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존재들의 화음
나는 심심할 때면 습관적으로 손에 기타를 쥐곤 한다. 그렇게 내가 칠 수 있는 곡들 중에서 랜덤으로 아무 곡이나 골라 연주한다. 그러면 한적한 방엔 진동이 울리게 된다. 손가락으로 튕긴 기타 줄이 진동하여 공기를 타고, 그런 다음 파장이 전달되어 소리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 아름다운 소리는 눈엔 보이지 않는다. 우리의 귀를 타고 몸에 느껴질 뿐이다. 하지만 몸이 느끼기 시작할 때, 소리는 머릿속에 그려지게 된다.
연주를 할 때면 나와 기타는 서로 연결된다. 내가 존재하는 공간 속의 공기는 온통 소리로 가득해지고, 내 머릿속은 그 기타의 소리에 맞춰 그림을 그리게 된다. 그렇게 그 그림 속에서 시를 적는다. 그러니, 여기서 진동은 나와 기타를 잇는 하나의 매개체인 셈이다. 정적인 상태에서 발생하지 않으며, 줄의 움직임을 통해서만 발생하는 이 매개체는 마치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를 떠올리게 만든다.
심장은 항상 뛰고 있다. 우리는 이 진동이 없으면 나와 나의 육체를 연결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그렇게 되면 나와 타인도 이어질 수 없게 된다. 심장의 미묘한 떨림과 흔들림이 보이지 않는 감정의 파장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결국 이 심장의 떨림이 서로를 사랑하고, 미워할 수 있도록 하는 매개체인 것이다. 한 인간의 존재란 이렇게 끊임없이 흔들리는 것이며, 그 흔들림이 자신과 외부의 세상을 잇게 만든다.
당신도 언제 한 번쯤은, 누군가의 가슴에 기대어 심장의 떨림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 미묘한 떨림은 그가 살아있음을 느끼도록 해주고, 동시에 내가 살아있음 또한 느끼게 해 준다. 누군가와 직접 대면하여 대화를 할 때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주고받는 모든 것은 사실 다 진동으로 이루어진다. 상대방의 목소리, 눈동자의 떨림, 그리고 몸짓. 이것들이 하나의 정보가 되어 내 감정에 파동을 전달하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이 미묘한 단서들을 주고받으며, 나라는 개인이 고립되어 있지 않고, 세상과 내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는 거다.
하지만 기타의 소리가 아름답게 울려 퍼지려면 먼저 '조율'의 과정이 필요하다. 조율이 잘 되어 있을 경우, 각각의 기타 줄은 서로의 소리를 합쳐 화음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반면에 조율을 하지 않으면 아무리 기타를 잘 치는 사람이어도 단순한 멜로디조차 아름답게 그려낼 수 없으며, 그저 소음만이 울려 퍼지게 된다. 이처럼 우리의 소통 또한 언제나 조화롭게만 이뤄지진 않는다. 서로의 어긋남은 결국 갈등과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그렇게 화음으로 이루어져야 할 멜로디는 듣기 싫은 소음으로 만들어지게 된다. 다만 기타는 줄의 음이 맞지 않을 경우, 조율기를 통해 줄을 팽팽하게 당기거나 느슨하게 풀면 그만이다. 그러나, 한 번 깨져버린 인간의 사이는 용기 없인 다시 화음을 맞추기가 꽤 까다롭다.
여기서 진동은 '지속성'을 지닌다는 것을 기억하자. 물리적으로는 금방 감쇠하고 사라지게 되지만, 그 흔적과 영향력은 에너지 보존 법칙에 의해 다양한 방식으로 남게 된다. 베토벤과 모차르트가 풍긴 진동은 아직까지도 여러 미디어를 통해 사람들 귀로 흘러들어 간다. 하지만 이렇게 꼭 음악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의 작품만이 지속성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누군가가 해준 위로의 말들이 당신 가슴속에 영원히 남아 있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누군가가 던진 쓰레기 같은 말들도 당신 가슴속에 여전히 남아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반대의 경우도 동일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도 모르게 누군가는 당신의 소리를 담아내, 영원히 가슴속에 간직하며 살아갈 수 있다. 이러한 모든 과정들도 지속성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러니, 이왕이면 좋은 소리를 남겨주는 것이 뿌듯하지 않을까?
그런 희망으로 속삭여본다,
만약 이 글에도 울림이 있었다면
당신은 나의 진동을 통해
그림을 그릴 것이고
눈엔 보이지 않아도
나와 당신의 흔들림은
충분히 화음이 되어
시가 될 수 있다
우린 매순간 알게 모르게, 흔들리는 존재들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