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in나 essay 2
-과거의 상처가 재현될까 봐 불안한 마음에게
함께 별을 보며 마음을 나누던 여러 밤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차가운 겨울바람도 마다하지 않고 두 손 잡고 밤바다를 거닐던 그날의 따스함에 울렁였다. 함께 웃고 서로를 위로하며 눈물을 닦아주던 그 시간들이 그리웠다. 추억으로 남기고 싶은 순간들이 참 많았던 인연이었다. 살면서 그런 기분 좋은 기억들만 언제고 꺼내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종종 떠오르는 기억들이 있다. 자꾸만 떠올라서 감정을 뒤흔들어 버린다. 다른 부정적인 기억들도 있건만 유달리 그 기억들만이 나를 괴롭힌다.
특별한 존재이고 싶었고 유일한 존재이고 싶었다. 너는 따뜻하고 다정했다. 나를 숨기지 않고 편안하게 드러내도 괜찮았다. 나의 실수나 부족함을 얼마나 인간적이냐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말없이 품에 안아줄 때마다 편안했다. 그 품 속 세상은 모든 것을 잊게 했다. 그 세상에서 영원하고 싶었다.
함께 할 때 보다 함께할 수 없을 때 존재감은 점점 더 확실해졌다. 참을 수 없는 그리움에 너를 느낄 수 있는 네가 없는 그곳에서 눈물을 흘리며 무겁게 짓누르는 커다란 슬픔을 녹여버리고 싶었다. 뜨거운 눈물을 쏟고 쏟아도 소용없었다. 그저 바랄 뿐이었다. 지속적으로 떨어지는 하나의 물방울이 커다란 바위에 구멍을 뚫듯이 내 눈물이 내 안에 단단하게 자리 잡은 커다란 슬픔에 구멍 내기를. 바람에 실려 온 사랑의 씨앗 하나가 그 구멍에 내려앉아 싹 틔워 주기를. 떡잎을 영양 삼아 본잎을 내며 성장하는 그 힘찬 기운으로 슬픔의 바위틈 사이에 더 깊고 넓게 뿌리내려주기를. 그 뿌리가 점점 두터워져 크고 단단한 내 안의 슬픔이 산산이 부서질 그날을 자유로이 맞이하길 간절히 바랐다.
나는 사랑 표현이 심플했다. 말이 아닌 행동이었다. 보고 싶을 땐 달려갔고, 아프기라도 한 날엔 약을 사 들고 얼굴이라도 보아야 안심이 된다며 또 달렸다. 나는 사랑은 그런 거라고 믿었다. 사랑에 정답이 있을까마는 너의 사랑은 나와는 다른 것 같았다. 어느 날, 너의 마음이 과연 사랑인가 하는 의문이 생겼다. 나의 마음은 확실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우리 사이에 대해서 질문하면 "연인이지, 사귀는 거 아니야?"라는 답을 들어야 했다. 나는 석연치 않게 맞다고 응했다. 해결되지 않은 의문은 결국 나의 행동에 제약을 걸었다. 내가 행동하지 않고 표현하지 않으면 유지되지 않을 관계인지 궁금해졌다. 조금 냉랭하게 평소와 다른 말투로 대화를 잇기도 했다. 보고 싶어도 달려가는 대신 꾹 참았고, 놓이지 않는 마음은 모른 척 혼자 달래며 시간은 흐르고 흘렀다.
비 내리는 7월 한 날, 갑작스러운 이별을 통보받았다. 나를 향한 사랑에 확신이 없다는 이유였다. "마음이 오락가락해. 오직 너한테만 내 모든 사랑을 줄 수 없을 거 같아." 함께 하는 동안 나 아닌 또 다른 이를 마음에 함께 품었다니 적잖은 충격이었다. 붙잡진 않았다. 내가 소중하지 않다는 사람을 굳이 붙잡을 이유가 없었다. 관계는 혼자서 유지할 수 없는 것이므로 받아들였다. 모든 관계는 시작과 끝이 있기 마련이다. 언제 끝나도 당연한 거라고 위로했다. 이별 후에 돌아보니 이미 충분히 표현했고 줄 수 있는 것들은 모두 주었으며 후회는 없으니 나는 그것으로 만족했다. 아프고 또 아팠지만 터놓고 하소연할 수 없었다. 혼자 삭여야 했다.
그러다 재회, 장맛비가 내리는 8월 특별한 사건 없이 이틀을 잠수 탄 후 연락이 두절됐다. 무언의 이별 선언이었다. 한참 후 내가 오해한 거라는 말에 다시 재회, 낙엽 지는 10월 서로를 몰랐던 때처럼 지내보자며 이별을 고했다. 마지막 재회 후 눈 덮인 12월 최후의 이별을 선언했다. 이전의 연인과 다시 잘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이유였다. 듣자마자 내 마음은 돌아섰다. 딱히 할 말도 없고 더 들을 말도 없었으며 뒤돌아 생각할 것도 없었다. 최대한 빨리 본래의 위치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이렇게 어이없고 황당하고 허무하게 끝나버릴 사랑을 바라보며 행복이라 느꼈던 내가 그렇게 쉽고 가벼운 사람이었나, 나는 이렇게도 사랑을 모르는 건가.' 혼란스러운 마음을 평온하게 진정시켜야 했다.
"사랑하지 않았던 건 아니야. 한 번도 너를 쉬운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어. 사랑했지."
그때는 사랑이었고 지금은 아니라는 말이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참말 나는 바보였다. 행동하는 사랑은 후회 없는 사랑을 하게 하고 이별 앞에 아쉬움을 남기지 않는다고 믿었건만. 정작 보이는 것도 보지 못하고 그저 내 사랑 표현에만 충실하여 일방적이었던 관계를 진정한 사랑이라고 착각했던 것을 자책했다. 앞으로 내가 먼저 행동하게 될 사랑은 혼자 하는 짝사랑이래도 절대 시작하지 않을 거라고 결심했다.
이별을 인정하는 순간 눈물이 왈칵 터져 나왔다. 이제 보이고 들렸다. 이제 알았다. 우리는 이미 상처받은 사람들이었다. 지난 과거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 게 예의라고 연애에 대해 안다는 사람들은 입을 모았기에 궁금했지만 참았었다. 우리의 상처는 비슷할 거라고 짐작했었다. 나의 상처는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었기에 너의 상처도 그러리라 추측했었다. 언젠가는 다시 되돌려 맺고 싶은 인연으로 생각하고 있을 줄은 상상조차 못 했다. 너도 나처럼 아물지 않은 상처가 아직 아플까 봐 그저 안아주고 보듬어주었는데 정작 나에게 바란 건 그런 게 아닌 모양이었다. 그럴 필요조차 없는, 너는 아직 아픔이라 할 수 없을, 이대로 끝내지 않으려는 너에게는 여전히 진행 중인 관계였던 것이다. 덕분에 나 혼자 한 사랑도 이렇게 아플 수 있구나, 혼자 한 사랑에도 이별은 있구나 알게 되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연락이 왔다.
"다른 사람에게 절대 너를 보낼 수 없을 거 같아. 그동안 걱정되고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어."
당혹스러웠다.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고민하기보다는 진심인지 궁금했다. 내가 말을 잇지 못하자 충분히 그럴 수밖에 없을 거라며 당장 대답하지 않아도 좋다고, 기다리겠다며 생각해 보고 답을 달라고 했다.
"다른 것들을 포기해야 한다면 다 버리고라도 너는 내 사람 해야겠어!"
눈물이 흘렀다.
"내가 뭐라고 너를 울리냐....... 앞으로 이 어깨에 기대어 쉬게 해 줄게. 이제 기대도 돼!"
나를 품은 넓은 어깨가 그렇게 폭신하고 편안했다.
네 번의 이별, 그날의 기억들은 나를 괴롭혔다. 그때는 그랬었는데 지금의 마음은 확실하게 정리된 것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정말 진심인 건지 알고 싶었다. 혹시라도 둔해서 이용당하는 걸 모르는 건 가 갸우뚱하기도 했다. 이별의 이유는 조금씩 달랐지만 결국 원인은 하나였던, 나에게 상처가 된 기억 속에 너의 말들이 자꾸만 떠올라서 너에게 향하려는 내 마음은 제압당하고 있었다.
지우고 싶은 기억이 반복되는 괴로운 시간이 지나야 간신히 숨 쉴 수 있었다. 또다시 그 순간의 그 목소리가 들려오면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한 건가', '내가 포기하는 것이 모두에게 좋은가' 하는 등의 의문에 휩싸였다. 당시의 상황과 감정이 되살아나, 그날의 배신감과 당혹스러움이 설마와 의문을 품게 만들었다.
'사실이 아닌 것에는 신경 쓰지 말자.'
'그저 내 안의 불안이 만들어내는 상상일 뿐이야!' '잡생각에 휘둘리지 말자.'
수 번을 되뇌었다. 상상이 만들어낸 불안은 떨쳐버리라고 말이다.
시간이 흐르면 그 기억들은 자연스럽게 잊히거나 그냥 덤덤하게 떠오르고 쉬이 사라질 때가 오겠지 싶다가도 금세 얼굴엔 한가득 어둠이 스며들었다. 나는 잘못한 것이 없는데 잘못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결국 모든 것을 중단한 채 이불속으로 숨어 들어가야 했다. 잠에서 깨어나도 여전히 괴로웠다. 해소할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너를 내려놓는 것이 해결책일까. 그러기는 싫은데...... 다른 방법이 있다면......'
지울 수 있다면 그 순간들을 지우고 싶었다. 잊을 수 있다면 그날 그 목소리를 잊고 싶었다. 완벽하게 그 모든 기억을 삭제하고 싶었다.
잠 못 이루다 간신히 잠든 후 눈을 뜨면 여전히 컴컴한 어둠이 가득했다. 나의 마음 상태를 돌아볼 기력은 소진된 상태였다. 지친 몸을 괴로운 기억들에 맡긴 채 아슬아슬 버티고 있었다. 끝없이 반복해서 나를 괴롭히는 그 기억 앞에서 눈물만 삼켰다.
몇 날 며칠을 지새우다 문득 잠에서 깨어 어스름을 품은 새벽을 마주한 그날, 나를 괴롭히는 기억들에 지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처음 들었다. 너를 사랑하는 한 잊힐 기억도 아니고, 때가 되면 덤덤해질 기억도 아닌 것이 분명했다. 너와의 시간들을 회상하면 빼놓을 수 없는 사건들이었다. 지금 나를 대하는 현재의 너를 떠올리니 알 것 같았다. 지금의 너를 믿는 마음이 약했던 것이다.
'과거야 어쨌든 간에 현재 나를 사랑하는 너를 믿으면 돼. 너와의 사랑으로 오늘을 살고, 너와의 내일을 꿈꿀 때 행복하니까! 과거의 상처와 아직 나에게 오지 않은 불안을 지금 힘들어할 필요 없잖아!'
지우고 싶은 기억이 또다시 나를 괴롭히려고 달려든다면, 네가 보여주는 확신들을 소환해서 더 굳건한 축을 세우고 흔들리지 않겠다.
(혹시라도 너를 믿기 싫어지는 순간이 온다면 그건 내 마음이 변한 거겠지. 그땐 서로를 위해 솔직해져야지.)
아프게도 했지만 그만큼 나를 성장하게 해 준
사람이 너여서 다행이다. 너를 사랑한 시간 속에서 사랑을 주는 만족을 느꼈고 사랑을 받는 행복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외로움이 무엇인지, 소중함이 무엇인지, 믿음이 무엇인지 너를 통해 깨달은 것이 감사하다. 그 무엇도 지우고 싶지 않은 고맙고 소중한 사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