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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은 Jun 19. 2024

16살, 공장 시다 알바

내가 태어나서 처음 돈을 벌었던 일은, 공장의 시다 일이었다. 


1987년, 중학교 3학년 막바지에 ‘연합고사’를 보고 난 후, 겨울방학을 맞았다. 중학생의 마지막 방학을 보내며 홀가분한 마음으로 집에 있었다. 어느 날 혜숙언니를 만났는데 “너 아르바이트 할래?” 한다.


‘16살도 일을 할 수 있는 건가?’


무슨 일을 하는 건지 몰랐지만, 내 손으로 돈을 번다고 생각하니 호기심이 생겼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공부만 할 텐데, 방학 때 ‘아르바이트’라는 것을 해보고 돈도 벌어보자.


다음 날 혜숙언니를 따라 광산사거리에 있는 작은 건물 2층으로 올라갔다. 2층 전체가 의류공장으로 수 십 대의 미싱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했다. 나무판 위의 미싱 기계 앞에는 의류더미가 곳곳에 쌓여 있었다. 우리는 사장이라는 아저씨를 만났다. 내부가 시끄러워 칸막이로 쳐진 사무실에 들어갔다. 혜숙언니 친구까지 세 명이 아르바이트한다고 간 것이다. 


얼굴에 곰보자국이 있던 사장은 “아침 9시부터 6시까지 일하고 점심은 1시간 쉬고, 하루 일당이 4천원”이라고 했다. 혜숙언니는 일당이 적다며 500원을 올려달라고 했다. 혜숙언니가 뜻을 굽히지 않자, 사장은 인심 쓰듯이 4,500원에 하겠다고 했다. 우리는 주말 빼고 열흘간 일을 하기로 했다.  


16살에 이 의류공장에 처음 들어섰을 때, 공장이 그리 낯설지 않았다. 그 때 우리 집이 실공장을 하고 있었다. 쌍문 1동 꽃동네 아래, 상가 건물 지하에서 아빠가 실공장을 운영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공장에 자주 놀러가 놀고, 간단한 포장 작업도 하고, 가족과 자장면도 시켜 먹던 기억이 있다. 


다음 날 아침부터 10분 정도 걸어서 의류공장에 도착했다. 내가 하는 일은, 의류 더미를 옮기는 일이었다. 팔뚝 따로, 몸통 따로 재단해 박고, 이를 하나로 연결해 상의를 완성하는 공정이었다. 이쪽으로 옮기고 저쪽으로 옮기고, 공정에 맞게 미싱하는 직원 앞에 의류를 갖다 놓았다. 

그 때 ‘미싱사’들은 대부분 젊은 여성이었다. 16살인 나와 나이 차가 나봤자, 5살 조금 넘는 정도로 보였다. 점심시간에는 잽싸게 집으로 달려가 밥을 먹고 공장에 다시 갔다. 이것도 노동이라고, 평소 보다 밥을 많이 먹고 일하곤 했다. 


16살이 하는 일이라는 게 단순 보조일이여서, 그리 힘들지 않았다. 시간이 얼른 가기만을 기다렸다. 나는 어릴 때부터 실공장에서 기계 돌아가는 소리를 익숙히 들었던 터라, 이 공장의 미싱 소리도 적응되었다. 그런데 공장 안에서는 시간이 느리게 가고 지루했다. 


공장에서는 공정에 따라 움직이기에, 계속 옷을 나르는 게 아니었다. 중간 중간 아무 것도 안 하는 시간도 있었다. 그 때는 바닥에 떨어진 실밥이나 의류 조각 등을 주워서 버리는 등 주변을 정리했다. 어린 마음에 아무 것도 안 하고 있으면 ‘그만 두라’고 할 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던 듯하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한 미싱사에게 유독 시선이 갔다. 그 미싱사는 20대 초반으로 보였는데, 그 때 내가 보기에 상당히 미인이었다. 긴 파마머리에 하얀 얼굴, 고개를 숙이고 미싱에 열중하고 있는데 나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았다.


‘저렇게 예쁜 여자가 어쩌다 공장에서 일하고 있을까. 마음만 먹으면 더 많이 버는 직업을 가질 수 있을텐데…’


대략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 여성이 낯선 시선을 느꼈는지 갑자기 고개를 든다. 그리고는 나와 눈이 딱 마주쳤다. 그는 나를 귀여운 동생 보듯이, 미소 지으며 눈을 찡긋하였다. 나는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괜히 미안했다. 


‘그래, 직업에 귀천은 없어, 무슨 일이든 열심히 하면 되는 거지.’


어느 날은 생소한 장면을 보았다. 

일이 끝나고 내려오는데, 1층 안쪽에 방문이 나란히 있었다. 그 앞에는 여자 신발이 여러 개 보였다. 열려있는 방안에는 미싱을 돌리던 여성들이 있었다. 그 때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들을 ‘여공’, 비하하는 말로 ‘공순이’라 부르기도 했다.


‘여기에 살면서 일하는구나. 바로 아래층이 기숙사인 거구나.’


어린 내 눈에는 다소 충격이었다. 자기 집이 아닌, 낯선 곳에서 여럿이 한 방을 쓰고, 열악한 작업환경에서 일하는 여성들을 처음 보았던 것이다. 한 가정의 장녀이며, 또한 딸들인, 이들이 힘들게 일해 버는 돈은, 어려운 집안 형편에 쓰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6살에 이 공장에서 잠깐 일하면서 나는 무엇을 얻고 깨달았을까. 


우습게도, 이곳 공장 일이 끝나고 남은 것은, 갑자기 퉁퉁 불어난 내 몸이다. 저녁 6시에 끝나고 집에 가면 나는 ‘소나기 밥’을 먹었다. 배고파서 허겁지겁 밥을 먹은 것이다. 열흘 동안 저녁마다 ‘소나기 밥’을 먹어대니, 체중 45kg에서 갑자기 50kg를 넘어버렸다. 

문제는 갑자기 살이 찌면서 허벅지와 종아리에 튼살이 생겼다. 그 때가 한참 성장기라 그랬는지, 더 희얀했던 것은 살이 찌면서 가슴까지 커졌다는 것이다. 이것 때문에 나는 고등학교 시절 붕대로 가슴을 꽁꽁 감추고 싶을 만큼, 콤플렉스를 안고 살았다.         


공장에서 열흘 간 일하고 총 4만 5천원을 벌었다. 봉투에 든 초록색 만 원짜리를 보는 순간 기분이 묘했다. 16살 나는 만 원짜리를 내 손에 처음 쥐어 본 듯하다. 봉투 째 그대로 가방에 넣어두었다. 다음 날 버스를 타고 길음시장에 갔다. 길음시장은, 예전부터 엄마와 재봉실을 납품하러 가봐서 잘 알았다. 그 시장에는 큰 옷가게가 있었는데, 나는 거기서 옷을 사고 싶었다. 물 만난 물고기 마냥, 신나게 가게에서 옷을 골랐다. 


당시 유행하던 골덴 스타일의 빨간색 자켓(당시 ‘마이’라고도 함) 한 벌과 하얀 남방, 노란색 조끼, 골덴 검은 바지를 샀다. 내 손으로 번 돈을 이날 옷값으로 다 써버렸다. 옷이 든 두툼한 비닐백을 들고, 뿌듯한 마음으로 집에 왔다. 


그 빨간색 자켓은 중학교 졸업식과 고등학교 입학식에 입었고, 고교 시절 겨울 내내 교복 위에 입었다. 

나에겐 단순히 옷 이상의 의미와 추억이 있는 옷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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