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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은 색이 아니다 2

나를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

by 이재우

1. 사랑의 역설

나를 사랑하는 일은 남을 사랑하는 것보다 어렵다. 이것은 역설적이지만 분명한 진실이다.

살면서 누군가를 사랑해 본 경험 다들 있을 것이다. 때로는 뜨겁고 열정적으로, 혹은 미지근하더라도 따뜻하게 우리는 다양한 사랑의 방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때로는 가치관의 차이로 싸우기도 한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은 나를 사랑하는 일보다 훨씬 쉽다는 것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것이다.


좋아하는 친구를 만났을 때를 생각해 보자. 그의 장점이 눈에 들어온다. 유머 감각, 따뜻한 마음, 든든함. 단점이 보여도 "그래도 좋은 사람이야"라고 쉽게 넘어간다. 연인을 사랑할 때는 더욱 그렇다. 그의 작은 습관들마저 사랑스럽게 보인다. 코를 고는 소리도, 아침에 부스스한 머리도, 심지어 가끔 보이는 고집도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나 자신에게는 왜 이렇게 엄격할까? 거울 속의 나를 보며 "오늘도 피곤해 보이네" "살이 또 쪘나?" "이런 내가 누가 좋아하겠어"라고 생각한다. 작은 실수에도 "역시 난 안 돼" "왜 이렇게 바보 같지"라고 자책한다. 타인에게는 관대한 마음을, 나에게는 가혹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다

.

2. 나를 미지근하게 사랑하는 것조차 어려운 이유

나를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것은 당연히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나를 미지근하게 사랑하는 것조차 상당한 깨달음과 이해를 필요로 한다. 왜 그럴까?


첫 번째 이유는 내가 나를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타인은 겉모습만 보이지만, 나는 내 안의 모든 것을 안다. 어두운 생각들, 부끄러운 기억들, 숨기고 싶은 감정들까지 모두 알고 있다. 새벽 3시에 혼자 느끼는 외로움도 질투심도, 때로는 악의적인 생각들까지도.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나를 사랑하는 것은 쉽지 않다.


두 번째 이유는 기대와 현실의 괴리다. 나는 항상 더 나은 내가 되고 싶어 한다. 더 성공하고, 더 매력적이고 더 현명한 사람이 되고 싶다. 하지만 현실의 나는 그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이상적인 나와 현실적인 나 사이의 간격이 클수록 나를 사랑하기 어려워진다.


세 번째는 비교의 함정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타인과 자신을 비교한다. SNS에서 보는 화려한 삶들, 성공한

동창들의 소식, 더 예쁘고 더 잘나 보이는 사람들. 이런 비교 속에서 나는 항상 부족해 보인다. 상대적 박탈감이 자기 사랑을 가로막는다.


3. 회색으로 정의된 내 삶

나는 나의 삶을 회색으로 정의한다. 검정도 흰색도 아닌, 그 애매한 중간 지점. 화려하지도 않고 특별하지도 않은, 그냥 그런 삶. 어릴 때부터 나는 두드러지는 아이가 아니었다. 가장 똑똑하지도, 가장 못하지도 않았다. 가장 예쁘지도, 가장 못생기지도 않았다. 항상 중간쯤에 위치했다. 학급 임원을 할 만큼 인기가 있지도 않았고, 따돌림을 받을 정도로 외톨이도 아니었다. 대학에 가서도, 직장에 가서도 마찬가지였다. 최고의 성과를 내지도 못했지만, 최악의 평가를 받지도 않았다. 승진에서 밀리지도 않았지만, 가장 빠르게 올라가지도 못했다. 모든 것이 그저 그랬다. 연애에서도 그랬다. 극적인 사랑을 해본 적이 없다. 드라마 같은 운명적 만남도, 영화 같은 이별도 경험해보지 못했다. 자연스럽게 만나고, 자연스럽게 헤어지고, 자연스럽게 또 만나고. 모든 것이 담담했다. 이런 회색의 삶을 살면서 나는 점점 나를 사랑하기 어려워졌다. 자랑할 것도 없고, 특별할 것도 없는 이런 내가 사랑받을 가치가 있을까? 이런 평범한 나를 누가 좋아할까? 이런 생각들이 마음속을 채웠다.


4. 회색에 대한 편견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깨달았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회색에 대한 편견 때문이었다.

우리 사회는 극명함을 좋아한다. 대성공 아니면 대실패, 완전한 선 아니면 완전한 악, 뜨거운 사랑 아니면 차가운 무관심. 회색 같은 중간 지대는 박하게 평가받는다. 재미없고, 특색 없고, 기억에 남지 않는 것으로 여겨진다. 미디어에서 보는 인물들도 그렇다. 주인공은 항상 극적이다. 엄청난 역경을 이겨내거나, 놀라운 재능을 보여주거나, 감동적인 사랑을 한다. 그렇지 못한 인물들은 조연이거나 엑스트라다.

주목받지 못하고, 기억되지 않는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나는 내 회색성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였다.

특별하지 않은 것이 결함이라고 생각했다. 평범한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고 여겼다. 그러니 어떻게 나를 사랑할 수 있었겠는가?


5. 회색의 재발견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회색을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 회색이 단순히 검정과 흰색의 섞임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회색 안에는 무수히 많은 색깔이 숨어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따뜻한 회색이 있다. 베이지에 가까운

포근한 느낌의 회색. 차가운 회색도 있다. 푸른빛이 도는, 차분하고 고요한 회색. 밝은 회색도 있고 어두운

회색도 있다. 각각이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다.


내 삶도 마찬가지였다. 평범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여러 색깔이 있었다. 조용한 아침의 커피 시간, 친구와

나누는 소소한 대화, 책을 읽으며 느끼는 잔잔한 감동, 산책하며 바라보는 하늘의 변화. 이 모든 것들이 내 회색 인생의 아름다운 조각들이었다. 극적이지는 않지만 진실했고, 화려하지는 않지만 진심이 담겨 있었다.

드라마틱하지는 않지만 의미가 있었다. 왜 이런 것들을 가치 없다고 생각했을까?


6. 작은 것들의 소중함

회색을 사랑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작은 것들의 소중함을 발견했다. 매일 아침 일어나서 창문을 여는 순간의 기분. 날씨가 좋으면 상쾌하고, 흐려도 나름의 운치가 있다. 이런 평범한 순간들이 실은 삶의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하철에서 책을 읽는 시간. 드라마틱한 일은 아니지만, 그 시간이 쌓여서 내 지식이

되고, 생각이 되고, 나라는 사람을 만든다. 동료와 나누는 일상적인 대화. 큰 의미는 없어 보이지만, 그런 작은 소통들이 모여서 관계가 되고, 추억이 된다. 혼자 요리하는 시간. 거창한 요리가 아니라 간단한 라면이라도

나를 위해 음식을 만드는 행위 자체가 나를 돌보는 것이다. 나에게 보내는 작은 사랑의 표현이다. 이런 것들을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왜 이런 소중한 순간들을 가치 없다고 여겼을까? 왜 극적이지 않으면 의미 없다고 생각했을까?


7. 평범함 속의 용기

회색의 삶을 살아가는 것도 나름의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세상은 끊임없이 더 높이, 더 빠르게, 더 화려하게를 요구한다. 성공하라고, 특별해지라고, 남보다 앞서라고 말한다. 이런 압박 속에서 평범함을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다. 남들이 야근할 때 정시에 퇴근하는 것도 용기다. 모두가 사교모임에 참석할 때 혼자만의 시간을 선택하는 것도 용기다. 화려한 소비 대신 소박한 생활을 유지하는 것도 용기다.

이런 선택들은 때로는 이해받지 못한다. "너무 소극적이다" "의욕이 없다" "재미없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내 방식을 고집했다. 그것이 나에게 맞는 삶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8. 나만의 리듬

회색을 사랑하면서 나는 나만의 리듬을 발견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일정한 템포. 급하게 뛰지도 않고 멈춰 서지도 않는, 꾸준한 걸음. 이것이 내가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이다. 다른 사람들은 스프린터일 수도 있고 마라토너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산책하는 사람이다.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는 것보다 길 위에서 만나는 것들을 즐기는 사람이다. 이런 나만의 리듬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나는 비로소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더 빨라져야 한다고 채찍질하지도 않고, 너무 느리다고 자책하지도 않게 되었다.


9. 회색의 포용력

회색은 포용적인 색깔이다. 어떤 색과도 잘 어울린다. 빨간색과 함께하면 빨간색을 돋보이게 하고, 파란색과 함께하면 파란색의 아름다움을 부각한다. 자신을 드러내기보다는 다른 색들이 빛날 수 있게 도와준다.

내 성격도 그런 것 같다. 화려한 친구들 사이에서는 그들의 매력이 더 돋보이게 하고, 조용한 친구들과 함께할 때는 편안함을 제공한다. 내가 중심이 되지는 않지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된다. 이런 역할을 하는 사람도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두가 주인공일 수는 없다. 모두가 화려할 수는 없다. 배경이 되어주고, 조연이 되어주고, 든든한 뒷받침이 되어주는 사람도 필요하다.


10. 회색을 사랑하는 이유들

이제 나는 내 회색성을 사랑하는 여러 이유들을 찾았다.


첫째, 회색은 안정적이다. 변하지 않는 중심이 있다. 감정의 기복이 크지 않아 사람들이 편안해한다.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둘째, 회색은 깊이가 있다. 표면적으로는 단조로워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미묘한 변화와 뉘앙스가

있다. 알면 알수록 매력이 발견된다.


셋째, 회색은 진실하다. 과장하지 않고, 포장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정직함이

믿음을 준다.


넷째, 회색은 지속가능하다. 너무 뜨겁지 않아서 금방 식지 않고, 너무 밝지 않아서 쉽게 바래지지 않는다.

오랫동안 곁에 있을 수 있다.


다섯째, 회색은 배려심이 깊다. 자신을 내세우기보다는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한다. 갈등을 만들기보다는

화합을 추구한다.


11. 나를 사랑하는 새로운 방법

회색을 사랑하게 되면서 나를 사랑하는 새로운 방법들을 발견했다. 완벽하지 않은 나를 인정하기. 실수하고 부족하고, 때로는 실패하는 나도 그냥 나라는 것을 받아들이기. 이런 불완전함마저도 나의 일부라는 것을

깨닫기. 작은 성취에도 스스로를 격려하기. 거창한 성공이 아니어도 괜찮다. 오늘 하루를 무사히 보낸 것만으로도, 누군가에게 작은 도움을 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자랑스럽다. 나만의 속도 인정하기. 남들보다 느려도

괜찮다. 내가 걸어가는 길이 다를 수도 있고, 내가 추구하는 목표가 다를 수도 있다. 비교하지 말고 나만의 여정을 존중하기.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 깨닫기.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지루하다고 생각했지만, 그 안에서 작은 행복들을 찾아내기. 규칙적인 생활 자체가 나를 돌보는 방법이라는 것을 인정하기. 이런 방법들을 통해서

나는 나를 사랑하는 방식을 조금씩 찾아가는 중이다.


12. 회색으로 사는 삶의 의미

회색으로 사는 삶도 충분히 의미 있다. 모든 사람이 화려한 색깔일 필요는 없다. 세상에는 다양한 역할이 필요하고, 다양한 색깔이 필요하다. 회색은 배경이 되어준다. 다른 색들이 더 아름답게 보이도록 도와준다. 이것도 중요한 역할이다. 모두가 주인공이 되려고 하면 세상은 혼란스러워진다. 누군가는 조용히 뒷받침해 주어야

한다. 회색은 안정감을 준다. 변화가 너무 클 때, 사람들은 변하지 않는 것에서 위안을 찾는다. 회색 같은 사람들이 그런 역할을 한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어주는 든든함을 제공한다. 회색은 균형을 맞춰준다. 극단 사이에서 중심을 잡아준다. 너무 뜨거운 것도, 너무 차가운 것도 중재해 준다. 이런 역할도 세상에 꼭 필요하다.


13. 회색으로 사랑하는 법

이제 나는 나를 사랑할 수 있다. 완벽하지 않고, 특별하지 않고, 화려하지 않은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다. 회색인 나를 사랑하는 것은 나를 바꾸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다. 내가 왜 이런 성격을 갖게 되었는지, 내가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내게 맞는 삶의 방식이 무엇인지를 탐구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나는 내 안의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고요한 아름다움, 강렬하지는 않지만 오래가는 아름다움, 눈에 띄지는 않지만 깊이 있는 아름다움을 찾았다. 남을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사랑하는

것이 어려웠던 이유를 이제 안다. 나는 나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했다. 완벽하기를, 특별하기를, 남보다

뛰어나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런 기대를 내려놓고 나니, 비로소 나를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회색으로 정의된 내 삶을 이제는 자랑스러워한다. 이것이 내가 선택한 삶의 색깔이고, 내가 걸어가는 길이다. 다른 누구의

색깔이 아닌, 오직 나만의 색깔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나를 사랑하는 진정한 방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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