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헛발질

by 구민성

단편소설--헛발질

<1>

“어이, 좀 빨리 와. 뭘 그리 꾸물거려?”

강명호는 뒤에 따라오는 도용규를 돌아보며 타박했다.

“뭐가 그리 급해? 우리가 빨리 간다고 비행기가 빨리 뜨나?”

도용규는 강명호에게 잘 들리지도 않게 혼자만 고시랑댔다.

연휴도 아니고 주말도 아닌데 공항은 붐빈다. 모두 불경기라고 하지만 공항에는 사람들의 물결로 활기가 넘친다.

공항의 분위기를 보고 박정재는 우리나라의 경제력이 많이 나아졌다고 만족했지만, 강명호는 사람들이 아주 헤퍼졌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도용규는 외국 여행보다는 국내 관광이 살아나야 내수경제의 활성화에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똑같은 공항의 모습을 두고 세 사람의 생각은 이렇게 다른 것이다.


지금 동갑내기 세 친구는 캐나다 여행을 떠나면서 무척 들뜬 표정들이다. 사실 그들은 4년 전에 회갑기념으로 부부 동반 여행을 추진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박정재의 부인이 폐암 진단을 받으면서 차질이 생기게 되었다.

박정재는 학교 근무 이외의 시간에는 아내의 병구완에 정성을 기울였다. 하지만 2년 정도 투병하던 아내는 재작년에 먼 하늘로 떠나고 말았다. 박정재는 아내와의 이별 이후에 심한 상실감과 싸워야 했다. 그 상실감은 마치 파도처럼 강하고도 반복적으로 몰아쳤다. 술도 많이 마시고 십 년 이상 끊었던 담배도 다시 피우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지난달에 초등학교 교장을 끝으로 40년의 교직 생활도 끝이 났다. 반려자와의 이별, 직장에서의 은퇴, 이 두 가지의 큰 변화로 우울증의 증세를 보이던 그는 정신과 병원에도 다니기 시작했다.

교육계에서 냉철한 이성과 합리주의자로 유명했던 그도 자신의 큰 변화 앞에서는 힘없이 흔들렸다. 언젠가는 헤어질 것을 아는 것은 이성이다. 그걸 알면서도 계속 끄달리는 것은 감성이다. 사람은 때때로 감성의 파도로 이성의 방파제를 무너뜨리기도 한다.

박정재의 세 자녀는 아버지의 위로 방법으로 해외여행을 생각했다. 물론 세 자녀는 여행이 완벽한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차선책이라도 찾아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상황이 더 나빠질 것은 뻔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버지 혼자 보내기가 걱정돼서 죽마고우 두 분과의 동행을 권했던 것이다.

강명호는 할인마트를 운영하는 자영업자인데 성격이 시원시원하고 아주 낙천적이다. 그는 벌써 30년 이상을 하루도 안 빼고 헬스클럽에 다니고 있다. 그래서 어지간한 20대 청년보다 힘과 근육이 좋다. 본인 자신도 군대 시절의 몸보다 더 좋다고 자랑할 정도이다. 재산도 꽤 많이 모아서 노후 대책에는 상당히 여유롭다. 요즘에는 노래방에도 자주 가고, 여자 친구도 만나면서 젊었을 때보다 더 신나게 산다.

지방 국립대학의 철학과 교수인 도용규는 말수가 적고 생각이 깊지만 친구가 별로 없다. 앉은자리에서 술 석 잔은 못 마시지만, 커피 석 잔은 마시는 취향이다. 그는 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이 박사, 김 박사’처럼 성씨 뒤에 박사 호칭을 붙이면 싫어한다. ‘도 박사’는 잘못 들으면 노름꾼이 되어버려 깐깐한 그의 심사를 긁기 때문이다.

사실 세 친구는 성격이나 행동 스타일이 너무 달라서 친구 관계가 오래 유지되기 어려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워낙 어릴 때부터 한 골목에서 자란 배꼽 친구였으니까 늘 다투고 삐치고 화해하면서 60년 이상을 어울린 것이다.

이번 여행만 해도 그렇다. 56세가 되던 해에 회갑기념 부부동반 여행을 대비해서 5년짜리 적금을 시작했다. 그러나 박정재 부인의 발병으로 여행이 연기되었고, 그때 도용규는 적금을 N 분의 1로 나누자고 했다. 하지만 강명호는 의견이 달랐다.

“어이, 도 박…, 아니 도 교수. 그렇게 하면 박 교장의 입장이 좀 그렇잖아? 그러니까 사모님이 회복하실 때까지 조금 미루자고.”

도용규는 두어 번 반대했으나 결국 강명호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그러던 것이 박 교장의 부인 별세와 정년퇴직까지 연결된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도용규의 부인이 갑상샘암 수술을 받게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강명호의 부인도 혼자 나서기가 영 어색해서 그냥 주저앉았다. 하지만 박정재의 자녀들이 간곡히 권해서 남자들만 어렵사리 나선 여행길이다.

“이야, 멋있다. 아주 미인이야.”

공항 매점에서 뭔가 고르고 있는 한 여인을 보고 강명호가 뱉은 말이다. 그녀는 동양인이라도 키가 크고 늘씬했다. 선글라스를 써서 눈빛은 볼 수 없었지만, 전체적으로 이지적인 느낌을 풍겼다. 진달래색 계통의 원피스를 입었는데 보기 좋은 몸매였다. 단연 군계일학의 글래머였다.

강명호가 도용규의 팔을 툭 치면서 턱짓으로 그녀를 가리켰다. 도용규는 안 보는 척하면서 흘끔거렸지만, 강명호는 대놓고 말했다.

“이야. 저 여자 몸 좋아 보이네. 박 교장도 한 번 보시게.”

“…….”

그러나 박정재는 딴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예 관심이 없다는 표정이었다.

“어허, 박 교장. 한 번 보라니까. 진짜 몸 좋은 여잔데…….”

“됐어. 몸 좋은 여자라면 몸 좋은 자네나 많이 보라고.”

박정재가 외면하는 동안에도 도용규는 그녀를 흘끔거렸다. 시험 커닝하는 학생처럼 눈동자만 재빠르게 돌렸다. 하지만 강명호의 너스레는 계속되었다.

“아니, 박 교장. 나는 집에 임자가 있고, 자네는 늘 혼자니까…….”

“그만해. 혼자 산다고 개나 소나 다 기웃거릴 줄 알았어?”

“어, 어. 그게 아니고… 나는 그냥…… 미안하네.”

분위기가 갑자기 이상해졌다. 강명호는 이내 박정재의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

“이 친구야, 뭘 그런 말로 오해를…… 기분 풀어.”

강명호는 박정재의 귀에 대고 ‘여보게 친구~ 웃어나 보게~’를 몇 소절 불렀다. 그 노래는 몇 년 전에 타계한 가수 박상규의 출세곡이고, 노래방에서 박정재가 제일 즐겨 부르는 18번이다.

기내에 들어와서 좌석 번호대로 앉았다. 아까 매점에서 보았던 진달래색 원피스가 앞줄의 창 쪽에 앉고 옆에는 도용규가 앉았다. 도용규는 기분이 무척 좋아 보였다. 뒷줄의 창 쪽, 그러니까 여자의 바로 뒤에는 박정재가 앉고 옆에는 강명호가 앉았다. 비행기가 이륙하자 강명호가 앞자리 도용규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말했다.

“어이, 도 박… 아, 도 교수. 나 좀 봐.”

강명호는 도 박사라고 부를 뻔하다가 아차 싶어 도 교수로 급히 바꾸었다. 그는 박사를 박사라고 부르지 못하니 이게 무슨 홍길동의 운명인가 생각되어 피식 웃었다.

“왜 그래?”

도용규가 목만 뒤로 돌리면서 묻자 강명호는 재빠르게 말했다.

“내가 도 교수님과 할 얘기가 좀 있으니 이리 오시게. 박 교장하고 자리 바꾸면 되겠네.”

“뭐 할 말은 나중에 하지. 나 좀 피곤하니까.”

도용규는 자리를 바꾸고 싶지 않았다. 옆자리에 미인을 두고서 내가 왜 자리를 바꾸나 하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설 강명호가 아니다.

“어이, 교수님. 박 교장 자리는 창밖의 구름도 잘 보이고 아래로 보이는 산과 강이 아주 멋져. 이리 와 보라고.”

그렇게 시작된 강명호의 끈질긴 고집으로 도용규는 마지못해 일어섰다. 그런데 이번에는 박정재가 눈을 지그시 감고 묵묵부답이었다. 강명호는 또 박정재를 설득해야만 했다.

“이봐, 박 교장. 내가 도 교수에게 긴히 할 얘기가 있으니 자리 좀 바꿔주게.”

박정재도 몇 번을 거부했으나 강명호의 끈질긴 설득을 당할 수가 없었다. 설득이 아니라 강명호 특유의 고집인데 어릴 때부터 그걸 이기기는 정말 어려웠다.

강명호는 옆자리로 옮겨 앉은 도용규에게 구름과 산과 강의 경치를 이야기했다.

아닌 게 아니라 맑은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경치는 정말 좋았다. 달리는 자동차는 고무지우개 같고, 전봇대는 연필처럼 보였다. 푸른 산과 길게 흐르는 강물이 여행객에게 손을 흔드는 것 같았다. 날개 옆에 보이는 하얀 구름 덩이는 솜이불처럼 편안해 보였다.

강명호는 그것들이 모두 제 것인 양 우쭐거리며 자랑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말을 끊은 강명호가 수화도 아닌 이상한 손짓으로 뭔가를 표현했다. 앞자리의 두 사람을 가리키면서 양손 검지를 붙였다 뗐다 하는 동작인데 잘 붙여보자는 뜻으로 보였다.

잠깐의 침묵이 어색했는지 강명호는 날씨 이야기를 하다가 지구 온난화의 원인과 대책까지 장황하게 들먹였다. 또 60대의 근력운동과 유기농 채소의 중요성까지 늘어놓더니 스르르 잠이 들고 말았다.

강명호가 잠들었지만, 도용규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고 싶은 희망을 말하기가 어려웠다. 박정재는 앞자리로 떠밀려 왔어도, 옆의 여자에게는 눈길도 한 번 주지 않았다. 신문만 뒤적거릴 뿐 입을 떼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선생님은 어디 사세요?”

한참 후 여자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걸자 박정재는 적잖이 당황했다.

“저요? … 네 … 저, 서울 … 대림동에…….”

“어머, 그러세요. 저는 남양주에서 살다가 5년 전에 캐나다로 이민 갔어요.”

자신의 이름을 오수미라고 밝힌 그녀는 아주 싹싹하고 활달해 보였다. 처음에는 밴쿠버에서 작은 레스토랑을 열었는데 무슨 문제가 생겨서 3년 전에 그만두었다고 했다. 지금은 여행사에 취직하여 가이드 활동을 하고 있단다.

20년 취미의 플루트 연주를 아주 즐기는데, 여행객 안내를 하다가 짬짬이 연주를 하면 박수도 많이 받는다고 했다. 특히 한국인들에게 목포의 눈물, 동백 아가씨, 신라의 달밤 등을 연주하면 팁도 조금씩 받는다며 좋아했다. 고향의 봄을 연주하면 모두 합창하다가 운다면서 밝게 웃었다. 눈빛이 깊고 왼쪽의 볼우물이 귀여웠다.

박정재는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대학 학번으로 나이를 짐작했다. 아마 자기보다 아홉 살이나 열 살 정도 적은 것 같다. 두 사람은 기내에서 제공하는 쿠키와 커피를 함께 들면서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로 오수미가 말을 많이 하고 박정재는 질문에 대답이나 조금씩 하는 정도였지만 즐거워 보였다. 오수미에게서는 연한 오이 향이 풍기는 것 같고, 긴 손가락은 플루트를 연주하기에 적합해 보였다.

뒷자리의 강명호는 깼다가 와인을 두어 잔 마시더니 다시 코를 골기 시작했다. 도용규는 음악을 듣거나 신문을 보기도 했지만, 가끔 창밖을 보면서 무료함과 싸우고 있었다. 그러다가 낮은 목소리로 박정재를 불렀다.

“어이, 박 교장. 저…… 아니야.”

도용규는 본래대로 자리 바꾸자는 말을 못 했다. 아까 강명호가 손가락을 붙였다 뗐다 하던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선생님, 제가 그래도 명색이 전문 가이드인데 이틀 정도는 안내해 드릴게요.”

“아이고, 정말요?”

몇 마디 주고받아서 조금은 편해진 박정재가 반갑고 고마운 마음으로 화답했다.

“그럼요. 친정 오라버니들 같으니까 제가 무료 서비스해 드리죠. 근데 사흘째부터는 단체 손님 예약이 있어서 곤란해요.”

“허허, 이틀이라도 고맙습니다. 제 친구들도 좋아하겠네요.”

<2>

오후 2시의 밴쿠버는 날씨도 쾌청했다. 오수미의 능숙한 어드바이스로 세 친구는 입국 절차를 쉽게 마쳤다. 그들은 오수미의 안내로 호텔에 가서 여장을 풀었다. 오수미가 직접 운전하는 차는 쌍용 무쏘 290 SR이었다. 좀 오래되기는 했으나 외국에서 보는 한국차라서 무척 반가웠다. 그러고 보니 길거리에 한국 자동차들이 제법 많이 보였다.

밴쿠버 시청을 거쳐 도르셋 칼리지를 둘러보았다. 한국인 유학생이라는 세 청년을 만나서 반갑게 악수를 나누었다. 털북숭이 외국인 손보다 우리 청년들의 손이 깨끗하고 부드러웠다. 강명호는 청년들에게 열심히 공부하라는 덕담과 함께 커피를 사줬다.

주택가에는 목조 주택이 많아서 그런지 전체적인 분위기가 차분하면서도 건강해 보였다. 오수미는 운전하면서 캐나다의 역사, 문화, 정치, 사회 복지 등에 대해서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그녀의 안내는 군살이나 걸림이 전혀 없고 프로답게 매끄러웠다.

세 친구는 이구동성으로 캐나다의 넓은 국토와 깨끗한 자연이 부럽다고 했다. 말 그대로 축복받은 대륙이라고 감탄했다. 첫날은 시간도 모자랐고 몸이 피곤하여 가까운 몇 곳만 보고 일찍 마쳤다. 오수미는 자신의 집이 두 블록 떨어진 가까운 곳이라며 혼자 차를 몰고 돌아갔다.

둘째 날, 세 친구는 오전 여덟 시에 식사를 마치고 관광에 나섰다. 오수미는 무릎이 낡은 청바지와 포도주색 티셔츠가 잘 어울렸다. 그렇게 옷을 입으니까 더 젊고 몸매가 도드라져 보였다.

“수미 씨, 참 예뻐요. 애인 하나 만들어야겠는걸.”

“아이고, 강 사장님. 아침부터 숙녀를 놀리세요?”

“놀리다니요? 천만의 말씀. 그리고 애인도 멀리서 찾을 거 없지. 안 그래요?”

강명호는 오수미에게 농을 걸면서 눈으로는 박정재를 보았다. 간단히 음료수를 마신 네 사람은 유쾌하게 웃으며 차에 올랐다. 운전하는 오수미의 옆 자리에는 강명호에게 등을 밀린 박정재가 앉았다. 뒷줄의 왼쪽에 도용규가 앉고 오른쪽에는 강명호가 앉았다. 그렇게 앉고 보니 비행기에서 앉았던 그대로가 되었다. 이것도 모두 강명호의 결정인데, 귀국할 때까지의 지정석이 되고 말았다.

연어 산란지로 유명한 프레이즈 강을 따라서 무쏘는 힘차게 달렸다. HOPE라는 원목 간판의 내력을 이야기 듣고 한국인 부부가 경영하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그들은 유리창에 붙은 수많은 종이 태극기를 반가워했고 불고기, 김치, 상추, 생마늘, 콩나물무침과 된장국도 맛있게 먹었다. 도용규는 뭉클한 감동까지 함께 비벼 먹는다고 표현했다.

현지인들은 밤 9시까지 불도 안 켜고 테니스 게임을 즐기는데 백야 덕분이란다. 이것을 도용규는 ‘하얀 밤’이라고 풀이했다.

로키산맥의 시작점인 해발 6,000m급 로건 산과 마릴린 먼로의 영화 촬영지 주변도 경치가 빼어났다. 캡룹스를 지나면서 석탄 운반용 열차의 칸 수를 세던 강명호가 끝내 포기하니까 오수미는 113칸이라고 알려줬다.

광활한 인삼 농장에 설치된 ‘高麗人蔘’이라는 대형 간판은 중국 한자인데 주인은 일본인이란다. 그런데 왜 ‘고려’를 쓰냐고 물었더니 한국산 씨앗이라서 그렇단다. 씨앗은 한국, 땅은 캐나다, 글자는 중국, 경영은 일본, 이렇게 인삼 한 가지에도 4개국이 얽혀있으니 글로벌 시대라는 말이 실감 났다.

박정재는 높은 산을 좋아했고, 강명호는 넓은 평원에 반했고, 도용규는 긴 강에 감동했다고 말했다.

“신선한 공기는요?”

오수미의 질문에 일행들이 공감을 나누면서 호텔로 돌아왔다. 한식당에서 저녁을 먹은 세 친구는 방에 올라가서 옷도 갈아입었다.

“어이, 박 교장. 자네 오늘 외박하게. 내가 책임질 테니까.”

강명호가 너스레를 떨자 박정재가 정색했다.

“외박이라니? 이미 우리는 집 떠나서 외박하고 있잖아?”

“그게 아니라, 여기 호텔에는 도 박… 아니, 도 교수랑 내가 잘 테니까 박 교장은 딴 데 가서 자라구.”

“딴 데라니? 좋은 호텔 두고 어디 가라고?”

박정재가 뚱하게 물었다.

“하여간 선생들은 눈치가 이래. … 그게 말이야. 수미 씨 하고 밖에서 좀 놀다가 둘이서 같이 자고…….”

“시끄러워, 이 사람아. 난 또 무슨 말이라고…….”

박정재가 펄쩍 뛸 때 노크 소리와 함께 오수미가 들어왔다.

"오라버니들, 모두 나오세요. 제가 한 잔 살게요. “

“아니, 도 교수랑 나는 그만 잘 테니까 박 교장만 데려가세요.”

그 말에 오수미는 눈이 똥그래졌고 박정재는 강명호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술이라면 내빼는 도용규도 강명호의 독재적인 결정에는 입이 툭 튀어나왔다. 이러니 저러니 밀고 당기다가 결국은 모두 나갔다. 오수미는 평소에 가끔 가는 단골집으로 일행을 안내했다. 코냑을 몇 잔씩 마시고 분위기가 좀 풀어졌을 때 강명호가 도용규의 손을 끌고 슬그머니 일어섰다.

“우리 교수님, 딱 한 잔에 흐물거리네. 내가 방에 데려줘야겠어.”

강명호는 박정재에게 눈을 찡긋하더니 오수미에게 정중하게 말했다.

“수미 씨, 교장 오라버니 잘 모셔요.”

그러나 오수미보다 빨리 박정재가 말했다.

“어이, 강 사장. 나도 금방 갈 거야. 술 다 마셨어.”

“아니, 금방 오지 마. 내일 아침까지는 방문 안 열어줄 거니까.”

내 나이가 어때서를 흥얼거리면서 밖으로 나온 강명호가 도용규에게 말했다.

“도 교수. 우린 집에 마누라가 있지만, 정재 저 친구는 2년 동안 외로웠을 거야. 그러니까 우리가 자리를 좀…….”

“알았어. 난 어차피 술자리에 오래 있는 게 싫으니까.”

도용규는 한 잔 마신 술에 배포가 좀 커졌는지, 평소 같잖게 호기를 부렸다.

“그래, 고마워. 대신 내가 커피 한 잔 살게.”

강명호와 도용규가 길 건너 커피숍으로 들어갈 때, 엘크 여남은 마리가 찻길을 천천히 건너고 있었다. 여기에서는 아무도 동물을 잡거나 괴롭히지 않는다. 모든 생명체가 더불어 사는 곳이다.

오수미는 박정재와 함께 자신의 집으로 갔다. 은은한 조명 아래서 클리프 리차드의 CD를 틀었다. 그들은 와인을 한 잔씩 더 마시고 키스했다. 감미로운 와인 향을 함께 나누면서 가슴이 뜨거워졌다. 오수미는 스스로 옷을 벗었다.

박정재는 정말 오랜만에 여자를 안았다. 아내의 얼굴이 잠깐 떠올랐으나 오수미의 헌신적인 서비스로 모처럼 만족한 사랑을 나누었다. 박정재는 오수미가 젊은이들처럼 탄력 있고 아름다운 몸을 가졌다고 말했다. 그리고 고맙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두 사람은 다음 날 아침 늦게까지 잠을 잤다. 문 두드리는 시끄러운 소리에 눈을 떴는데 벌써 10시 20분이다. 오수미가 문을 여니까 체격이 큰 백인 남자가 확 들이닥쳤다.

오수미의 전 남편 데이비드였다. 사업에 망한 그는 의처증에다가 황인종을 경멸하는 성격으로 변해서 오수미에게 폭행을 일삼았다. 알코올 중독자인 데이비드는 낮이나 밤이나 항상 술에 취해서 패악질을 반복했다. 그러다가 작년 연말에 이웃들의 신고로 법정 이혼을 당했다. 캐나다는 여성과 노인, 어린이, 동물에게 천국과 같은 나라이기 때문에 가해자에게 매우 엄격하다.

데이비드는 물건을 마구 던지면서 오수미를 때리기 시작했다. 박정재가 제지하려고 그에게 달려들었으나 거칠고 강력한 힘을 당할 수가 없었다. 박정재도 오수미와 같이 폭행을 당했다.

엎치락뒤치락하는 중에 강명호와 도용규가 들어왔다. 힘이 월등한 강명호가 뒤에서 팔을 꺾으니 데이비드도 속수무책이었다. 한참을 버둥거리며 악쓰던 데이비드를 강명호가 완벽하게 제압했다. 강명호는 청 테이프로 데이비드를 묶었다.

잠시 후에 경찰들이 와서 데이비드를 연행해 갔다. 술 냄새를 풍기면서 발악하던 그도 경찰을 보고는 꼬리를 내렸다. 이미 전과자인 그는 가중처벌을 겁내는 망나니 잡범에 불과했다.

네 사람은 집을 대충 정리하고 소파에 앉아서 커피를 마셨다.

“어떻게 알고 왔어?”

이마 상처에 반창고를 붙인 박정재가 물었다.

“응, 아무리 기다려도 안 오기에 둘이서 눈 맞아 야반도주했나 하고 찾아 나섰지. 스마트폰도 안 받고 말이야.”

강명호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다.

“이 난리 통에 스마트폰 벨 소리가 들리겠어?”

“그러게 말이야.”

박정재의 말에 도용규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집은 어떻게 아셨어요?”

오수미가 물었다.

“집을 몰라 호텔에서 나오는 즉시 무쏘만 찾아서 다녔지요. 불과 이백 미터 거리에 수미 씨의 차가 있더군요.”

그렇게 해서 사태가 해결된 것이다. 박정재는 두 친구에게 거듭 고맙다고 인사했고, 강명호는 느물 느물 웃으며 한마디를 걸쳤다.

“지난밤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박 교장 얼굴이 이리도 밝을까?”

수줍게 웃던 오수미는 단체 관광객과의 약속을 이야기했다. 그녀는 자신의 차를 강명호에게 주고 버스로 출근했다.

세 친구는 브리티시컬럼비아주의 주도인 빅토리아 시청을 둘러보고, 캐나다인들이 보물섬이라고 부르는 밴쿠버 섬까지는 대형 유람선으로 갔다. 캐나다 최대의 식물원이라 하는 부차드가든은 듣던 대로 굉장했다. 이탈리아, 일본 등 여러 나라의 정원이 제각기 멋을 뽐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풍경에 감탄사를 연발하다가도 한국의 정원을 못 본 것은 아쉬웠다. 왜 우리나라의 정원은 없으며, 그 흔한 무궁화와 봉선화는 모두 어디에 있는지 안타까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리고 이틀의 관광을 더 하고 귀국할 때는 오수미가 밴쿠버 공항까지 태워줬다. 오수미는 공항에서 박정재에게 편지 봉투를 주었다. 박정재가 기내에서 뜯어본 봉투 속에는 손글씨로 쓴 짧은 메모가 있었다.

<선생님과의 특별한 만남을 오래 기억하겠습니다. 부디 건강하시고, 살다가 생각나면 연락 나누기를 희망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ㅡ밴쿠버의 한국인, 오수미 올림>

<3>

귀국한 박정재는 먼저 산으로 들어갔다. 아내가 죽기 전에 함께 왕국을 건설하자면서 샀던 산이다. 아내는 꽃을 무척 좋아했다. 남이 버려서 다 시든 화분도 아내가 돌보면 살아난다. 모든 꽃을 다 좋아하지만 특히 수수한 야생화를 더 좋아했다. 누가 뽑아가도 화나지 않고, 누구에게 나눠주어도 아깝지 않은 야생화는 흔하다. 그런데 아내는 그 흔한 야생화들을 귀하게 돌보는 마음을 가졌다. 이제 아내는 먼 하늘로 떠났지만, 박정재는 아내와의 약속을 잊을 수가 없었다.

집에 가만히 있으니까 자꾸만 허물어지는 느낌이 들어서 참을 수 없었다. 그래 혼자서라도 산을 개발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박정재는 날만 새면 도시락 싸 들고 산으로 갔다. 엔진 톱으로 참나무 여남은 개를 베어내고 그 자리에 작은 텃밭을 만들었다. 고추, 가지, 들깨, 취나물, 머위, 도라지 등을 심었다. 일하는 동안에는 힘든 줄도 모르고 설치지만, 저녁에 집에 오면 온몸이 쑤시고 당겼다. 그래도 날이 새면 또 새로운 기분으로 산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쉬는 날 없이 일을 강행하다가 피로가 누적되었고, 일의 진척은 조금씩 느려졌다. 박정재는 서서히 지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혼자 일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비닐 하나를 펼칠 때 반대편에서 누군가 잡고만 있어도 수월할 텐데 혼자 이쪽저쪽을 뛰어다녀야 하니 힘들고 느렸다. 바람까지 불면 더 어려웠다.

게다가 말 상대가 없는 것도 문제였다. 하다못해 힘들다는 하소연이나 아프다는 엄살도 상대가 있어야지, 혼자서 늘어놓으면 맛이 안 난다. 그저 옆에서 푸념을 들어만 주어도 사람이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지친 몸을 쉴 때는 사람이 간절히 그리웠다.

박정재는 말수가 부쩍 줄어들었다. 온종일 말이라곤 거의 하지 않는다. 아들과 딸들의 전화가 와도 고작 오 엑스 식의 단답형 대답만 하고 빨리 끊어버린다.

말수가 줄어드는 것에 정비례해서 식사량도 줄어들었다. 그런데 말수와 반비례하는 것이 더 문제였다. 술이 그렇고 담배도 마찬가지다. 기침이 잦고 한숨도 자주 쏟아진다.

강명호에게는 박정재의 변화가 예사로 보이지 않았다. 체중은 줄어들고 근력도 떨어지면서 구부정하게 야윈 모습이다. 본래 말이 헤프지는 않지만, 요즘은 더욱 말이 없다. 박정재에게 깊은 고뇌의 그림자가 비치는 것 같았다.

눈이 하얗게 내리는 날에 강명호는 박정재의 집으로 찾아갔다. 그러나 박정재는 없었다. 전화도 받지 않았다. 어디 갔을까 생각하다가 얼마 전에 들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우리 산은 스마트폰도 안 터지는 곳이야.”

강명호는 불안한 생각을 감출 수 없었다.

‘혹시 이 친구가 나쁜 생각이라도…… 몹쓸 짓이라도 하면 어쩌나?’

불안감을 더 참지 못한 강명호는 산으로 급히 차를 몰았다. 임도에는 눈이 소복하게 쌓여있었다. 저만치 산길 한 편에 청색 더블캡이 보였다. 새하얀 배경에 파란 자동차는 괴기스러울 정도로 선명해 보였다. 강명호는 차에서 내려 더블캡으로 뛰어갔다.

다행히 박정재는 운전석에 앉아있었다. 강명호가 안도의 숨을 몰아쉬면서 옆자리에 올라타서 보니 박정재의 눈이 붉게 젖어있었다.

“박 교장. 여기서 뭐 해?”

“어, 왔어? 마누라 생각 좀… 그 사람은 산을 좋아했고, 눈도 좋아했고… 눈 쌓인 산은 더 좋아했지.”

“이 사람 참… 무슨 사춘기 머슴애야? 그런 감상에 젖을 여유가 있어?”

“왜, 마누라 없으면 추억도 다 지워야 하나?”

“아니, 그게 아니고……. 저… 사실 자네에게 할 말이 있는데…….”

항상 시원시원한 강명호도 이번엔 쭈뼛거리며 말머리가 잘 열리지 않는다.

“무슨 말인데 그렇게 뜸 들이나? 우리 사이에 못할 말이 뭐 있다고 그래?”

“어이, 박 교장. 내 말 예사로 듣지 말고 귀담아 들어.”

“글쎄, 뭐냐니까?”

박정재의 재촉에 강명호는 침을 꿀꺽 삼키고 말머리를 열었다.

“자네, 재혼하면 좋겠어. 우리 집사람이 잘 아는… 참한 사람이 있는데…….”

“싫어이. 나 재혼 안 해. 얼마나 더 살겠다고 그렇게 귀찮고 피곤한 짓을 해?”

박정재는 한마디에 잘라버렸다. 하지만 강명호는 끈질기게 재혼을 권했고, 오늘 갑자기 결정이 어려울 테니 사나흘 후에 다시 이야기하자고 했다.

그 후에도 강명호는 박정재의 재혼을 세 번이나 더 권했다. 명분은 확실했다. 나이가 들수록 부인이 필요하다, 자식이나 친구가 있어도 부인은 또 다르다, 계속 혼자 살면 건강에 무척 해롭다 등의 이야기로 간곡하게 권했다.

철벽 같던 박정재의 마음도 서서히 움직였다. 저녁에 집에 돌아오면 썰렁한 거실이 너무 싫었다. 힘들게 식사 준비를 하지만 혼자 먹는 밥이 잘 넘어갈 리 없었다. 설거지하다가 물이라도 조금 튀면 왈칵 짜증이 났다. 청소, 세탁기 돌리기, 빨래 정리 등의 시간도 만만치 않았다.

심지어 등이 가려워도 화가 났다. 문틀의 각진 모서리에 등을 붙이고 좌우로 흔들다가 눈물이 핑 돌기도 했다. 아내가 등을 긁어주면 아주 시원했는데, 그때는 고맙다는 말도 안 했었다. 생활의 불편을 실감하는 중에 친구가 계속 권하니 마음이 조금씩 흔들렸다. 자꾸 권하면 남의 소도 잡아먹는 게 사람의 마음이라는 말이 생각나서 씁쓸하게 웃었다.

일요일에는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박정재는 산에 가지 않고 원두커피를 내려서 혼자 마시기 시작했다. 역시 커피는 이런 날씨에 딱이야 하면서 두어 모금 마시는데 또 아내 생각이 울컥 났다. 커피를 잘 마시지 않는 사람이지만, 비 오는 날에는 커피 향이 좋다면서 한 모금만 달라곤 했었지. 맛보다 향을 더 좋아했던 아내가 문득 그리워졌다. 그는 마치 아내의 생각을 털어내기라도 하듯이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박정재는 소파에 앉아서 TV를 켰다. 로맨스 외화에 나오는 외국인들은 만나면 키스하고 쳐다만 봐도 섹스한다.

갑자기 오수미가 생각났다. 그녀와 나누었던 그 밤의 섹스가 기억났다. 친절하고 활달하고 헌신적인 여자로 추억하고 싶다. 한 번쯤은 더 만나고 싶기도 했다. 오수미에 대한 생각과 영화의 정사 장면이 겹쳐져서 좀 산만해졌다.

채널을 돌리니까 송해 씨가 진행하는 전국노래자랑이 나왔다.

‘저 어른은 아흔인데도 여전히 활기차게 사는구먼. 실향의 아픔에다가 아들까지 하늘로 먼저 보냈지만 나보다 더 역동적이네. 부인이 있어서 그럴까?’

이런저런 생각이 순서 없이 뒤섞였다. 졸음이 슬슬 밀려왔다. 설핏 잠이 들려는 순간에 스마트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선생님, 저 오수미예요.”

라켓에 맞은 셔틀콕처럼 생기 넘치는 음성이었다.

“아, 수미 씨. 오랜만이네요.”

“잘 계셨어요, 선생님?”

“나야 뭐 잘 있지요. 수미 씨도 건강하지요?”

“네, 선생님. 그런데 저 지금 서울에 있어요.”

“어, 정말요? 언제 왔어요?”

“어제 왔어요. 이번 주말에 언니 아들이 결혼식 해요. 회계사 언니가 너무 바빠서 조카는 제가 거의 다 키웠거든요.”

박정재는 문득 오수미를 만나고 싶어졌다. 그녀의 오이 향기를 맡고 싶었다.

“수미 씨. 지금 시간 있어요?”

“네, 지금은 한가해요. 맛있는 거 사주실래요?”

“그럼요. 밴쿠버에서 신세 진 빚을 서울에서는 갚아야지요.”

박정재는 외출 준비를 서두르면서 심장 박동이 빨라짐을 느꼈다. 이제 비는 그치고 있었다.

그랜드호텔 커피숍에서 만난 오수미는 더 젊어 보였다. 헐렁한 체크무늬 남방과 빛바랜 청바지, 그리고 분홍색 모자가 잘 어울리는 생머리 때문일까?

“얼마 만이죠, 선생님?”

오수미가 악수를 청하면서 물었다.

“글쎄요. 한 팔구 개월 됐죠? 봄에 캐나다에 갔으니까…….”

박정재는 부드러운 오수미의 손에서 여인의 따스함을 느꼈다.

두 사람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박정재는 주로 산 개발의 계획에 대해서 말했고, 오수미는 박정재가 보지 못했던 캐나다의 다른 모습과 가이드 생활의 에피소드를 즐겁게 말했다.

그들은 스테이크와 함께 와인도 좀 마셨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객실로 옮겨서는 따뜻하게 한 몸이 되었다. 두 사람은 각자 자신의 욕정을 불태우기보다 상대를 잘 배려하는 성의를 보였다. 느리고 부드럽고 여유로운 사랑의 시간을 나누었다.

뜨거운 숨결이 식자 오수미가 물었다.

“선생님, 혼자 사시면 불편하지 않으세요?”

“바른말을 해야 되지요? 거짓말 말고.”

박정재가 오수미의 허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기왕이면 바른말이 좋죠.”

“마누라 잔소리 안 듣는 건 편한데…… 말 상대 없는 건 불편하고 쓸쓸해요.”

“잔소리라도 듣는 게 더 좋지 않아요? 적막강산보다는…….”

“글쎄요. 마누라 대신에 애들이 잔소리 많이 해요. 하루에 한 놈씩 잔소리 전화가 와요. 카톡도 수시로 날아오고…… 식사했어요? 청소했어요? 옷은 매일 갈아입으세요. 술 줄이세요. 담배 끊으세요…… 뭐, 맨날 3:1로 싸우는 거지요.”

박정재는 아이들에게 의지하는 마음도 있지만 3:1의 잔소리는 반갑지 않았다.

“그래도 자제분들이 관심을 보여 주니까 무관심보다는 훨씬 낫잖아요?”

“관심까지는 좋은데 간섭은 귀찮지요.”

박정재는 입술을 비틀며 싫은 내색을 했다.

“선생님, 계속 혼자 사실 거예요?”

오수미가 박정재의 머리칼을 만지면서 말했다.

“…….”

“좋은 여자분 만나서 재혼하세요. 남자는 혼자 살면 안 좋대요.”

“여자는 혼자 살면 좋은가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저는 혼자가 편해요. 아직은 싱글의 자유가 좋아요.”

박정재는 상대가 오수미라면 재혼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말을 입 밖에 낼 용기는 없었다.

<4>

산에서 작업하고 있는데 강명호가 왔다. 박정재는 믹스커피와 군고구마를 냈다.

“어이, 박 교장. 내가 말하던 그 참한 아주머니가…….”

“강 사장. 나 말이야… 나도 실은 재혼하고 싶어.”

“어! 정말이야?”

“그래. 하지만 내가 원하는 상대는 싱글의 자유를 원해. 그게 좀 문제야.”

강명호가 들어보니 상대도 있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참한 그 아주머니 이야기는 굳이 꺼낼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흐흐흐, 그럼 뭐야? 박 교장 혼자의 짝사랑인가?”

강명호가 군고구마 껍질을 벗기며 장난기 묻은 얼굴로 물었다.

“아니, 그녀도 날 좋아하긴 해. 하지만 결혼 생각은 없나 봐.”

박정재의 모호한 대답에 강명호는 묘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연인은 이 고구마와 같아. 가까이 있으면 향이 좋고, 입에 넣으면 맛이 좋아. 그런데 너무 오래 놔두면 썩거나 얼어버리지. 그럼 못 쓰잖아. 내 말 이해하겠어? 그건 그렇고 도대체 누구야? 내 친구 속 태우는 군고구마가.”

“…….”

“점잖은 척하면서 호박씨 깠구먼. 숨겨 둔 여자가 대체 누구냐니까?”

강명호가 눈을 부릅뜨며 과장된 공격의 표정을 지었다.

“강 사장도 아는 사람이지. 캐나다 오…….”

“뭐, 오수미? 그 여자, 아직 안 끝났어?”

“언제 시작이나 했나?”

“아니, 그게 말이야… 도 박사… 용규도 그 여자에게 연락하던데…….”

“아, 그 말은 수미 씨에게 들었어. 용규가 달아서 매달리지만 수미 씨가 잘랐대.”

“그렇지? 용규는 마누라가 있잖아? 의리 없는 인간, 얻다 걸쳐? 걸치길.”

“커피 한 잔 더 줄까?”

박정재는 뜬금없이 물었다. 강명호가 도용규를 비난하는 게 달갑잖아서 말머리를 돌리는 것이다.

“커피는 됐고, 용규 그 인간은 수미 씨를 외도의 상대로 생각하잖아? 박 교장은 완전히 다르지. 안 그래?”

“글쎄, 용규와 내가 어떻게 생각하든 중요한 것은 수미 씨 마음이지. 그녀는 싱글의 자유가 좋다고 하니…….”

“어이, 박 교장. 수미 씨 전화번호 좀 줘봐. 내가 할 말이 있어. 썩은 고구마 되기 전에.”

강명호는 몇 번이나 조른 끝에 오수미의 전화번호를 받고서야 돌아갔다.

일주일 후에 박정재는 오수미의 전화를 받았다.

“선생님. 저 수미예요.”

“아, 수미 씨. 어딥니까?”

“네. 밴쿠버 집이에요. 3일 전에 강 사장님 전화받았어요. … 군고구마 이야기도 잘 들었고요.”

“저……, 혹시 불쾌했습니까?”

“아뇨. 사흘 동안 많이 생각했어요. 제 생각을 이메일로 보내 드릴게요. 선생님 메일 주소를 좀 찍어주세요.”

“불편하시면 그 친구의 말을 무시해도 됩니다.”

“아뇨, 불쾌하거나 불편한 건 없어요.”

전화는 짧게 끝났지만, 잠시 후에 날아온 이메일은 짧지 않았다.

<선생님. 우리가 알게 된 것은 얼마 아니지만, 저는 나름대로 깊이 생각했어요. 그래요. 저는 선생님이 푸근하고 좋아요. 그러니까 두 번이나 몸을 섞었고, 눈에 안 보이면 그립기도 했어요.

하지만 좋다고 다 결혼할 수는 없어요. 우리가 분별심 없는 애들도 아니고 이젠 인생 후반부의 갈무리를 시작할 때라고 봐요. 남녀 관계는 멀리서 바라볼 때와 가까이서 부대낄 때의 관점이 다르다고 해요.

지금 우리가 결혼한다면, 용기 내어 시작했다가 어느 순간에 등을 돌리면 추하게 되어요. 추한 것은 비참한 것이죠. 그러니까 급하게 결정하지 말고 좀 더 깊이 생각해서 후회 없는 선택을 하고 싶어요.

좋을 때 조심해야 한대요. 전,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으로 판단해서 당한 아픔이 이미 있거든요. 그래서 자라목처럼 안으로 숨는 건지도 몰라요. 겉으로 털털해 보이는 행동도 숲 속 곤충의 위장술 같은 거예요. 식사 잘 챙겨하시고 늘 건강에 유의하세요. --상처가 두려운 여자-->

박정재는 이메일을 세 번이나 읽었다. 그리고 답장을 썼다.

<수미 씨. 메일 잘 읽었습니다. 인터넷이 과연 좋군요. 옛날의 국제 우편이라면 몇 날 며칠이 걸렸을 텐데요.

수미 씨 말이 맞습니다. 차근차근 생각해 봅시다. 아직 한참을 더 살 수도 있는 재혼 문제를 금방 결정하는 건 역시 성급하지요. 아무리 바쁜 세상이라 하지만 사랑까지 인스턴트로 하는 것은 저도 반대입니다.

용기가 없어 모양 좋은 프러포즈를 못 했습니다. 애먼 친구를 앞세워 간접적으로 프러포즈한 결과가 되었군요. 본의 아닌 결례에 용서를 구합니다.

사과의 의미를 담은 저의 여행 제안에 동의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달 말쯤에 하와이 여행이 어떨까요? 가슴 뛰는 대답을 기다립니다. --남자의 설렘-->

<5>

하와이에서 만난 두 사람은 3박 4일 동안 허니문처럼 아름다운 시간을 가졌다. 박정재는 섹스를 나누는 달콤한 순간에 사랑한다고 고백했지만, 결혼을 조르지는 않았다. 오수미가 자의적으로 결정하기를 기다려주는 것이 옳겠다고 생각했다.

여유 있게 오수미의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에 아이들과 미리 이야기해 둘 필요성도 느꼈다. 하와이에서의 농익은 사랑은 달디달았다.

집으로 돌아온 박정재는 강명호부터 찾았다.

“강 사장. 부탁이 있어.”

“돈 부탁 빼고 뭐든 다 해. 친구끼리는 돈거래가 제일 위험하니까.”

“돈은 무슨… 강 사장이 우리 애들 만나서… 내 마음을 좀 전해주면 좋겠어.”

“어떤 마음? 장가보내달라고? 그 말이지?”

박정재는 머뭇거리다가 겨우 입을 뗐다.

“……애들이 뭐라 할까?”

“그러지 말고 박 교장이 직접 말해. 걔들도 어린애가 아닌데, 직접 말하면 모두 알아들을 거야.”

“그래도 말하기가 좀…… 저그 엄마 죽고 3년도 안 됐는데…….”

“아니, 박 교장. 지금이 무슨 조선 시대야? 3년 지나서 재혼하길 원하면 자식들도 시묘살이 3년 하라고 해. 3년이 힘들면 1년, 아니 한 달이라도 해보라고 해. 세월이 어느 땐데 3년 타령이야?”

“그게…… 3년 근신을 애들이 말하는 게 아니고 , 내가 말 꺼내기가 좀 그렇다는 거지. 마누라 무덤에 잔디도 덜 올라와서…….”

“좋아, 자네가 말하기 거북하면 내가 현기에게 말하지.”

강명호는 역시 일 처리가 시원시원하다.

다음 날 강명호는 현기를 집 근처 찻집으로 불렀다.

“현기야. 나는 말 어렵게 돌릴 줄 모르니 결론부터 말하마, 네 아버지 장가보내자. 네 생각은 어떠냐?”

“아버지를 장가보낸다고요? 아니, 아저씨.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현기는 눈이 동그래져서 강명호를 쳐다보았다.

“말 그대로야. 네 아버지 그냥 두면 빨리 늙고 병 생겨. 그러니까 건강을…….”

“잠깐만요, 아저씨. ……빨리 늙고 병 생긴다는 말씀, 정말입니까?”

“그래, 그건 당연한 일이야. 홀아비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금방 삭아버리지.”

“그러면…… 아버지도 재혼하시겠대요?”

“응. 원하고는 있는데 말을 못 해. 네 아버지가 원래 그렇잖아?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고 끙끙 앓는 스타일이지.”

강명호는 배꼽 친구로 평생을 어울렸으니 박정재를 누구보다 잘 안다. 또 그런 사실을 현기도 잘 알고 있다.

“아저씨. 그럼 여자분은 있어요?”

“그래. 좋아하는 사람은 있어. 그런데…….”

“있는데 왜요?”

“응. 국내에 없고 캐나다에 살고 있는데 말이야…….”

강명호는 오수미의 간단한 소개와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 대충 이야기했다.

“아저씨, 저는 아들이라도 막내니까 누나들이랑 상의해야겠어요.”

“그렇지. 당연히 상의해야지. 그런데 이건 알아 둬. 네 아버지가 계속 혼자 살다가 중풍이라도 덜컥 걸리면 네가 똥오줌 다 받아내야 해. 네 아버지는 요양원에는 절대 안 들어갈 거라고 늘 말했거든. 병든 영감에게 할망구 없으면 아들 며느리가 힘들어. 그러니까 네가 잘 생각해서 아버지를 장가보내도록 해.”

강명호는 중풍이니 똥오줌이니 하는 소리까지 할 생각이 애초에는 없었다. 그러나 말을 하다 보니 그런 표현이 나왔고 나름대로 설득력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럼 누나들도 찬성하도록 부탁해야겠네요.”

현기는 아버지의 재혼을 찬성하는 쪽으로 마음을 정한 눈치였고, 강명호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현기는 누나들과 전화하여 토요일 오후에 큰누나 집에서 만났다. 그리고 강명호 아저씨와의 이야기 내용을 전하면서 누나들의 의견을 물었다.

“좋지 뭐. 아버진 아직 건강하시니까 새 장가드셔도 돼.”

큰누나 현애는 첫마디에 찬성이었다. 현애는 중학교 영어 교사이고 치과 의사인 남편도 환자가 꽤 많은 편이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많아서 아버지 용돈도 넉넉히 드린다.

하지만 작은 누나 현주는 현애와 많이 다르다. 언니의 아파트는 54평인데 반해서 자신의 아파트는 26평이고, 그나마 임대 아파트라서 늘 쫓기는 기분으로 산다. 언니 부부는 의사와 교사인데 자신은 살림만 하고 있다. 중국집 주방장인 남편이 아내의 경제활동을 지독히 싫어하기 때문이다.

현주의 남편은 사기꾼 같은 후배의 꼬드김으로 주식 투자에 빠졌고, 5년 동안 모았던 식당 개업 준비금을 홀랑 다 날렸다. 그 일로 부부는 대판 싸웠다. 돈이 궁한 현주는 친구를 따라서 다단계 사업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6개월 만에 카드빚만 잔뜩 짊어졌다. 아직은 남편이 모르고 있지만 현주는 날마다 바늘방석이다. 벌이도 시원찮은 부부가 번갈아 사고를 쳤으니 집안 꼴은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현애는 어릴 때부터 부모의 칭찬을 많이 들었으나 현주는 항상 언니 때문에 손해 본다고 생각했다. 자연히 현주는 언니에 대한 경쟁심과 피해의식이 많았다. 그렇지만 음주와 가무를 빼고는 현주가 큰소리 칠 것이 없었다.

언니 부부는 해마다 한 번씩 외국여행을 다니지만, 현주 부부는 아직 제주도에도 가지 못했다. 5년 전, 애들 데리고 해운대 다녀온 후로 부부 여행이라곤 한 번도 못했다. 그리고 애들의 공부도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차이 났다. 한 번은 현주가 하도 답답해서 남편에게 이렇게 말했다.

“공부 머리는 아빠를 닮는다고 하더라. 의사 머리하고 짱깨이 머리하고 같아?”

그러나 그 말 때문에 현주는 흠씬 두들겨 맞으며 이런 말을 들어야 했다.

“그래! 나는 대가리 나쁘고 힘만 세다, 어쩔래?”

현주는 매사에 불평이 많고 삐딱했다. 특히 언니의 말이라면 아무리 옳은 것이라도 반대했다. 일단 반대부터 먼저 해놓고 그다음에 반대의 명분을 찾는 식이다.

“싫어. 난 아버지 재혼에 반대야. 그딴 걸 뭐 때문에 해?”

“왜 반대야? 아버지도 여생을 행복하게 보내실 권리가 있잖아?”

“하여간 난 반대야.”

“글쎄, 반대의 이유가 뭐냐니까?”

현애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

“말해 봐. 왜 반대하는지 이유를…….”

“언닌 왜 그래? 엄마 자리에 다른 여자가 있는 게 좋아?”

“물론 안 좋지. 하지만 엄만 지금 없고…… 아버지 옆에 아무도 없는 건…… 더 안 좋아. 새로운 짝이 필요해. 이왕이면 아버지가 사랑하는 여자면 더 좋겠지.”

“난 싫어. 우리 엄마 자리에 다른 여자가 있으면 안 돼. 절대로!”

현주는 입을 앙다물고 완강하게 반대했다.

현기는 누나들의 설전을 보면서 큰누나가 이기길 바랐지만 내색할 수는 없었다. 그랬다간 작은 누나로부터 폭탄이 날아올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잠깐 생각을 정리한 현주가 입을 열었다.

“새엄마가 들어오면 아버지의 배우자로서 재산의 25%를 차지할 거야. 그럼 나머지 75%로 우리 셋이서 나누게 되잖아? 내 몫은 겨우 25%뿐인데, 왜 그 여자에게 그만큼 줘?”

“세상에! 현주 넌 벌써 그런 계산까지 했니?”

현애가 어깨를 늘어뜨리면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이건 혹시 아버지가 재혼하실 경우를 예상해서 한 번 알아봤던 거야. 그게 지금 현실로 나타난 것뿐이야.”

현주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말했다.

“그래도 그렇지, 이 상황에서 그런 말을 하다니…….”

“아니야. 언니와 나는 입장이 다르잖아?”

“뭐가 달라? 같은 형젠데.”

“그게 아니고, 언니는 부자지만 나는 가난하잖아? 그래서 나는 돈이 중요해.”

결국, 현주는 돈이 문제였다. 그날은 뚜렷한 결론을 못 내리고 다음 토요일에 아버지 집에 바로 모이자고 약속했다. 세 사람은 모두 굳은 얼굴로 헤어졌다.

현기는 큰누나 집에서 나오자마자 강명호에게 찾아가서 이야기를 전했다.

“그래. 현애는 찬성이고 현주는 반대다, 이 말이지?”

“네, 그렇습니다.”

“현기 너는 찬성이고?”

“저는…… 네, 저도 찬성입니다.”

“그럼 됐네. 2:1이니까 다수결로 하지 뭐.”

역시 강명호는 쉽게 말했다.

“아닙니다. 이걸 다수결로 밀어붙이면 작은 누나하고는 평생 원수가 됩니다.”

“평생 원수? 그럼, 어떡하지?”

현기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아버지와 상의하면서 시간을 갖고 작은 누나를 설득해야지요.”

“현주를 설득한다고? 그게 잘 될까? 걘 어릴 때부터 고집이 대단했는데…….”

현기도 작은 누나의 고집에 대해 공감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작은 누나는 삼 남매 중에서 유일하게 부모의 반대를 무시하고 결혼했다. 혼수 장만은 물론이고 예식장 결정도 자신의 고집대로 처리했다. 아버지는 크게 화를 냈고 어머니는 결혼식 마친 그날부터 사흘이나 자리에 눕고 말았었다.

<6>

토요일에 삼 남매가 아버지 집으로 모였다. 짜장면으로 간단히 점심을 마친 후에 현애가 먼저 말을 꺼냈다.

“아버지, 혹시 좋아하시는 여자분 있으세요?”

“…….”

“괜찮아요. 말씀하세요. 저희도 대충은 아니까요.”

“그래. 너희에게 말하긴 좀 그렇지만… 나도 마음이 좀 복잡해. 왜냐면…….”

“복잡하면 재혼 안 하시면 되지 무슨 말씀이 더 필요해요?”

현주가 평소의 태도처럼 톡 쏘았다.

“현주 넌 좀 가만히 있어 봐. 아버지 말씀하시는 중이야.”

현애가 조용히 타일렀지만 현주는 이내 반격했다.

“언니, 우린 지금 교장 선생님 연설 듣자고 모인 게 아니고 가족회의 하잖아? 그럼 나도 내 생각을 말할 수 있어야지.”

현주는 언제나 아버지의 이야기를 설명조이거나 연설 분위기라고 싫어했다.

“그래, 알았어. 아버지 말씀부터 듣고 네 생각을 말해.”

“…….”

잠깐의 침묵을 뚫고 박정재가 말했다.

“내 재혼을 너희에게 허락받고 추진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너희가 반대하면 내 계획을 접을 생각이야.”

“아버지가 접을 생각은 재혼인가요? 아니면 우리 허락받는 거예요?”

“그야 심사숙고해서…… 흠, 합리적이고 효율적으로…… 흠, 좀 더 생각해 보자.”

현주는 또박또박하게 도발적으로 질문했고 박정재의 대답은 두루뭉술했다.

그렇게 시작하여 가족들은 각자의 생각을 충분히 이야기했다. 하지만 현주의 고집은 바뀌지 않았다.

“현주야, 잠깐 언니 좀 보자.”

현애가 먼저 안방으로 들어갔고 현주도 엉거주춤 뒤따랐다.

“잘 봐. 이 방이 엄마 아버지가 38년 동안 사시던 방이야. 우리가 엄마의 젖을 먹으며 컸던 방이야. 나도 이 방에 다른 여자가 들어오는 게 별로 안 좋아. 하지만 아버지 혼자 이 방에 계시면 더 안 좋아.”

“언니, 그래도 그 여자가 4분의 1이나…….”

“그건 법으로 정해진 거야. ……좋아. 정 그러면 내 몫을 모두 너에게 주마. 달리 생각하지는 마. 내가 너보다 좀 여유가 많으니까 주는 거야. 그렇게 하면 넌 50%가 되겠구나. 어때?”

“언니.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지?”

“아버지를 위해서야. 새엄마가 아니고 우리 아버지 말이야.”

“차라리 재혼보다는…… 정 외로우시면 여자 친구나 한 분 사귀면 되잖아?”

“아니야. 여자 친구와 아내는 달라.”

“…….”

현주는 골똘히 생각하는 눈치였다. 고집부려서 언니 몫의 상속금을 확보했지만, 기분이 썩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울어서 장난감을 차지하던 어릴 때의 기분과는 달랐다.

거실에 나온 현주가 불쑥 말했다.

“아버지. 재혼하시기 전에 재산을 좀 나눠주세요. 절반이라도 미리…….”

“그게 무슨 말이야?”

박정재가 놀란 눈빛으로 물었다. 현애는 현주를 쏘아보고, 현기는 간이 조마조마했다.

“아버지 재산이 나중엔 그 여자에게 많이 넘어가잖아요? 그 돈은 또 그 여자의 자식들에게 갈 수도 있고, 또…….”

“그만두지 못해! 현주 너 이놈의 자식! 아비가 아직 눈 퍼렇게 뜨고 있는데…… 뭐라? 재산 나눠 달라고? 그리고 현애 너도 그렇지. 동생 데리고 안방에서 이따위 이야기나 했어?”

“아버지, 그게 아니고요…….”

“시끄러! 못된 놈들!”

현애는 억울했지만 입을 닫았다. 다만 큰 눈에 눈물만 가득 고였다. 아버지가 당신의 불편한 입장 때문에 더 흥분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다음에 해명하면 되겠지 했다.

그러나 현주는 눈을 똑바로 뜨고 야무진 목소리로 말했다.

“솔직히 아버지의 박봉을 알뜰히 아끼고 저축한 사람은 우리 엄마잖아요? 먹는 거 입는 거 줄여서 재산 만든 사람은 엄만데 왜 다른 여자가 그걸 차지해요?”

현기는 가족들의 눈치를 보면서 입이 바싹 말랐다. 강명호 아저씨가 말했던 중풍, 똥오줌 따위의 말이 자꾸 떠올랐다. 그래서 아버지의 재혼을 원했는데 지금 재산 문제가 나오니까 생각이 좀 복잡해졌다.

박정재는 심호흡을 두어 번 한 후에 조용히 말했다.

“아비 아직 재혼 안 했고 너희들 의견을 물어봤을 뿐이야. 그런데 벌써 재산 문제를 말하다니 너무 빠른 거 아니야?”

“전 제 의견을 정확히 밝혔을 뿐이에요. 그리고 언니는 아까 했던 약속을 각서로 써줘.”

“무슨 각서?”

“언니 몫의 25%를 나에게 준다고 했잖아? 그거 말이야.”

현주가 입술을 꼭 다물면서 현애를 노려보고, 박정재는 담배를 들고 베란다로 나가버렸다.

“현주 너 정말…… 언니 말도 안 믿고 그렇게까지…….”

“언니를 안 믿는 게 아니라 세상을 안 믿고 돈을 못 믿어. 그뿐이야.”

“작은 누나 정말 너무 하네.”

현기가 처음으로 한마디 하자 현주가 고함을 빽 질렀다.

“뭐가 너무 해? 내 말에 틀린 거 있어?”

그렇게 해서 집이 더 소란해졌다. 한참 동안 목소리를 돋우던 현주가 울면서 뛰쳐나갈 때 아무도 붙들지 못했다.

박정재는 며칠 동안 깊이 생각했다. 강명호를 만나서 장시간 의논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결론을 내리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런 일이라면 마음 바뀌기 전에 빠르게 처리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집과 산은 모두 팔았다. 급하게 처분하다 보니 시세보다 싸게 놓아버렸다. 주식과 예금까지 모두 정리해 보니 총액이 15억 원 남짓했다.

세 자녀의 통장에 3억 원씩 입금해 주었다. 나머지 6억 원을 자신의 몫으로 예탁했다. 이것을 재혼과 여생의 종잣돈으로 할 생각이었다. 계절별로 약간의 옷만 남기고 살림도 모두 자활봉사단체에 기부해 버렸다.

박정재는 옷 가방 몇 개만 강명호의 창고에 맡기고 캐나다로 갔다.

예약해 둔 해변의 레스토랑에서 박정재는 오수미에게 반지를 끼워주면서 정식으로 청혼했다.

“수미 씨, 이제부터 우리의 행복을 함께 찾읍시다. 나와 결혼해 줘요.”

그러나 반지를 슬쩍 바라보던 오수미는 뜻밖의 질문을 했다.

“선생님, 한국의 재산은 모두 어떻게 하셨어요? 집이랑 산이랑 모두…….”

“아, 그건 모두 팔았어요. 좀 급하게 파느라 시세보다 싸게 정리했지요.”

박정재는 마치 무거운 짐이라도 내려놓은 것처럼 홀가분한 기분으로 말했다.

“왜 그리 급하게 정리하셨죠?”

갑자기 오수미의 목소리가 사무적인 톤으로 변했다.

“저, 그게, 애들에게 좀 나눠주고… 나도 새 출발 하려면… 정리가 좀…….”

“자녀들에겐 얼마씩 주고 얼마가 남았죠?”

오수미의 목소리가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다.

“3억씩 세 명에게… 모두 9억을 주고… 나는 6억을…….”

“그럼 총액은 15억이었어요?”

“그, 그렇지요. 15억 맞아요.”

“그 돈 다 가져오면 거의 맞는데, 9억이나 빼줬단 말씀이죠?”

“아니, 수미 씨. … 갑자기 돈을 왜 그렇게…….”

“돈을 왜 그렇게 따지냐고요? 선생님 연세를 생각해 보세요. 이제 힘든 일은 하시기 어렵잖아요? 한 20억 정도 있으면 여기에서 조그만 건물은 하나 살 수 있어요. 그걸로 임대업이라도 해야 먹고 살지요.”

“수미 씨, 나는…….”

“더 들어보세요. 제가 가진 돈 다 털어도 5억밖에 안 되는데 선생님 돈 6억을 합해봐야 목표액의 절반에 불과해요.”

오수미가 ‘절반’에 힘을 주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그럼 처음엔 작게 출발하면 되지 않습니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저에게 청혼하실 생각이 있었으면 결혼 이후의 생활 문제는 미리 상의하셔야지요. 결혼이란 것은 잠깐 좋아서 사귀는 거랑 다르잖아요? 연애는 낭만이지만 결혼은 생활인데……. 현실 감각이 그렇게 없으세요? 전, 선생님께 어떤 존재인가요? 그냥 액세서리인가요?”

“아니, 그게 아니고…….”

오수미는 또박또박 따지고, 박정재는 ‘아니, 아니’ 하면서 뒷걸음질만 바빴다. 박정재는 일이 묘하게 꼬여서 답답했다. 모든 것을 원점에서 다시 판단하자고 생각하고 있는데 오수미가 반지를 되돌려주었다. 해변의 낙조는 빛을 잃었고 박정재는 갑자기 한기를 느꼈다.

<7>

박정재는 귀국 즉시 강명호를 만났다.

“강 사장. 나 아무래도 헛발질한 거 같아.”

“헛발질? 좀 그렇기도 하네. 돈을 너무 밝히는 게 영 이상해.”

“처음부터 돈을 목적으로 나에게 접근했을까? 그렇다면 나보다 부자가 얼마나 많아? 나야 뭐 소시민이지.”

“그건 차차 생각하고, 자네 당장 발 뻗고 누울 자리도 없잖아? 다른 대책이 생길 때까지 우리 집에 머물도록 해. 상우 녀석 유학 가고 방이 비었으니…….”

“아니야. 내가 무슨 면목으로 자네 부인을 봐? … 그냥 내가 알아서 할게.”

강명호가 집으로 가자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박정재는 끝까지 사양했다.

박정재는 봉덕동의 ‘지구촌 모텔’에 한 달 치 방세를 선납하고 들어갔다. 우선의 식사는 주변 식당에서 해결하면 되겠지만, 장기적인 생활에 대해서는 어떤 대책이 필요했다. 해동하면 산에 비닐하우스라도 지을 생각이다.

마침 욕실에서 속옷을 빨고 있는데 전화벨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 어디 계세요?”

현애였다. 박정재는 큰딸 전화가 반갑기도 했지만, 오수미와의 갈등 때문에 공연히 위축되었다.

“으응, 여기 봉덕…… 아니 신사동 강 사장 집이야.”

박정재는 거짓말을 해버렸다. 모텔에 월세로 들어왔다고 하면 현애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눈에 선했기 때문이다.

“아버지, 큰일 났어요. 현주가…….”

“현주가 왜? 무슨 일 있어?”

“저, 현주가 그저께 구속됐어요. 저도 이제야 알았어요.”

“뭐라고? 구속이라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아버지, 지금 강남 경찰서로 오세요.”

박정재는 빨래도 그냥 둔 채 경찰서로 갔다. 가는 동안 다리가 자꾸만 흔들렸다.

현애가 전하는 그동안의 이야기는 기가 찼다.

현주는 아버지에게 받은 3억 원을 다단계 사업에 모두 털어 넣었다. 그런데 물건만 잔뜩 넘겨준 상위 레벨 사업자는 종적을 감추었다. 현주는 물건 하나라도 더 팔기 위해 이리저리 뛰면서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설쳤다.

그러다가 여고 동창생을 만났다. 그 친구가 손을 끄는 대로 따라가 보니 주부 도박판이었다. 처음에는 푼돈을 조금 땄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야금야금 잃기 시작했다. 낮에 물건 팔아서 밤에 도박으로 잃는 생활이 이어지면서 금세 바닥이 났다.

본전 생각에 눈이 뒤집힌 현주는 현애에게 전화했다. 제주도에 전망 좋은 땅이 있다고 했다. 자기 돈 3억 원으로 중도금까지 치렀는데, 잔금 날이 다 되었다면서 약속했던 3억 원을 지금 좀 달라고 했다.

현애는 잔금 기한이 너무 급한 게 좀 불안했지만, 이미 주기로 약속한 돈이라서 통장으로 입금해 주었다. 그런데 그 돈마저 몽땅 잃은 현주는 마지막 날 현장을 급습한 경찰에 검거되고 말았다. 6억 원을 불과 두 달 만에 다 날린 현주는, 늪에서 한쪽 발을 빼려고 버둥거리다가 두 발이 모두 빠진 형상이 되어버렸다.

박정재는 현애와 함께 면회실로 들어갔다.

“현주야, 너 어쩌자고 이런 엄청난 일을…….”

“아버지, 죄송해요. ……한동안 눈에 헛것이 보였어요.”

고집쟁이 현주가 죄송하다고 사과하는 것은 무척 이례적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무슨 애가 그렇게 간이 크니?”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나가면 모두 해결하겠어요.”

“어떻게? 괜한 생각 말고 밥 잘 먹고 몸이나 성하게 지내.”

박정재가 등 돌려서 한숨을 푸욱 내쉴 때 현애가 말했다.

“현주야. 그래도 물건이 좀 남았으니 나중에 사업할 수 있잖아? 언니가 도와줄게. 어쨌든 희망 잃지 말고…….”

“싫어. 그딴 사업 이제 안 해.”

“그럼, 뭐 할래? … 아니, 일단 아무 생각 말고 몸이나 잘 챙겨. 이 상황에 병까지 생기면 더 큰일이니.”

“언니, 나 감옥에서 기술 배워 나갈 거야.”

“무슨 기술?”

박정재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찾더니 밖으로 나가버렸고, 현주는 또렷하게 말했다.

“돈 되는 기술. 나도 새롭게 태어나고 싶어.”

“그래, 그래야지. 잘 생각했어.”

현애가 살갑게 칭찬했다. 하지만 현주는 자신의 말과 반대의 생각을 품고 있었다.

‘흥. 도둑질 기술을 배워서 나갈 거야. 여기서 들어보니 세상에는 도둑놈 천지야. 내가 멋진 기술 배워서 도둑놈들 돈을 왕창 털 거야.’

현애는 현주의 속마음을 알 턱이 없었으니 또 덕담을 했다.

“현주야, 네가 그렇게 좋은 생각을 하니까 언니도 기뻐.”

“응. 걱정하지 마.”

하지만 현주의 마음속에는 정반대의 생각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웃기지 마. 나쁜 일로 잡힌 인간이 좋은 생각을 할 수 있겠어?’


면회 끝나고 현애가 밝은 얼굴로 나왔다. 박정재는 밖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현애는 아버지에게 저네 집으로 가자고 말했으나 박정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사위 보기가 불편하고 또 애들이 있으니까 생각 정리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박정재가 모텔에 돌아와서 막 씻으려고 하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아버지. 저 현기예요. 지금 종로 경찰서에 있는데요.”

“거긴 왜?”

박정재가 깜짝 놀라서 묻고 현기는 짧게 대답하다가 꺽꺽 울기 시작했다.

“제가 자동차 꺽, 사고를 냈는데……꺽, 에이, 씨!…… 엉엉…….”

박정재는 종로 경찰서로 급히 가면서 현애도 불렀다. 경찰서에서 조사받는 현기를 보고 박정재는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현기는 몸도 가누기 힘들 정도로 만취 상태였다. 경찰관이 건네주는 조서 내용을 보니까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음주 운전만 해도 큰일인데 피해 어린이는 생명이 위험한 중상이다. 게다가 뺑소니까지 치면서 주차 중인 남의 차를 들이받았다. 그 차는 2억 원 이상이나 하는 고급 외제 차인데 앞쪽 범퍼가 심하게 파손되었다.

알고 보니까 현기는 매형과 크게 다퉜다고 한다. 누나가 구금된 상황에서 이혼 청구 소송을 한 매형에게 화가 났다고 했다. 흥분한 현기는 술을 마시고 매형이 일하는 중국집으로 갔다. 거기서 중국집 주인이 싫은 소리를 한다고 기물을 부수며 난동을 부렸다. 그 과정에서 자신을 말리던 매형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현기는 중학생 때부터 권투를 했으니 어지간한 사람은 당하기 어려웠다. 거의 이성을 잃은 상태에서 운전하다가 횡단보도를 건너던 아이를 받았다. 그리고 뺑소니와 남의 차 파손까지 연결되었다.

조서 내용을 읽던 박정재는 무너지듯이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눈앞이 캄캄해지고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현애가 부축해서 겨우 일으켜 세웠다.

“아버지, 일단 저희 집에 가서 안정을 좀 취하시고…….”

“안정이 되겠어? 아비는 여자에게 버림받고, 딸년은 돈 날리고 구속되고…… 이제 아들놈까지 저 모양인데 어떻게 안정이 되겠어?”

“아버지. 그래도 마음을 굳게 가지세요. 현주와 현기는 제가 수습할 테니 아버진 좀 쉬세요. 저녁에 양 서방 오면 의논하겠어요.”

박정재는 그 와중에도 큰딸과 사위의 존재가 버팀목처럼 미더웠다.

이튿날 박정재는 대학교 연구실로 도용규를 찾아갔다.

“도 교수. 좀 창피하지만…… 애들 문제로 의논할 일이 있어서 왔네.”

“내가 무슨 도움이 되겠나?”

도용규는 오수미에게 섭섭했던 기억 때문인지 달가운 표정이 아니었다. 박정재는 아이들의 사건 경위를 대충 이야기하고 말을 이었다.

“도 교수 사위가 유능한 변호사라던데 혹시 좋은 길이 있을까 싶어서…….”

박정재도 과거처럼 도용규가 편하지 않아서 말끝을 흐렸다.

“알았어. 있다가 사위에게 전화는 넣어주지. 내일쯤 박 교장이 찾아가 봐.”

도용규는 선심이라도 쓰듯이 말했지만, 속으로는 모처럼 사건 하나 소개해줘서 장인 체면을 살리겠다고 좋아했다.

박정재는 이튿날 오전 10시에 서초동 장준수 변호사 사무실을 방문했다. 앞 손님이 있어서 1시간 남짓 기다린 후에 박정재의 상담 차례가 되었다.

먼저 현주의 다단계 사업 피해와 도박 문제를 비교적 구체적으로 이야기했다.

그리고 현기의 음주 운전과 뺑소니 사건, 식당 기물 파손, 매형에 대한 폭력행사, 중상당한 어린이 문제, 외제 승용차 파손까지 이야기했다.

마지막으로 둘째 사위인 최 서방의 이혼 청구 소송에 대한 대책까지 다 상담하니 정오가 되었다. 박정재가 변호사 집무실을 나오니까 사무실 여직원이 상담료 청구서를 내밀었다. 박정재는 카드로 결제하면서 입맛이 썼다.

<끝>

박정재는 강명호에게 현주와 현기의 일을 이야기했다.

“그래도 용규 사위에게 사건을 맡겼으니 잘했네. 그 사람 실력이 좋다더군.”

“그래. 나도 이제 좀 홀가분해.”

강명호는 박정재에게 수고 많았다면서 함께 온천에 가자고 했다. 두 친구는 모처럼 수안보까지 가서 온천욕을 하고 점심으로 칼국수를 먹었다.

박정재는 돌아오는 차 속에서 말했다.

“강 사장. 나 아무래도 세상을 잘못 살았지?”

“왜 또 그런 소릴 해? 목욕 잘하고선…….”

“애들 잘못 키워서 늘그막에 경찰서와 변호사 찾아다니는 꼴이…… 참 한심해.”

“뭐 애들이 그럴 수도 있지. 크게 생각하고 애들 잘 다독거리게. 그래도 자식인데 어쩌겠나?”

“평생 남의 자식들 수천 명을 가르쳤는데…… 내 새끼는 저 모양이니…… 아무래도 내가 세상을 잘못 살았어. 크게 헛발질한 거야.”

박정재의 눈에 눈물이 고인 것을 알고 강명호는 노래를 크게 들었다. 관광버스용 트로트 메들리가 차 안에 가득 찼다. 황진이, 무조건, 내 나이가 어때서 따위가 빠른 리듬으로 이어졌다.

서울로 돌아온 박정재는 둘째 사위 최성진을 만났다.

“여보게, 최 서방. 자네 속상한 거는 충분히 이해하겠네. 내가 자식 교육 잘못한 탓이니 나를 원망하게.”

“…….”

“나에게 원망하고 현주는 용서해 주게. 이혼 청구 소송을 취하하고, 현주 나오면 다시 시작하게. 자네 중국집 개업하도록 내가 지원해 줄…….”

“얼마 주시겠습니까?”

최성진의 눈빛이 공격 직전의 맹수처럼 느껴졌다.

“그건… 자네 처형과 의논해서…… 작은 식당은 하나 하도록 해주겠네.”

“알겠습니다. 장인어른을 봐서 이혼 청구 소송은 취하하겠습니다. 하지만 처남의 폭행 사건과 기물 파손은 취하할 수 없습니다.”

“……왜 그런가?”

“처남이 아직 사과도 안 했고, 또 기물 파손은 주인에게 변상을 해줘야지요.”

“알겠네. 현기가 나오면 곧 사과할 것이고, 기물 변상은 내가 해줌세.”

박정재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사위의 손을 잡았고, 최성진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푹 숙였다. 장인의 눈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목도 돌렸다.

돈 아끼지 않고 다 정리한 박정재는 현애에게 전화했다.

“현애야. 네 계좌번호를 문자로 좀 찍어다오.”

“왜요, 아버지?”

“응. 아버지가 갖고 있는 돈을 네가 보관하는 게 좋겠다. 아버지는 헤프지만 너는 엄마 닮아서 야물잖아?”

“아버지, 그러지 마시고 작은 아파트 전세라도…….”

“그건 나중에 하면 되고 우선은 네가 좀 보관해. 그게 좋겠어.”

“알았어요. 그리고 저녁은 양 서방과 함께 드시도록 치과 근처로 오세요.”

“일없다. 집에서 애들하고 먹어. 가능하면 애들에게서 눈 떼지 말고.”

애들끼리만 밥 먹는 것을 박정재가 싫어하는 것은 밥상머리 교육의 중요성을 잘 알기 때문이다. 자신이 애들 키울 때 부족했던 것을 후회하는 부분이기도 했다.

박정재는 현애의 계좌로 돈을 송금했다. 다른 처리는 편지에 써두었으니 이제 떠나자고 생각하며 차에 올랐다. 아내와 함께 여행했던 추억을 떠올리며 경남 밀양으로 향했다. 급할 것도 없으니까 국도로 천천히 운전했다.

산 개발의 자금도 없고 아무런 꿈도 없어져서 존재감이 무너지는 것을 뚜렷하게 느꼈다. 시들어가는 꽃잎이 생각났다. 아내가 있으면 그런 꽃도 잘 살리는데 하다가 픽 웃었다.

해 질 무렵에 밀양 단장면의 조용한 강변에 차를 멈추었다. 좁은 비포장 길이라서 다른 차들이 거의 없는 곳이다. 갈대와 억새가 복잡하게 섞인 강변에는 잠자리가 많이 보였다. 피서철이 끝나서인지 강에는 아무도 없었다. 잠자리들과 소슬바람이 물결 데리고 노는 모습이 평화로워 보였다. 마지막 길에는 이런 평화가 좋겠다고 생각했다.

박정재는 어젯밤에 모텔에서 쓴 편지를 꺼냈다.

<현애야, 미안하다. 평생 교육만 했지 세상을 너무 몰랐던 아비였구나. 네 엄마가 떠난 후엔 마냥 슬프고 외로웠다. 그러나 슬픔과 외로움은 견딜 수 있었다. 다만 무너지는 존재감과 세상을 헛살았다는 자괴감은 견디기 어렵더라. 정말 크게 헛발질했지.

통장에 보낸 돈은 현기의 사고 수습과 최 서방의 식당 개업에 보태면 좋겠구나. 네가 잘 알아서 처리하되 동생들의 의견도 귀담아듣기 바란다. 양 서방에게도 용서를 빈다고 전해다오. 정말 좋은 사람이지. 이제 네 엄마를 만나러 가야겠다. 애들하고 행복하게 잘 살아라. --못난 아비 씀>

박정재는 편지를 봉투에 넣고 두 번째 편지를 꺼냈다.

<현주야, 미안하다. 이제야 말하지만 네가 처음 세상에 왔을 때 할머니가 무척 서운해하셨단다. 첫째에 이어서 둘째도 딸일 때, 옛날 노인들은 다 그랬어. 특히 내가 삼대 외동아들이라서 더 심했던 거야. 할머니가 계실 땐 너를 한 번 안아주기도 힘들었어. 아마도 그런 이유로 너는 차별당한다는 생각도 자주 했을 거야. 아비가 속죄하는 마음으로 언니 편에 돈을 좀 맡겨뒀다. 출소하면 언니와 의논하여 최 서방의 식당 개업에 보태어 써라. 물론 너도 최 서방과 함께 일해야 한다. 제발 다단계와 도박은 근처에도 가지 말아라. 최 서방을 존중해 주고 애들을 잘 챙기면서 살아라. --먼 길 떠나며 아비 씀>

박정재는 눈물을 닦으면서 세 번째 편지를 펼쳤다.

<현기야. 미안하다. 항상 말수가 너무 적고 자신의 의사표시를 제대로 안 하는 네 성격을 걱정했었다. 이번 일도 억지로 참다가 욱 터지는 그 성미 때문에 일어난 거야.

네 매형에게 정중하게 사과하고 누나들 말을 잘 들어라. 특히 큰누나는 너희 엄마만큼 지혜로우니까 말을 잘 들어라. 이번 일을 비싼 공부의 기회로 생각하고 앞으로는 매사에 조심하기 바란다. 술을 최대한 줄이고 음주운전은 절대 하지 마라. 대인관계에서는 쉽게 흥분하지 말고 자기 생각을 예의 바르게 표현해라. 애들 잘 키우고 열심히 살아라. 사랑한다, 내 아들! -- 널 걱정하며 아비 씀>

박정재는 편지를 모두 봉하여 옆자리에 놓았다. 생전의 아내가 항상 앉았었지만, 지금은 편지 세 통만 오도카니 앉아 있다.

박정재는 차창을 모두 올리고 안에서 문을 잠갔다. 그리고 번개탄에 불을 붙였다. 번개탄에서 연기가 조금씩 피어오를 때, 그는 갑자기 생각난 듯이 중얼거렸다.

“아차, 명호에게도 마지막 인사는 해야지. 제일 고마운 친군데…….”

박정재는 스마트 폰에 카톡으로 글을 보냈다.

<친구! 평생 동안 고마웠네. 난 마누라 만나러 가야겠어. 우리 아이들 한 번씩 챙겨봐 주게. 잘 있게, 자넨 정말 좋은 친구였어!>

시간이 조금 흐르니까 차 안에 연기가 많아지고 가스 냄새가 짙어졌다. 전화벨 소리가 들렸지만 받지 않았다. 가슴이 조금씩 답답해왔다. 언제 들어왔는지 파리 한 마리가 힘을 잃고 비실댄다. 녀석은 편지 봉투 쪽으로 기어가면서, 마치 거기에 가면 무슨 희망이라도 있다고 생각하는지 힘들게 움직인다.

‘파리 니가 먼저 죽을까, 내가 먼저 죽을까? 너에겐 미안하지만 지금 창문을 내릴 수는 없어. 바람 통하면 안 돼. 너는 내 마지막 길동무니까 조금 후에 나하고 같이 하늘문 열자꾸나.’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 연기는 더 많아졌다. 눈이 따갑고 기침이 터졌다. 죽는 게 참 어렵다고 생각되었다. 이런 와중에도 어떤 개그 장면이 생각났다.

“니가 자살하겠다고? 안 돼. 함부로 죽지 마!”

“알았어. 알았다고!”

“만약 스스로 목숨 끊는다면…… 내가 널 콱! 죽여 버릴 거야.”

어지럽고 기침과 눈물이 쏟아지는 중에도 엉뚱한 기억이 나서 쿡쿡 웃었다. 바로 그때 카톡 음이 들렸다. 무심코 열었다. 오랫동안 몸에 밴 습관적인 동작이었다.

<아버지, 저 병아리예요. 강명호 아저씨 전화받았어요. 거기 어디세요? 제가 모시러 갈게요. 아버지, 병아리 뽀뽀 기억하시죠?>

‘병아리 뽀뽀…… 그래 맞아, 현애가 어릴 땐 ‘내 병아리’하면서 볼에 소리 나게 뽀뽀해 줬지. 하지만 현주에게는 못 그랬어. 그래, 내 잘못이야. 업보야’

박정재는 뺨 위로 흐르는 눈물도 닦지 않았다. 다시 카톡이 왔다.

<병아리는 어른 닭을 보며 배웁니다. 혹시 나쁜 생각 하시면 병아리도 꼭 그대로 따라 할 거예요. 나쁜 길로 가지 말라고 항상 가르치셨죠?>

‘그래. 말로는 옳게 가르쳤는데 내 행동은 모범이 안 되었어. 이미 늦었지만 정말 미안하구나. 마지막으로 용서를 비는 거야.’

가스가 가득 차서 눈앞이 뿌옇다. 머리가 몽롱하고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 같았다. 입가에 거품이 흐르는 걸 느꼈지만 닦지 않았다. 손가락조차 까딱하기 싫었다. 또 카톡이 왔다.

<아버지, 얼른 오셔서 현주 현기에게 병아리 뽀뽀해 주세요. 걔들에게는 지금 병아리 뽀뽀가 꼭 필요해요. 아니면 동생들은 불행해져요. 제가 아버지 존경하는 거 아시죠? 아버지, 제발요.>

박정재는 가슴에 쿵 소리가 들리도록 충격을 느꼈다. 차 문을 벌컥 열었다. 갈대밭 옆으로 기어가서 토했다. 피라미 잔챙이들이 토사물로 오글오글 모였다. 눈물이 마구 쏟아졌다. 하늘 향해 벌렁 누운 채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안 돼. 내 아이들은 불행하면 안 돼.”

박정재는 엉금엉금 기다시피 차에 가서 번개탄을 꺼냈다. 편지를 찢어서 번개탄에 모두 태웠다. 까만 종이 재가 소슬바람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해방의 춤이라도 추는 것 같았다. 박정재는 현애에게 전화했다.

“현애야, 미안하다. 이제 괜찮아.”

“아버지, 지금 어디세요? 빨리 오세요, 네?”

현애는 입이 바싹 탔다.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래. 여기 밀양이야.”

“밀양이 어딘데요? 거긴 왜요? 괜찮으세요?”

눈물을 줄줄 흘리며 세 가지의 질문을 하는 현애에게 박정재는 간단히 답했다.

“괜찮아. 걱정하지 마.”

“아버지. 어서 돌아오세요. 네?”

“그래. 오늘은 여기서 쉬고 내일 일찍 돌아갈게. 전화 끊어.”

박정재는 전화를 끊고 그 자리에 한참 앉아 있었다. 억새와 부들이 바람에 흔들린다. 부들 위에 앉은 잠자리는 덩달아 그네를 탄다. 잠자리를 보던 그가 갑자기 차로 돌아갔다. 아내의 자리에는 아까 그 파리가 보이지 않았다. 주변을 샅샅이 찾아도 안 보였다.

‘어디로 갔지? 살아서 날아갔나? 혹시 아까 태운 편지 봉투들 사이에 있었을까? 그렇다면 저절로 다비장이 되었군.’

박정재는 잠깐 합장을 했다.

“파리 보살님, 해탈하소서.”

박정재는 천천히 차를 몰았다. 4년 전에 아내와 함께 갔었던 표충사 근처 민박집으로 향했다. 사이드미러에 비친 서쪽 하늘엔 노을이 발갛게 물들었다. 홍시의 속살처럼 깨끗이 붉었다.

-끝- (원고지 194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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