어쩐지 낯설지 않았다.




얼마 전 미국에서 시댁 작은아버님 내외분이 영구귀국을 목적으로 한국에 들어오셨다.

미국에서 시민권을 취득하신 두 분은 65세가 넘으셔서 이중국적 취득이 가능하셨다.

우리 집에 며칠 머무시는 동안 출입국사무소 관련 업무를 조금 도와 드리게 되었다.

관련업무를 대행해 주는 행정사 사무소를 찾아가 절차를 안내받고 거소증신청서와 국적회복신청서 등의 서식을 잔뜩 받아온 어느 날 오후였다.




“아이쿠야, 아무리 대행사무소를 통하더라도 적어내야 할 서류가 잔뜩이네”

집으로 돌아와 “어디 보자” 하시며 작은아버님은 돋보기안경을 꺼내셨다.

제일 두툼한 국적회복 진술서에는 외국에서의 생활과정, 한국국적을 회복하려는 사유, 국적회복 후 생활계획 등을 상세히 서술해야 했다.


진술서 예시문을 꼼꼼히 정독하신 후에 작은아버님이 먼저 펜을 드셨다.

두 분이 머리를 맞대고 작성하신 진술서가 거실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놓일 무렵, 검토를 핑계로 서류를 넘기려던 순간이었다.

작은아버님의 국적회복신청서 첫 장을 보고 나도 모르게 웃음이 빵 터지고 말았다.

국적회복을 하고자 하는 사유란에 큰 글씨로 고국에서 여생을 마칠까 합니다..라고 적으신 것이다.


“작은아버님, 여생을 마치다니요?”

“국적회복 심사하는 직원이 읽으면 오해하겠어요.”


여과 없이 쓰신 작은아버님의 문장은 읽을수록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뒷부분을 조금 매끄럽게 수정하는 나를 보시더니 작은엄마도 내 거 보고 썼으니 수정해야 할 꺼라며 확신하셨다.

그렇지만 작은어머님은 고국에서 여생을 보낼까 합니다.라고 한 끗차이로 센스 있게 적어주셨다.




작은아버님과 어머님은 30년 가까운 미국 이민생활을 한국인 특유의 부지런함과 성실함으로 치열하게 살아오신 분들이다.

먼 타국에서 삶의 터전을 일구시느라 얼마나 고단하고 힘드셨을지 국적회복 관련 진술서 내용에서 고스란히 느껴졌다.



하지만 서툰 문장표현처럼 고단한 삶 속에서 서로에 대한 배려나 사랑표현은 잊고 사신지 오래인 듯싶었다.

무뚝뚝함 속에 깊은 정이 숨어있을지언정 작은어머니는 남편에 대한 아쉬움과 서러움이 많아 보이셨다.


나는 마치 오은영 박사님으로 빙의한 듯 두 분께 솔루션 처방 하나를 말씀드리기 시작했다.


“작은아버님, 제가 작년 가을에 남편과 강원도 일주일 살기 여행을 갔었거든요

저희도 다른 부부들처럼 대화 중에 간섭하거나 트집 잡는 말투가 있다 보니 여행 가기에 앞서 다짐을 받은 말이 있었어요.


그건 바로 상대방이 하는 말에 “그렇구나”라고 대꾸하기였어요.

별거 아닌 거 같지만 여행 중 오가는 대화에서 어쨌거나 저쨌거나 그냥 “그렇구나” 한 마디만 했을 뿐인데 관계가 부드러워지더라고요

정말 마법의 단어처럼 “그렇구나” 때문에 사소한 다툼 없이 여행 내내 즐겁게 지낼 수 있었어요

참 신기하죠?"



그런 의미에서 작은아버님도 한 번 해 보실래요?

“그렇구나”라고 지금 한 번 말씀해 보세요~

그러자 작은아버님은 “그, 그, 그려”라고 어렵게 첫마디를 툭 던지셨다.

난  '와'하는 감탄사와 함께 응원의 박수를 쳤다.

“그려”도 괜찮은 데요? 짧고 구수해서 더 좋아요.

앞으로 작은아버님, 어머님도 대화 중에 서로 조건 없이 “그려” 사시면 어떨까요?




작은어머님은 “이제 우리도 한국으로 돌아왔으니 사이좋게 잘 살아 봅시다” 라며 먼저 다짐을 유도하셨다.

“그려”를 먼저 하시는 분이 마음의 그릇이 큰 분이라는 거 아시죠?

조카며느리에게 들켰던 두 분의 싸늘한 말투가 멋쩍으시면서도 진솔한 말에 귀담아들어 주시고 기분 좋게 웃어 주셨다.


어렵게 나온 첫마디 “그려”두 분에게 고국에서의 여생을 행복하게 보낼 수 있는 마법의 단어로 정착되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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