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in나 essay 13
어찌하여서... 집에 있으면 할 일이 많은 걸까. 여기저기 시선을 옮길 때마다 할 일이 눈에 보인다. 버겁다 느껴지는 날은 급하지 않거나 중요하지 않은 일들을 잠시 미루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에서 보내는 시간은 여유로움이 부족하다. 단순한 일상의 반복은 새로움이 없다. 어쩌다 가끔 할 일도 없고, 일정도 없는 딱히 갈 곳도 마땅치 않은 한가로운 날이 있다. 그런데 막상 외출하기는 귀찮은 그런 날.
그런 날은 어김없이 베란다에 머문다. 베란다는 우리 집에서 바깥세상과 가장 가까이 마주할 수 있는 공간이다. 가만 앉아 있으면 햇빛과 바람 그리고 다양한 생명의 소리들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집에 있는 동안에는 베란다에서 일탈여행을 한다. 따스한 기운이 가득 찬 베란다에 양팔 벌려 큰대(大) 자로 눕는다. 창문 안과 밖을 오가는 훈훈한 공기가 나를 스쳐 지나간다. 봄이 왔음을 슬쩍 알려 주고 떠난다. 베란다에 누운 채로 책을 펼치면 지상낙원이 따로 없다. 그렇게 한참 책을 읽다가 창밖으로 시선을 옮긴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잠시 눈을 쉬인다. 파란 하늘에 하얀 구름을 둥실둥실 떠미는 바람이 온화하고 맑은 날이다. 오늘 이 순간을 마음에 담는다. 이 모든 것들이 누군가에게는 별 것 없는 시시함인지 몰라도 나에게는 소중한 일탈여행이다.
나의 일탈여행은 베란다와 집 밖에서 이뤄진다. 베란다에서 일탈여행을 즐기다가도 순간 집을 나서고 싶은 충동이 마음을 뒤흔들어 놓을 때가 있다. 집 안에만 머문다는 사실이 아쉬운 날, 날이 화창하거나 비가 내리면, 낙엽이 떨어지거나 눈이 내리는 날, 누군가가 보고 싶다거나, 무엇인가 그리워지는 등등 그런 날. 그렇다고 딱히 갈 곳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김없이 집을 나선다. 목적지는 없지만 집 밖으로 나가고 본다. 그저 어디론가 향해 가는 그 과정에서 보고 느끼는 모든 것이 일탈여행의 의미가 된다.
여행이라고 해서 거창하지 않다. 말 그대로 소소한 일상 속 여행이다. 매일 걷던 길, 늘 접하던 일상의 풍경들을 지금 느껴지는 기분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저 발길 닿는 대로 걸으며 만끽하는 것이다. 그렇게 일탈여행을 하다 보면 긍정의 힘과 이해하는 마음이 생긴다. 용기도 불쑥 차오른다. 이 세상에 나는 얼마나 미미한 존재인지 깨닫는 순간이 찾아오고 겸손과 숙연함을 느끼게 된다. 일탈여행을 하고 나면 한 뼘 더 몸 마음이 건강해지고 성장한 느낌이 든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 일상에 최선을 다하고 싶은 마음도 생긴다. 소소하지만 가치 있는 행복한 일탈여행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여행의 마지막 목적지는 대부분이 그렇듯 나에게도 집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집은 가장 편안한 휴식 공간이다. 일탈여행을 끝내고 집에 돌아와 현관문을 열면 '역시 집이 최고다!' 싶은 마음에 온몸의 긴장감이 풀린다. 천상 나는 집순이라는 것을 확신하는 순간이다. 내가 집순이인 이유는 집 밖을 나가는 것이 귀찮고 싫어서가 아니다. 집에 있는 것이 불편하지 않고 싫지 않기 때문이다.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은 충분히 나 자신과 즐길 수 있어서 좋다. 그 시간이 의미 있고 좋아서 '집순이'를 자처하는 것뿐이다. 모순처럼 들리겠지만, 집순이인 나는 사실 집 밖을 좋아한다. 혼자 베란다에서 일탈여행을 하는 것보다 집 밖에서 자연과 함께하거나 타인과 함께 같은 시공에 머무는 것을 좋아한다. 물론 집에 머물면서 혼자인 시간도 좋다.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길 줄도 안다. 혼자 잘 지낼 수 있어야 함께도 잘 지낼 수도 있다는 말에 100프로 공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행을 통해서 자신을 찾길 바란다. 지금까지 알 수 없었던 자신의 새로운 면모를 찾고 싶어서 여행을 계획한다. 그러나 나의 일탈여행은 무엇인가 해야 할 책임이나 압박이 없는 나 자신 그대로 있을 수 있는 시간을 갖는데 목적이 있다. 나의 일탈여행은 일반적인 여행과는 좀 다르다. 오롯이 나 그대로 아무것에도 방해받지 않는 순간을 즐기면 된다. 그저 온전한 자신을 마주하기 위해 머무는 여행이다. 반복적인 일상을 벗어나기 위해 일탈여행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일상에서 미처 느끼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중요한 것들을 놓치지 않고 바로 보기 위해서 일탈여행을 한다. 그런 이유로 혼자 여행을 즐긴다. 혼자 하는 여행은 내가 원할 때 즉시 언제든 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물론 약간의 외로움, 적적함, 쓸쓸함, 허전함이 밀려오기도 한다. 그럴 때면 내가 하는 일탈여행의 이유와 목적을 떠올린다. 금세 그 감정들은 다 잊게 된다.
인생은 짧고 세상은 넓어도 너무 넓다. 세상에는 아직 내가 가지 않은 곳이 많다. 보지 못한 것들도 많다. 알아야 할 것들이 많다. 그래서 나는 1년에 한 번은 가 본 적이 없는 새로운 곳으로 일탈여행을 떠나고 싶다. 나의 일상이 언제 허락해 줄지는 모르겠지만. 희망사항으로만 남지 않길 바란다.
오늘은 소중하고 그리운 이에게로 일탈 여행을 떠나려 한다. 내가 갈 수 있도록 지금 나에게 허락되었으면 좋겠다. 가는 길의 하늘이 무척 아름다울 것 같다. 비 내리는 오늘, 무지개를 만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