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 Dottie Kim 글 : Mama Lee
신라인의 DNA는 중앙 아시아를 누비던 스키타이와 일치한다.
금발에 우락부락한 광대뼈를 가진 엄청난 키와 체구의 스키타이족은 호전적인 유목민이었다.
광활하게 펼쳐진 발도르차를 마주하니, 말을 타고, 활을 쏘며 평원을 달려 도착한 신라인처럼 심장이 뛰고, 숨이 가빠진다.
쉰 살의 아빠는 만자의 탑을 오르고 있다.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갈수록 마음속 바닥까지 확 트이는 시원한 공기와 다양한 기억들로 마음이 두근거린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자동차가 지나가면 보지 않고도 차의 종류를 맞췄다고 한다.
부르릉, 부릉부릉, 푸크크크크, 콰콰콰콰, 크르르
듣기만 해도 기름 냄새가 나는 것 같던 스피드의 소리를 아빠는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심장이 쿵쾅 거리고, 주먹을 꽉 쥐게 되고, 당장이라도 달려 나가야 하는 것처럼 발이 부들부들 떨렸다.
포니, 브리사, 그라나다
골목에서 놀다 가도 자동차가 ‘제발 내 이름을 불러줘’ 하며 쾅쾅 배기음을 울리면, 기종이 무엇인지 단박에 맞추는 걸로 화답하곤 했다.
또래 아이들의 놀이는 큰 흥미가 없었다.
어린 시절 아빠는 번뜩이는 속도, 자극적인 소리를 만드는 자동차의 모양과 구성이 궁금하고 재미있었다.
풍성한 볼륨과 매끈한 마무리를 동시에 갖고 있는 범퍼, 기종마다 다른 그라운드 클리어런스, 불덩이처럼 달리는 휠을 감싸는 펜더, 자동차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캐릭터 라인, 자동차의 얼굴 프런트 마스크, 달리는 차체를 감싸 공기의 흐름을 만드는 바디, 심장처럼 펄떡이며, 거친 호흡을 뱉어 내는 머플러, 속도와 열을 컨트롤하는 브레이크 캘리퍼
아빠에게 자동차는 세상에서 가장 빠른 치타 이기도, 거대한 돌파력으로 앞에 놓인 모든 장애물을 물리치는 코뿔소 이기도 했다.
자동차 부품들이 하나씩 펼쳐지며, 3차원의 이미지로 머릿속을 꽉 채웠다.
운전석에 앉아 최고의 스피드로 미로처럼 얽힌 도로를 돌파하는 상상을 하곤 했다.
속도와 마찰이 만드는 매혹적인 합주곡을 상상하며, 아빠는 흥분한 경주마처럼 핸들을 꽉 잡고 운전석에 앉아 있다. 눈앞에는 장애물이 사방에 놓인, 음표처럼 꾸불 꾸불한 길이 펼쳐 있다.
거친 숨을 고르며, 깊이 호흡한다. 하나, 둘, 셋.
마침내 레이스가 시작된다, 발바닥에 강력한 파워를 실어 엑셀을 밝고, 장애물과 미로처럼 얽힌 길의 최단거리를 분석하고, 돌파의 방향을 판단하며 좌로 우로 드리프트 하며 달려 나간다.
자동차는 짐승처럼 울부짖고, 거친 숨을 토하며, 불덩이처럼 내달리고, 아빠는 온몸의 신경이 전율하며, 짜릿한 스피드에 매혹된다.
미로를 지나면, 폭과 길이를 예측할 수 없는 눈부신 빛의 터널이다.
150, 200, 300 세상에 없던 놀라운 속도로 롤러코스터처럼, 섬광처럼 터널을 달려 나간다.
직선을 달리는 것이 아니라 터널의 360도 벽면을 타고 회전하며 전진한다.
속도가 너무 빨라서 몸이 흔들리고, 엑셀을 누르는 것이 발인지, 손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거대한 회오리에 빨려 들어간다.
갑자기 웜홀을 통과하여 다른 우주에 닿은 것처럼, 너무나 고요한 거대한 평원이 나타난다.
구름이 장식처럼 걸린 파란 하늘, 당장이라도 넘실대는 거대한 몸집을 일으킬 듯한 초록의 물결, 끈끈하고 단단하게 착 달라붙어 있는 주홍색 대지.
그 어떤 것도 소리를 내어 움직이지 않고, 바람에 따라 살랑이는 평원.
심장을 두드리던 속도의 소리를 따라온 아빠는 의외의 장관에 통째로 사로잡힌다.
흘러가지만 속도가 없는 세상, 장엄하게 펼쳐져 있지만 지배하지 않는 공간.
불러달라고 외치지 않으나, 탄식을 이끄는 공간, 발도르차 (Val d’Orcia)
Orcia는 강의 이름이고, Val은 평원을 뜻한다고 한다. “강의 평원”이라니 얼마나 멋진 단어인가.
만자의 탑 꼭대기에 펼쳐진 발도르차를 보며, 쉰 살의 아빠는 인생 레이스의 반환점을 지나왔음을 깨닫는다.
신라인의 피를 물려받아, 스키타이처럼 질주하고, 돌파하는 호전적인 레이서를 꿈꾸었으나, 시간의 강을 지나 평범한 아빠라는 평원에 도착했다.
멈추어 머물지 않고 세상을 향해 달리던 유목민이 아니라, 집을 짓고 곡식을 기르는 정착민이 되었다.
오랫동안 눌러왔던 혹은 답답하게 막혀 있던 뭔 가가 펑 뚫리는 것 같기도 하고, 짜릿한 흥분으로 펄떡이던 순간이 상상조차 할 수 없이 멀어졌다는 것이 서글프기도 하지만, 따뜻하고 단단한 평원에 “가정”이라는 집을 지었다는 것에 매우 안심이 된다.
아빠는 하나로 담을 수 없는 마음을 발도르차의 평원에 던지고, 크게 숨을 들여 마신다.
그리고 다시 계단을 하나씩 내려와 반환점을 지난 레이스로 복귀한다.