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과 종주국 프랑스가 공인한, 한국인 ‘제과 명장’
2019년, 30대 한국인 명장이 탄생했다.
제과 제빵 종주국인 프랑스에서 이룬 성과라 그 의미가 남다르다. 제과 제빵 분야에서 프랑스 국민도 따기가 매우 어렵다는 ‘명장’ 타이틀을, 당시 서른 여덟 살 한국인이 따내는 쾌거를 이루었다. 주인공은 김영모과자점의 실장으로 있는 김영훈 명장이다. 세계적으로도 그렇고 우리나라에서 30대 젊은 명장의 탄생은 전무후무한 일이다.
2019년 5월, 프랑스 파리에서는 전 세계에서 선정된 명장들이 한데 모인 뜻 깊은 행사가 개최되었다. 이름 하여 ‘MOF 시상식’. ‘MOF(Meilleur Ouvrier de France)’는 한마디로 ‘프랑스 국가지정 최고 장인’이다. 1924년에 시작된 ‘MOF’는 프랑스 정부가 기술 장인을 육성하기 위해 약 4년에 한번 개최하는 명장 경연대회이기도 하다. ‘MOF’는 오랜 역사만큼 그 권위와 위상이 높다. 200여 개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명장을 가리는데, 특히 제과 제빵, 요리 등 요식업 분야의 경쟁이 치열하다. 그러던 2018년 마침내 대한민국 국민이 제과 제빵 분야에서 프랑스 국가가 공인한 ‘명장’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에게 초대받다
2019년 5월에 있었던 시상식에 다녀온 김영훈 명장은 “이번 시상식은 파리 소르본대학교에서 노동부장관과 교육부장관이 참석해 수상자에게 메달을 수여하였고, 이후 엘리제궁에서 열린 축하연에서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수상한 명장들을 격려하고 축하 연설을 했다”고 전했다. 그는 엘리제궁에서 프랑스 대통령과 셀카 사진을 찍기도 했다.
“어느 분야보다 세계적으로 경쟁이 치열한 요식업에서 동양인 최초로, 한국인이 해 냈다는 사실이 매우 기쁘고 영광스럽습니다. 이번 수상을 계기로, 프랑스와 한국이 더 많은 교류가 이뤄지고 여러 분야에서 훌륭한 한국인 기술자가 많이 나오기를 기대합니다. 이번 ‘명장’ 수상은 개인적으로 제 삶의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으며 한 단계 도약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명장’이 되었다고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우리나라 제과업의 발전과 후배 양성을 위해 힘을 다해 노력할 것입니다.”
김영훈 명장의 아버지는 김영모 과자점의 대표 김영모 명장이다. 김영모 명장은 한국을 대표하는 제과 제빵 분야의 최고 기술자이다. 초등학생 때부터 빵을 만들며 놀았던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 이어 제과 명장으로 우뚝 섰다.
4일간 40시간의 결승전, 세계의 높은 벽을 뚫다
일반적으로 ‘명장’이나 ‘장인’은 일생을 한 분야에 매진해 공식적으로 실력을 인정받은 이들이다. 한 분야에만 올곧이 파고들어 그 분야에서 최고의 전문가가 되는 일이기에 그 길이 멀고도 험난하다. 한 가지 기술에 통달할 때까지 오랫동안 전념하고 작은 부분까지 심혈을 기울여 노력하는 것을 ‘장인 정신’이라 한다. 그래서 이 칭호를 받으면 만인으로부터 존경과 칭송을 받는다. 2018년 가을에 출전한 ‘MOF’에서 우승하면서 김영훈 명장은 세계적인 장인이자 칭송받는 명장이 되었다.
“제과 분야를 전문적으로 세분화 하면, 쿠키, 케이크 등 제과 뿐 아니라 초콜릿 류, 아이스크림 류 등으로 나뉘어요. MOF는 선발 과정이 매우 철저하고 까다롭습니다. 대회 6개월 전에 주제가 발표되면 참가자는 그 주제에 맞춰 논문을 쓰고 작품을 구상해요. 저는 ‘어린왕자’를 주제로 아이스크림을 이용해 다양한 제품과 작품을 만들었어요. 결승전은 총 4일 동안 40시간에 걸쳐 이뤄져요. 그만큼 심사가 매우 엄격한데 논문 검토하는 심사위원, 제작 과정 평가하는 심사위원, 시식하는 심사위원이 다 따로 있어요. 각각 8명의 심사위원이 과정별로 나누어 철저하게 심사합니다.”
10대에 떠난 프랑스, 고된 견습생 생활에 방황하기도
김영훈 명장은 열여덟 살에 제과 기술을 배우러 홀로 프랑스로 떠났다.
“아버지의 권유로 중학생 때 영국에 먼저 가서 언어를 익혔습니다. 부모님이 제과점을 운영해서 어릴 때부터 놀이터가 제과점이었어요. 아버지께서 방학 때마다 제과점 주방에서 일을 시켰어요. 제가 밀가루를 뒤집어쓰면서도 빵 만드는 걸 좋아했다고 해요.”
김영훈 명장은 프랑스 현지 제과점에 근무하면서 기술을 배웠지만 그 과정은 녹록치 않았다. 머나 먼 타지에서 새벽같이 일어나 일하면서 기술을 배우는 견습생 생활은 생각보다 고되고 지치는 일이었다. 마음을 나눌 가족이나 친구 하나 없는 타국에서 불시에 닥쳐오는 외로움과도 싸워야했다.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버거운 현실에서 그는 방황하였고 한 달간 도망쳐 나오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돌아왔고 스승은 그를 받아주었다. 이후 마음을 굳게 먹고 일에만 매진하면서 숙련 기술자가 된 그는 2003년, 2009년, 2013년 세계 대회에 도전하였고, 각각 아이스카빙, 초콜릿 공예, 초콜릿 케이크에서 대상을 수상하는 성과를 올렸다.
손가락 잘리는 시련 딛고 값진 성공 일궈
30대 젊은 나이지만 현재의 자리에 오기까지 많은 시련이 있었다. 가장 큰 시련은 제과 기술자로 가장 중요한 손을 잃을 뻔한 일이다. 그는 2002년, 대회 출전을 앞두고 하루 10시간 이상 아이스 카빙 연습에 매달렸다.
스트레스와 녹초가 극에 달했던 어느 날 얼음을 내리치던 순간, 손에 쥔 일자 칼이 미끄러지면서 오른손 중지에서 새끼손가락까지 절반 가량 절단되는 사고를 당했다. 검붉은 피가 순식간에 얼음을 붉게 물들었다. 그는 손가락 봉합 수술을 받고 21시간 만에 깨어났다. 손은 기적적으로 회복되었다. 말 못할 시련과 고통을 묵묵히 이겨내고 지금의 자리에 왔기에 그의 성공이 더욱 값진 것인지 모른다.
“앞으로 우리나라 고유의 제과 제빵 문화와 정신을 잊지 않고 이를 계승하고 발전시켜나가고 싶다”는 김영훈 명장. 꾸준히 한 분야에 매진해 빛나는 성공을 이뤄낸 그의 도전과 끈기가, 이 시대 젊은이에게 단비 같은 희망과 자신감을 심어줬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