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희다람 Sep 23. 2023

나에 대한 '돌봄'을 시작해 보다

흑역사조차 소중해지는 시간

나는 가끔 맥주를 마시다가 비릿한 맛이 느껴질 때, 떠오르는 장면들이 있다. 대개는 후회스러운 흑역사 같은 순간들인데, 그런 사소한 것들이 머리를 스치며 나를 수치스럽게 만들 때가 있었다. 그런 것들이 떠오를 때면, 눈을 질끈 감으며 맥주를 꿀꺽 넘겨버렸었다. 그럴 때는 비릿한 맛이 더 생생하게 느껴져, 꼭 인상을 쓰며 잔을 내려놓게 되었더랬다.


그런데 이제 그런 흑역사 같은 순간들이 떠올라도, 큰 감정의 동요가 없다. 오히려 '아, 그땐 내가 이렇게 말했구나, 이렇게 행동했구나' 생각하며 스스로가 웃기고 귀엽기까지 하다. '미친 건가?', '해탈했구나'라는 생각도 들지만, 이제는 그때의 서툴렀던 나의 시간들도 소중하게 느껴진다. 결국 그것들도 그냥 다 '나'의 모습이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생각이 바뀌게 된 계기는, 아마 나에 대한 돌봄을 진지하게 생각하면서부터인 것 같다. 난 원래 생각이 많은 편이긴 했지만, 그게 항상 나 자신에 대한 생각이기보다는 남들에 대한 생각, 어떤 관계에 대한 생각, 어떤 사건에 대한 생각, 그리고 남들이 나를 어떻게 바라볼까에 대한 걱정과 고민이 주였던 것 같다. 이제는 나 아닌 다른 것들을 생각하는 것이나, 과거의 어떤 일들을 후회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안다. 그건 내가 어떤 것에서 기쁨을 느끼는지, 무엇에서 즐거움과 행복을 느끼는지 알아가는 것이다.


20대 때는 괜히 다른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척도 해보고, 실은 좋은데 싫어하는 척도 해보고, 별로 멋있지 않은 것들에 마음을 줘보기도 했다. 그때에는, '내가 줏대가 없는 사람인가?', '나 너무 우유부단한 거 아닌가?'라고 걱정했었다. 하지만 지금에서야 깨달은 것은, 그땐 그냥 나 자신을 들여다볼 방법을 잘 몰랐던 것이었다. 누구나 스무 살에는, 20대에는 다 그렇지 않을까. 맥락은 약간 다르지만, 이전에 유퀴즈를 보며 인상 깊었던 김혜자 선생님의 말이 떠오른다.


'유 퀴즈 온 더 블록' 배우 김혜자 편


아무튼 나도 이제야 조금씩 들여다보고 있어서 많지는 않지만, 최근 느꼈던 행복의 순간들은 이렇다.


음악적 취향이 잘 맞는 사람과 마음에 드는 노래릏 주고받을 때

정처 없이 걸으며 다가온 계절을 온몸으로 느낄 때

12시간을 한 번도 안 깨고 통잠으로 잤을 때

핑계고를 보며 찐 웃음으로 주말 아침을 시작할 때

인생을 조금 더 먼저 시작한 누군가에게 진심 어린 조언을 들을 때

가족들이 나를 자랑스러워할 때


이건 앞으로 하나씩 발견하는 재미가 있을 것 같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적어봐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직접 서른이 되어 보고 느낀 30대는, 아직은 어리숙한 20대와 꽤 성숙한 40대를 잘 이어주는 다리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진짜 어른이 되어간다는 아주 중대한 일에 약간의 유예 기간을 주는 시간이 아닐까.

매거진의 이전글 이 좁은 방 안에 생명체라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