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은 개울가 징검다리에 앉아 물장난을 하는 소녀를 처음 만난다. 소녀는 세수를 하다 말고 물속에서 조약돌 하나를 집어 “이 바보!” 하고 던진 후, 갈밭 속으로 사라진다.
소년은 소녀가 던진 조약돌을 주워 주머니에 집어넣는다. 다음날 소년은 개울가로 나와 보았으나 소녀는 보이지 않는다. 그날부터 소년은 소녀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에 사로잡힌다.
중학교 다닐 때 국어책에 실렸던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에 나오는 구절이다.
누군가와 인연을 맺는 과정은 ‘첫 만남’에 이은 ‘첫인상’과 ‘끌림’으로 시작된다. 국어책에서 ‘소나기’를 읽었던 중학생 시절, 나에게도 첫사랑이 찾아왔다. 엄밀히 말하면 짝사랑이다. 내 짝사랑의 상대는 동급생 S였다. 2학년 때 방과 후, 보충수업을 했는데 다른 반이었던 S가 우리 반에 와서 수업을 같이 하게 되었다. 어느 날 선생님이 출석부 이름을 부르는데, 뭔가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가 하얀 스웨터를 입은 하얀 얼굴의 S를 처음 보았다.
‘소년이 개울가에서 소녀를 처음 만난 이후, 애틋한 그리움에 사로잡히듯, 나는 그 소년의 심정이 되어 S에게 애틋한 마음을 가졌다. 2학년 늦가을에 처음 S를 본 이후, 3학년 때까지 S로 인해 나는 사춘기를 혹독하게 앓았다. 교실 밖 복도에 그가 지나가기만 기다리고, 창밖으로 그가 운동장에서 축구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등하굣길, 복도, 운동장을 오가는 수많은 동급생 속에서 혹시 그와 부딪히지 않을까, 내 시선은 늘 S를 좇았다.
그렇게 혼자 애태우다가, 시간은 무심히 흘러갔고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더 이상 S를 볼 수 없었다.
대학 4학년이던 1994년, 중학교 졸업 후 약 7년이 흐른 후, 나는 무슨 용기가 생겼는지 S에게 편지를 보냈다. 중학교 졸업 앨범에 있는 집 주소였고, 세월이 7년이나 흘렀으니 이사를 갔다면 못 받을 것이다. 편지에는 대략 ‘나는 중학교 동창 아무개인데, 한번 만났으면 한다’고, 날짜와 시간, 장소를 적어 두었다. 9월의 어느 날 저녁 8시, 수유역 ‘N커피숍’이었다. 어느 덧 날짜가 다가오고 있었다. 중학교 졸업 후 7년 만에 보는 짝사랑이라 무척 떨렸다. 몇 번씩 나갈까 말까, 고민하다가, 내가 벌인 일이며, 그가 안 나와도 그만이라고 생각해 나가기로 했다.
1994년 9월 중순, 추석 연휴를 며칠 앞둔 날이었다.
내 방에서 무채색 정장을 입고 화장을 했다. 그러다 문득 TV를 틀었는데 뉴스 속보가 막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내 스물세 살 인생에, 상상을 초월하는 사건 하나가 격양된 앵커의 입에서 나오고 있었다. 당시 우리 사회를 공포와 충격에 몰아넣은 일명 ‘지존파 사건’이었다. 20대 초반 남성 대여섯 명이 조직을 구성해, 한적한 시골에 일명 ‘살인공장’을 차려놓고 ‘부자로 보이는 사람’을 무작위로 납치해 돈을 빼앗고 무참히 살해한, 당시 우리 사회의 전대미문 사건이었다. 이런 무차별적 살인이 있었는지 국민들은 몰랐는데, 추석을 앞둔 그날 뉴스는 이 ‘지존파’ 일당을 모두 검거했다고 특보로 내보냈다. 나는 뉴스를 보면서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저녁 8시면 어두워지는 시간인데, 나가기가 겁나네. 무엇보다 S가 진짜로 나온다는 보장도 없고, 그래 가지 말자. S는 내가 누군지 조차 모를 거야. 내가 쓸데없는 짓을 했네.’
중요한 것은, 그날 저녁에는 무서워서 도저히 못 나가겠다는 것이었다. 결국 난 나가지 않았다. 그런데 자꾸만 신경이 쓰여 저녁 8시가 조금 넘은 시각에 커피숍으로 전화를 걸었다.
“혹시 손님 중에 OOO 씨 있나요?”
여직원은 내가 한 말을 똑같이 따라서 말한다. 잠시 후, 전화기에서 남자 목소리가 들린다.
“제가 OOO입니다.”
‘어머나, 진짜 나오다니, 이를 어쩌지?’
놀란 가슴을 누르고 침착하게 말했다.
“어머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편지 보냈던 OOO입니다. 제가 갑자기 몸이 안 좋아져서 못 나가게 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다음에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내 나이 스물세 살, 그 당시 ‘지존파 사건’이 없었다면 그날 내가 TV를 틀지 않았다면, 그래서 예정대로 S를 만났다면 내 첫사랑은 이루어졌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